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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소개] 이두황(李斗璜. 1858∼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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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내용
《이두황(李斗璜. 1858∼1916)》
◆ 약력
1858년 서울 방교의 평민집에서 출생
1883년 친군초관이라는 무인말단직에 임명
1884년 수문장
1889년 흥해군수
1894년 장위영 참령관,서호도순무영 우선봉으로 동학농민군 진압
1895년 훈련대 제1대대장, 민비시해 가담
1900년 전북도 장관
1916년 서보장 훈장
◆ 영웅호걸인 양 활개치고 다니는 민비시해 연루자
명성황후 시해사건 때 일본의 주구로서 활약한 조선인 연루자 가운데 이주회, 박선(朴銑) 등은 처형당했고, 이두황, 우범선, 구연수(具然壽)는 일본으로 도망쳤다. 이들 중 우범선은 1904년 정부에서 보낸 자객 고영근(高泳根)에게 암살당했지만 나머지 두사람은 고종 양위 직후인 1907년 9월 특별 사면된다. 이들은 귀국 후 또다시 일본의 압잡이로서 전면에 등장하게 되는데, 구연수는 경무국 부경무사가 되었고, 이두황은 중추원 부참의를 거쳐 전라북도 관찰사로 활약하게 되었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대역죄인인 이들을 중용하게 된 것은 그 누구보다도 신뢰할 수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었다.
이두황은 1858년 서울의 서부 방교(芳橋)의 평민 집에서 태어났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끼니를 때우지 못할 정도였다 한다. 1883년 친군초관(親軍哨官)이라는 무인 말단직을 시작으로 관계에 발을 들여 놓은 그는 1884년에는 수문장이 되고 1886년에는 훈련주부(訓練主簿), 이듬해에는 첨정(僉正)에 올랐다. 1889년에는 무관으로 능력을 인정받아 흥해군수가 되었고, 1894년에는 정3품에 올라 장위영 참령관에 임명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자 그는 다른 친일개화파들과 마찬가지로 부령(副領)으로 승진하여 서호도순무영 우선봉(西湖都巡撫營 右先鋒)으로 진압에 앞장서 큰 공을 세웠다.
이두황과 일본과의 본격적인 인연은 청일전쟁에 참전하면서 맺어진다. 그는 일단의 조선인 병사를 데리고 일본군 제5사단장 노즈(野津) 중장을 찾아가 참전시켜 줄 것을 간청해서 종군하게 되었다. 그는 일본군을 따라 평양까지 들어갔는데(이때 우범선도 병참부에 소속되어 평양에 입성하였다고 한다) 그의 역할은 통역 및 정탐 활동이었다. 또한 그는 청군 병사들의 시체를 매장하는 작업에 투입되어 '혁혁한 공'를 세웠다고 한다.
이 종군활동의 공로로 이두황은 김홍집 친일내각에서 양주목사(1895)로 승진되었다가 일본인을 교관으로 하는 친일적인 훈련대가 생기면서 훈련대 제1대대장에 임명되었다(우범선은 제2대대장). 삼국간섭 이후 일본세력이 쇠퇴하게 되고, 민비를 정점으로 하는 친러세력이 등장하게 되면서 훈련대는 해산 위기를 맞아 드디어 1895년 10월 7일 해산되어 버렸다. '민비제거'를 획책하고 있던 일본 당국은 이를 빌미로 하여 10월 8일 천인공노할 민비시해사건을 자행하였는 데, 이때 이두황은 일본군을 도와 훈련대 제1대대를 이끌고 광화문의 경위를 맡았고, 우범선의 제2대대는 경복궁 뒷문을 경호하였다. 8일 새벽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이 광화문에서 이두황을 보고 질책하자 그의 뒤에 있던 일본군이 홍계훈을 사살하였다.
