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김현태(金顯台)
1864~1895. 본관은 김해. 자는 덕운(德雲). 김현태는 금구현 봉남면 봉수동 출신으로 공주전투에 참여하였다가 패하고 금구현 남산에서 관군에게 잡혀 1895년 1월 10일 금구현에서 처형됨. 김인배와는 한 집안간으로 항렬이 하나 위임.
김중태(金重泰)
1940~ . 이리에서 시멘트와 철근을 취급하는 대웅상사의 사장 겸 전무이며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이사로 활동중.
이이화
다시피는 녹두꽃
우선 집안 내력부터 들어보면 이러하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하고 아버님한테 얘기를 들어보니까 윗대가 김제군 봉남면 봉수동에 사셨답니다. 저희 할아버지 말씀을 그대로 옮긴다면 지금 현자 태자 하는 저희 증조할아버진데, 증조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성함이 성자 현자로 그 양반은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를 했고, 그리고 바로 밑에 할아버지가 가선대부 호조참판을 하셨어요. 그러니까 증조할아버지하고 그분의 할아버지, 그분들이 농사를 상당히 광작을 해서 천 석 정도는 된 것 같아요.
이 말처럼 『대동보』에는 김현태의 큰할아버지인 성현은 승정원 좌승지로, 김현태의 할아버지인 제풍(濟豊)은 호조참판으로 기재되어 있다. 아버지 창식은 벼슬이 없으나 작은아버지 도식(道植)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겸 오위장(五衛將)으로 기재되어 있기도 하다. 그런 벼슬이 실직인지 증직(贈職)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상당한 지주였다는 것은 충분히 수긍이 간다. 그 많은 재산을 그도 예외없이 탕진한 것 같다.
거기에서 동학 때 자금을 대줬다고 간단히 말씀하시데요. 그래서 할아버지가 공주로 가서, 여기 우리 대동보에 나와 있는 것같이 공주성에 삼만 명을 이끌고 가서 함락시키구 회군하다가 금구현 남산에서 잡히신 걸로 나왔어. 공주성을 진격 함락하고 회군하여 금구현 남산에서 관군에 피체되어 가지구 금구현 거수하[巨樹下]에서 을미 1월 10일에 처형되었다. 그렇게 기록에 나와 있거든요. 그 이상 우리는 원체 어려서 잘 모르고 구전구전되어 왔지요.
그가 할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이렇게 전하였고 또 이 사실은 『대동보』에도 그대로 기재되어 있다. 이 『대동보』를 만들 적에 대종중(大宗中)이 그의 집안에 있었고 지금은 작고한 그의 형님 용태가 관여했다고 하니 구전된 사실을 적어놓은 것 같다. 다만 공주성 전투에 참여한 사실 이외에 공주성을 함락했다는 이야기는 물론 포장된 것이다. 그리고 원평, 태인 전투가 각기 11월 25일과 27일에 벌어졌고 이어 광주, 나주 전투가 벌어졌다. 김현태가 잡힌 날짜로 보면 거기에 참여하고 집 근방으로 몸을 숨겼다가 잡힌 것 같기도 하다. 실제로 광주로 갔었다는 말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 봉산면에는 남산리가 있고 또 금구 관아 자리에는 큰 둥구나무가 그대로 서 있다. 김현태의 시신은 유실되지 않았다. 시신을 어떻게 모셨느냐고 묻자 “시신은 모셨다고 그러대요. 우리 할머니나 우리 집안사람들이 그 근방에 많이 있었으니까. 현재 봉남면 문명리 그 옆 동네에다 묘를 모셨다고 해요. 증조할머니,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 선산이 거기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아마도 번족한 집안의 덕분으로 시체는 찾아왔을 것이다. 김현태의 인품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기골이 장대하셨다니까 힘은 좋았겠지. 대단한 인물이었데요. 자손들로 하면 선조들은 다 좋게 해서 그런지 몰라도 할아버지 얘기를 들어보면 구전이 그렇게 내려오는 거지요. 대단하셔서 김인배 장군하고 가까운 친척이기 때문에 아마 집안에서 그 두 분이 활동을 크게 하신 것 같아요.
