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손여옥(孫如玉)
1860~1894. 본관은 밀양. 족보명은 성준(聖準)이고 여옥(如玉)은 자. 전북 정읍 출생으로 동학농민군 3대 지도자의 한 사람인 손화중의 족질. 1893년 11월 사발통문 서명자 20명 중 한 명으로 정읍 접주. 동학농민전쟁 전시기에 걸쳐 두드러진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1894년 12월 27일 처형됨.
손주갑(孫周甲)
1950~ . 손여옥의 손자로 순창 강천사에서 태어나 한국전쟁 뒤 정읍으로 이주해 성장. 현재 서울에서 사업을 하고 있고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상임이사를 맡고 있음.
1937~ . 손여옥의 증손으로 순창군 팔덕면 청계리에서 농사짓고 있음.
김양식
다시피는 녹두꽃
동학농민전쟁 때 농민군 지도자로 활동한 손여옥에 관해서는 그런대로 자료가 남아 있어 그의 족적을 더듬어볼 수 있다. 그는 1893년 11월 대대적인 농민혁명을 모의키로 결의한 뒤 작성한 사발통문에 서명한 20명 중 한 명으로, 손화중 포(包)에 속해 있던 정읍 두령(頭領)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농민전쟁이 발발하자 차치구(車致九)등과 함께 정읍의 휘하 농민군 1,200여 명을 이끌고 참전하며 장령(將領)으로 활동하는 등 초기부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오지영, 『동학사』). 그리고 9월 재기병 때도 전봉준의 지휘에 따라 출전한 뒤(정부기록보존소, 「전봉준판결선고서원본」, 『동학관련판결문집』, 1994, 30쪽), 12월 체포 처형되었다. 이러했던 손여옥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후손이 밝혀진 것은 30여 년 전이었다. 그것은 다른 농민군의 후손 대부분이 그렇듯이 집안에서 농민군의 후손이란 점을 숨겨오던 상황에서 1967년 정읍에서 사발통문이 발견된 것이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제가 68년도로 기억이 되는데요. 그때 할아버지 함자를 처음 알았어요. 저희 아버지께서 67년도에 작고하셨거든요. 아버지 돌아가시고 난 뒤에 할아버지 함자를 처음 알았어요. 아버님 생전에 전혀 저희들한테 그런 말씀 안하셨어요. 왜냐하면 집안의 내력 같은 것 얘기를 하면은 어린 것들이 어디 나가서 아무한테나 얘기하다 보면 혹시 나쁜 일이라도 생길까봐 아버님께서는 어렸을 때부터 피해의식 속에 사신 거예요. 그래서 그런 말씀을 전혀 안하시고 나중에 어머니가 그런 말씀을 하시드라구요. 너희 할아버지께서 갑오년에 다섯 고을의 대장을 했다고 하더라는 얘기를 허시드라구요. 제가 고등학교 1학년이었어요. 그때 67년도 11월달인가 12월달인가, 사발통문 원본이 발견되어 각 신문에 보도가 되고 그랬거든요. 그때 저희 집안에 손성탁씨라고 정읍에서 읍장하신 분이 계셨어요. 그분이 저한테 편지를 하나 보내셨드라구요. 그 내용이 뭐냐하면, 사발통문에 서명하신 분들의 후손들이 모임을 갖는다, 그러니까 니가 가서 정신적으로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그 편지를 받고 제가 갔었지요. 주산에 있는 동학혁명모의 탑, 그것을 그때 그 모임에서 발기를 해 세웠었지요. 탑 세우기 전에 현장에도 한두 번 갔었지요.