이 사건 후 이들 대역죄인들은 체포령을 피해 일본으로 도망쳤는데 이때부터 14년 동안의 망명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두황, 우범선, 구연수 3인은 일본인 범죄자들이 구속되어 있는 히로시마(廣島)에 갔다가 교토(京都)로 거쳐를 옮겼다. 한편 '민비시해'의 주범 미우라(三浦梧樓)를 비롯한 47명이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석방되어 동경에 모여들자 이들도 도쿄로 옮겨 일본 당국의 비호 아래 생활하였다.
이들이 도쿄에 있을 때, 아관파천 이후 '일본당'으로 행세하던 조희연, 권형진(權瀅鎭), 황철(黃鐵) 등도 일본으로 도망쳐와 같이 한패거리를 이루면서 마치 영웅호걸인 양 활개를 치고 다녔다. 얼마나 설치고 다녔는지 이들을 돌보아 주고 있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도 "자기 나라 국모를 죽인 자들이 은인자중하지 않는다"고 질책할 정도였다고 한다.
한편 조선 정부에서는 이들을 암살하기 위하여 자객을 일본에 계속 보냈다. 그래서 이들을 데리고 있던 다케다 한시(武田範之:승려이자 우익 낭인 으로서 시해사건 연루자이고 한일'합병'의 이론가)가 2년 동안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위기를 모면하게 하였다. 이들은 1897년 도쿄의 단고시바(團子坂)에 일단 거처를 정한 뒤 함께 생활하다가 뿔뿔이 헤어졌다. 한학과 서예에 약간 조예가 있던 이두황은 한량 생활을 하면서 서화를 팔아 주색의 비용에 충당하였다. 주색에 빠진 나머지 병에 걸린 적도 있었다고 한다.
◆ 이토의 보호하에 관리로 출세
1907년 순종이 왕위에 오른 후 통감 이토는 특사를 단행하였는데(정미특사), 이 때 이들을 비롯한 친일 주구들에게도 사면령이 내려져서 이들은 다시 본국에 매국활동의 무대를 가지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제2차 한일협약'으로 관리임용에 있어 통감 이토의 승인이 사실상의 필수요건이 되고서부터는 고급관리에 대한 인사권을 완전히 통감부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이토는 일진회(一進會)를 이용해서 대대적인 친일운동을 일으키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송병준을 억지로 이완용 내각에 들여보내면서 30명 안팎의 친일분자를 한꺼번에 중앙의 국장, 지방의 관찰사로 임명했다. 그 중에는 이두황, 이진호, 조희문(趙羲聞), 구연수 등 일본 유학생 출신이나 망명자들이 득실거려, 중앙정계는 이들 친일분자의 매판적이고도 매국적인 성향만이 판을 치게 되었다.
이두황은 정미특사로 1097년 귀국하자마자 중추원 부참의에 올랐고 이듬해는 전라북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910년 '병합' 후에는 박중양(충남), 신응희(함남), 이규완(강원)과 더불어 전라북도 도장관(고등관 3등)에 재임명되었다. 그후 정부로부터 고등관 2등(1911), 정5위(1913)를 거쳐 1916년 3월 죽을 때에는 고등관 1등, 종4위, 훈3등에 서보장(瑞寶章)의 훈장까지 받았다. 도장관 시절 전북주재 일본인에게 얼마나 잘하였는지 많은 일본인들이 그의 업적을 칭송하고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다고 한다.
일종의 정신 분열현상인지는 모르나 많은 매국노들은 공통적으로 주색을 탐닉하였는데, 이두황도 예외는 아니어서 일본에 망명했을 때나 귀국해서나 주색에 빠져 있었고 여복 또한 많았다고 한다. 한 예를 들면, 일본으로 도망치기 전 서울에 보패라는 유명한 기생이 있었는데, 이두황이 많은 적수를 물리치고 가로채어 몇년간 동거생활을 하였다. 이들은 십수년간 떨어져 살고서도 서로 잊지를 못하다가, 금의환향(?)한 후 재회하여 1년간 다시 동거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그의 묘는 전주 기린봉에 있는데 묘비는 같은 친일파인 김윤식이 짓고, 정병조가 썼다.
■ 강창일(배재대 교수·한국사)
참고문헌
{李斗璜翁追懷錄}, 1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