그저 들은 이야기만 전할 뿐 여느 경우와 달리 담담하게 말한다. 어쨌든 김현태는 딸만 넷을 두고 죽었고 그의 아내는 살아남았다. 그러했으니 보통의 관계대로 종조카인 종우를 양자로 맞이하여 가계를 잇게 하였다. 그 후의 피해상황에 대해서는 “그거 팔아서 쓰고 그러셨겠지 자금 대고 그런 것 같어. 우리 형님, 아버님하고 할아버지 얘기를 들어보면, 그래서 동학 때 망했다 말하더라고 가끔 할아버지가 ‘교를 믿지 말아라’ 그런 말씀만 하시고. 다 팔고 어쩌고 해서 그랬겠지. 그때는 문서만 왔다갔다하면 파는 것 같드만”이라는 정도를 들려준다.
그러니까 할아버지께서 거길 떴어요. 지금 현재 이리시 석탄동에 거의 재산도 없는 상태에서 오셔서 자수성가하시다시피 재산을 이뤘지요. 지금도 거기 사당도 있고 우리 선조들 묘가 그 근방에 쪽 있으니까. 김씨들이 거기 많이 있었죠. 그때 거의 동네를 이뤘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많이 이사들 나가시고 그러는데, 저도 지금 그 동네 실상은 잘 모르고 시제 때나 좀 가보고. 저희 친척들은 나이 드신 분, 몇 분 지금 살아계십니다.
김중태의 할아버지는 사연은 모르겠으나 고향을 떠나 살았고 타향에서 살림을 이루었다. 이때 증조할머니도 물론 함께 와서 살았는데 이 할머니는 손자들과 증손자들을 업어 키워주었다. 김중태가 태어나기 바로 전에 작고했다 한다. 이렇게 이사 다니며 사는 통에 증조할아버지의 유품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유품은 지금까지 없어요. 이사 다니고 그랬으니까. 우리 어렸을 때 윤기 나는 살림들이 많이 있었거든. 자기 같은 것도 많이 있고 그랬는데 이사 다니면서 다 없어지고 [누가] 가져가기도 하고 그런 것 같아요.
그러하니 지금도 흔적이라고는 산소만 모시고 있는 셈이다. 그들 가족은 맨몸으로 이리시 석탄동으로 이사를 했다. 이사온 후 농민군 출신의 후손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재산을 일구며 살았다 한다.
우리 어렸을 때 부자였어요. 할아버지가 거기서 나머지 팔아갔고 오셨나 몰라도 이 근방에서는 익산군 춘포면 관내에서는 제일 부자소리를 들었지. 이리에다 땅도 사놓고 형님은 돌아가시기 전에는 거기서 할머니가 물려준 재산으로 병원도 짓고 병원하시다 얼마 전에 돌아가셨어요. 우리는 고생을 하나도 안했어요. 할아버지가 왜정 때 조금 치부를 많이 하셨는 모양이에요. 그래서 이 근방에서 누구누구하면 다 알 정도로 재산을 다시 이뤘지.
오늘날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전한다.
그때는 우리 할아버지 지론이 ‘교하지 마라’였어요. 근디 저는 천주교 신자입니다. 천주교는 우리 아버님께서는 안하시고, 어떤 계기가 되어 칠 팔 년 전에 영세 받고 식구들도 영세 받고, 지금 어머님이 요 밑에 살고 계신데 어머님도 아직 교인이 아니예요. 우리 형님이 한 삼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그 양반은 대세 받고 돌아가셨거든. 그러니까 우리 형님까지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었지. 우리 집안이 우리대에서 천주교 신자가 다 되었지.
시대가 달라진 현상일 것이다. 그리고 농민군 지도자의 증손자로서는 보기 드물게 재산을 불리고 사회진출도 활발하게 벌이며 산 경우에 속한다. 김중태는 이리에서 시멘트와 철근을 취급하는 대웅상사를 경영하고 있고,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영선, 영기는 의사, 항공사 등으로 진출했고 딸도 회사에 다니며 아내 차용운은 전주대 가정학과 교수, 조카 영규도 의사로 봉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