이처럼 손여옥의 아들, 즉 손주갑의 부친은 만에 하나 자손들에게 화가 미칠까 염려되어 할아버지가 농민군대장을 한 사실을 철저히 숨겼다. 갑오년 이후 1894년의 대사건이 얼마나 부정적으로 평가되었는지, 그 후손들이 얼마나 박해를 받고 그로 인해 어느 정도의 피해의식에 젖어 있었는지 가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이는 손여옥의 증손인 손진국이 “조모님도 들어서 알았겠지만, 누구한테 발표를 못할 입장이지 않았어요? 그 때는 다 묻어둘라고 했지. 원래 저희가 증조부 때 정읍에 살았답니다. 그랬는데 증조부님께서 동학 난에 가입을 해가지고 그때 삼족을 멸한다 뭐허니 하는 통에 저희 증조모님이 조부님을 세 살 적인가 일곱 살 때 모시고 강천골 강천사 절로 들어와서 계속 절에서 지내왔대요”라고 한데서도, 농민군 직계 후손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그래서 단지 과거로 묻어두고 싶은 심정을 짐작할 수 있다. 다행히 1967년도에 사발통문이 발견되고 거기에 서명한 후손들을 찾는 과정에서 손여옥이 주목되었고, 이를 계기로 집안에서도 할아버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후손들의 증언에 따르면, 손여옥은 살림은 넉넉한 편이 아니었고 신체가 장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는 손화중과 전봉준과는 인척관계였는데, 이에 대해 손주갑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저희가 어렸을 때 작은집이 있었거든요. 그분들이 두부를 만들어서 파셨다구요. 그래서 두부집이라고 그랬는데, 거기가 아버님 외가로 해서 작은집이 돼거든요. 할머니께서 천안 전씨시고. 그래서 전봉준 장군하고 처남 남매지간 그런 관계인 거 같아요. 그분들도 제가 나이가 어렸을 때 뵙고 어디 가 계신지도 모르고. 최현식 선생님이 쓰신 것을 보며는 저희 조부님이 저희 선대부님 화자 중자의 족질로 나타나드라구요. 그래서 저는 거기에 대해서 의문을 가졌었거든요. 물론 일가로 해서는 조카뻘 되지만은, 친족질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지난번에 손홍렬 조합장[손화중 손자]님을 뵈었더니 말씀해주시더만요. 그런데 저희 할아버지가 그 집안으로 양자를 가셨드라구요. 그렇게 해서 집안으로 해서는 먼 촌순데 양자를 가다보니까 족질로 된다고 그러시드라구요.
이것으로 보아 손여옥은 천안 전씨인 전봉준 집안의 사위가 되는 셈인데, 족보에도 손여옥의 둘째부인으로 1861년생인 천안 전씨(일설에 전봉준의 재종매)가 나타나 있다. 그리고 손여옥 집안에서 손화중 집안으로 양자를 갈 정도로, 두 집안은 가까운 혈연관계(손여옥이 손화중의 족질)였다. 특히 손여옥은 손화중을 매우 각별히 모셨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저희 어렸을 때 아버님이 두 분 사진을 항상 모셨었거든요. 한 분은 화자 중자 저희 대부님 그 양반 사진이고, 또 한 분은 우리 아버님의 큰스님이라고 그럴까요. 그분 사진을 항상 벽에다 모셨었고 명절 때 되면은 거기다가 음식을 차렸고. 그러다가 그 사진 중에 손화중 장군 사진은 인제 후손들한테 돌려주신다고 그 집안으로 보낸 것까지 제가 알아요. 그러니까 더러 보면은 갓쓰고 눈썹 시커멓게 올라가고 한 손화중 장군 사진, 영정만 남은 것 밑에 보면 갑오동학혁명의 총영솔장이라고 돼 있어요. 그 사진을 그때 저희가 보내 드렸는데, 손홍렬 부회장님이 전에 사진을 찾아서 보내달라고 해서 천도교 쪽에 알아봤더니 없다고 그러드라구요. 그 사진이 어렸을 때 있었구”라는 손주갑의 증언에서 알 수 있다. 이러한 친·인척관계는 손여옥이 주도적으로 혁명에 참여하여 지도자로 활약할 수 있었던 주요한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손여옥의 농민군 활동상은 손주갑의 증언을 통해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원래 할아버지 고향은 정읍 삼산리라고 있어요. 지금은 정주시 삼산동이지요. 바로 손화중 저희 대부님하고 인접하구요. 거기는 음성린가 그런데. 저희 어머님 말씀에 의하면 동학혁명 당시에 아버님이 일곱 살이셨다고 그러드라구요. 그런데 기억에 할아버지께서 앞에서 큰 말을 타시고, 양쪽으로 쭉 허니 뭡니까 포졸들[호위병]이라고 헐까, 이렇게 쪽 서면 뒤에서 쪼그마한 가마를 타고 가신 기억이 있다고 그러시드라구요. 그러니까 그때는 혁명이 한참 기세를 날렸을 때 같아요. 다섯 골 대장을 하셨다고 그러는데, 정읍으로 해서 저희 조부님하고 차치구하고 같이 나온 것도 있고, 또 무장 접주로 해서 나온 책도 있고, 고창으로 해서 나온 책도 있고 그러드라구요. 그런데 그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요즘에도 풍수지리설이라고 그래서 명당자리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당시에는 세도가들이 자기 선산이 아니드래도 묘자리가 좋은 데가 있으면, 거기다 묘를 쓰고 그랬던 모양이예요. 그런데 저희 집안 선산에다가 묘를 쓴 세도가가 있었던 모양이예요. 그것을 할아버지가 가셔서 묘를 파냈다고 하시드라구요.
손진국은 또 이렇게 전한다.
지금 생각해보니까 저희 집에 대충 기름 절은 종이에다가 이렇게 둘둘 말아진 것이 있었어요. 그것이 당시의 자료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저희가 어렸을 때 요 지방사람들도 더러 그러대요, 증조부님이 동학 대장이었다고 그런 말만 들었지, 자세히는 못 들었어요. 그때 어디 정읍이라든가 삼군을 지휘했다는 말씀도 있고 하는데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이같은 증언은 손여옥이 농민군 대장을 하였고 관할지역도 정읍을 중심으로 다섯 고을 또는 세 개군에 걸쳐 있었을 정도로 넓었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불행히도 이를 입증할 사료는 현재 부분적인 것 외에 없는 실정이나, 여러 정황으로 보아 정읍 고을의 농민군 대장을 한 것만은 사실이다. 특히 흥미 있는 증언은 세도가가 손여옥의 선산 명당 자리에 강제로 쓴 무덤을 파냈다는 대목인데, 실제 농민군의 주요한 활동의 하나는 세도가들이 빼앗은 산을 환수하거나 무덤을 파내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산은 부호층들이 거의 독점하여 일반 농민들의 경우 무덤을 쓸 자리가 없는 실정이었고, 설령 있어도 명당자리이면 힘 있는 자들에게 빼앗기기 일쑤였다. 때문에 이에 대한 농민들의 불만은 극에 달해 있었다. 이리하여 농민전쟁이 발발하자 이 문제를 바로잡으려는 농민군의 투쟁은 곳곳에서 벌어졌고, 손여옥도 마찬가지였다. 이같은 혁명적인 활동을 하던 손여옥 대장이었지만, 농민군이 대거 쓰러지면서 혁명의 불꽃이 서서히 꺼져가던 12월에 들어와 피신하지 않을 수 없었고, 급기야는 체포 처형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현재 이를 말해주는 자료는 없으며, 다만 후손들의 증언을 통해 확인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대해서 손주갑은 “할아버지는 묘가 없지요. 제사도 언젠지 모르고, 대충 제사를 모시고 그러지요. 지금 모의탑에 보면은 나주에서 처형된 걸로 돼 있거든요. 그런데 전해내려오는 걸로 봐서는 동학혁명이 실패할 무렵에 어디 굴에 가 숨어 계셨다고 그러드라구요. 그래서 할머니가 밥을 지어서 날라다 드리고 그랬었다 하는 그런 말이 있구요. 아버님도 그때는 연세가 어리고 그러니까 잘 모르시지요. 어디선가 추울 때 돌아가셨다고만 알지요” 하였고, 손진국 역시 “동학에 거시기 해서 말을 타고 지내시고 그러다가 어느 때 피신을 해 어느 산에다 굴을 파고 계셨었는디, 지방 사람들이 관에다 밀고를 해서 잽혀가서 돌아가셨다는 말만 알고 있네요. 시신 수습을 못했지요. 묘도 없어요”라고 비슷한 말을 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손여옥은 산굴로 피신한 뒤 숨어지내다 그 지역 사람들의 밀고로 체포, 처형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 시기는 추운 겨울이었던 것 같다 최현식의 『갑오동학혁명사』(235쪽)에는 12월 25일 손익중(손화중의 동생)과 함께 정읍에서 처형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손여옥이 처형되자 그의 식솔들은 그의 시신을 수습도 못한 채 순창 강천사로 피신하기에 이르렀다.
혁명이 실패로 끝나니까, 저희 할머니께서 아버지를 모시고 전라남도 백양사로 피난 가신 거예요. 그때야 외가까지 다 씨를 말릴라고 그럴 때였기 때문에, 거기에 계신 거예요. 거기서 나을 수도 없고 해서 불제자가 되셨어요. 그래가지고 아버님이 백양사, 고창 선운사, 부안 내소사, 정읍 내장사에도 계시다가, 순창에 가면은 강천사라는 사찰이 있습니다. 강천사가 순창에서는 제일 이름 있는 절이거든요. 그걸 저희 아버님께서 다시 창건하시다시피 하셔 가지고 육이오 전까지 주지승으로 계셨지요. 저[손주갑]도 거기서 태어났고요.
뜻하지 않은 불제자의 집안이 된 것이다. 이같은 경우는 손여옥의 후손 외에도 많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사찰은 농민군의 주요한 활동 근거지로 활용된 곳(한 예로 백양사)이 많았었고, 스님들도 농민군으로 많이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손여옥의 부인이 자식을 이끌고 사찰로 피신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리하여 그의 후손들은 안전한 피난처에서 여유 있는 짧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같은 안식처도 우리 현대사의 비극인 한국전쟁의 참화를 비켜가지는 못하였다. 강천사가 불타버린 것이다. 또 다시 손여옥의 아들과 손자들은 피난 길에 올라 하산하게 되었는데, 다행히 손화중 후손들의 도움으로 집안 산지기나마 할 수 있게 되었다. 각별했던 손여옥과 손화중의 관계가 후손들에까지 이어진 것이다.
강천사가 불타 민가로 내려왔어도 오갈 데가 없는 거예요. 거기 계실 때는 남부럽지 않게 살았고 먹고사는 데는 이상이 없었지요. 지금 저희 선산이 정읍에 있지요. 그래서 아버님이 시제 모시러 다니고 그럴 때, 유족회 손홍렬 부회장님 선친이 손응수 씬데, 저희들 어렸을 때는 매초리 한아씨라고 그랬다구요. 저희 조부님하고 손화중 대부님하고 같은 집안이면서도 거사를 같이 하셨기 때문에, 친형제간 이상으로 지내셨던 모양이드라구요. 그랬는데 육이오를 겪으면서 생활이 어렵게 되니까, 저희가 산지기를 가는 것을 별로 달갑게 생각하지 않던 저희 집안 파가 있었음에도 매초리 한아씨라는 분이 중추적인 역할을 하셔 가지고 저희가 정읍에 있는 집안 산지기를 제가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했어요.
손주갑은 손화중 집안과의 끈끈한 정을 회상하며 고마움을 표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집안 산지기 노릇이 오죽 했겠는가. 고생스런 나날이었다. 손진국도 이렇게 말한다.
저희는 골짜기에 살아놔서 피해는 말할 것도 없지요. 그때 무렵[6·25]에 그냥 빈몸으로 나와가지고 고생이야 말할 것도 없지요. 입으로는 말을 못해요. 그때 이만저만 했다고 하면 인정도 안해주고. 지금 사람들은 오죽 그렇게 살았으랴, 거짓말이라고 할 겁니다. 육이오 후에 쫓겨나와가지고 먹을 것도 없어서 별스럽게 고생을 다 했어요.
참으로 고난에 찬 손여옥 후손들의 삶이었다. 생각지도 않던 불제자에서 집안 산지기에 이르는 삶의 역경, 선친의 무덤과 기일도 모른 채 지내는 제사, 순사가 멀리서 보이기만 해도 산 속으로 숨었을 정도의 피해의식과 불안감(손주갑 증언), 농민군의 후손들이 치러야 할 대가치고는 너무나 큰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후손들이 바라는 것은 오직 억울하게 죽어간 선조들의 명예회복뿐이었다. 이는 “조부님도 억울하게 돌아가셨잖아요. 그만한 대책을 세워서 위로해드리고 딴 사람과 같이 해 드렸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만한 명예라도 있게끔 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손여옥의 증손자 손진국의 소박한 말에서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