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연락처
기념재단
TEL. 063-530-9400
박물관
TEL. 063-530-9405
기념관
TEL. 063-530-9451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사료 아카이브 로고

SITEMAP 전체메뉴

증언록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고부봉기의 주역 정일서, 증손 영환
대상인물

정일서(鄭一瑞)

1850~ ?. 동래 정씨, 족보상에는 귀혁. 원래 부르던 이름은 일서, 그리고 호적상에는 으뜸 원자 ‘원서’로 되어 있음. 고부의 농민군 접주로 전창혁과도 같이 활동하고, 고부봉기 단계까지 주요 인물이었음. 합천 용주면 노리실에 피신하여 1927년 사망.

증언인물

정영한




1957~ . 김제시 거주. 자영업.



가계도
가계도 이미지
정리자

우윤

출전

다시피는 녹두꽃

내 용

“옛날은 ‘고부’라고 불렀는데 지금 고부군 정우면 수금리예요. 이 마을에 동래 정씨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정일서가 살던 곳이 고부 수금리라는 증손 정영환의 증언은 계속 집안 이야기로 이어진다. “증조부님에 가까운 바로 윗대는 벼슬한 사람이 없어요. 제가 듣기로는 더 윗대에 가서 육대조에 정승하신 분이 있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잘 모르고 저의 증조부님이 육대 독자, 저의 할아버지가 칠대 독자이고.” 시골 양반 정도는 되었다는 말이지만 재산은 꽤 있었단다.

그때 재산이 상당히 많은 것으로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증조부님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재산이 있었는데, 증조할머니가 전주 이씨 만석꾼 집안의 팔남매 중 외동딸이었고, 게다가 막내딸이어서 당시 시집 오면서 천 석을 가지고 오셨어요. 증조부 장인어른 되시는 분이 증조부님이 굉장히 탐이 나셔서 거기다 굉장히 큰 기와집을 지으셨어요.

비록 처갓집 덕이지만 정일서의 재산은 천 석을 수확하기에 이르렀는데, 다음 이야기를 들어보자.

증조부님이 그때 당시 열다섯 살인가 열두 살 되던 때부터 영특해서 그 당시 고부 군수집에서 군수 아들과 동문수학을 했어요. 고부 군수가 증조부님하고 자기 아들과 하도 친하게 지내고, 하도 영특하니까 자기 집에다 지금의 과외선생같이 선생을 초빙해서 같이 공부시켜도 고부 군수 아들이 증조부님을 못 따라가고 항상 뒤쳐져 있었다고 하더라구요.

정일서가 수재였다는 말이고, 이로 말미암아 부인까지 얻게 되는 행운까지 쥐게 되었다 한다. 소설 같은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으로 이어진다.

우리 증조부님 장인되시는 분이 사위를 얻으려고 전국 각지의 서당을 찾아다니셨답니다. 문필도구를 짊어지고 봉남면에 가니까 정읍 고부 원님 아들과 동문수학하는 일서라는 청년이 있는데 상당히 뛰어나고 대장감이라고, 그 얘기를 듣고 먹이고 벼루고 팔러 다니는 장사처럼 가장해가지고 거기를 찾아갔어요. 찾아가서 일서를 딱 보니까 삼국대장감이더라는 거예요. 저녁에 같이 잠을 자게 되었는데, 새벽녘에 증조부님이 열다섯 살 때었는데, 장인어른이 사타구니에 손을 넣어 낭심을 만져봤대요. 그러자 당시 열다섯 살 먹었다는 것이 장인어른 될 사람의 낭심을 같이 붙잡고 당신 것도 보여줘야 이것을 놓습니다. 왜 남의 것을 붙잡고 그러냐 그랬다나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자기 것을 보여주고 나서야 서로 헤어졌대요. 그래 대담한 소년이라고 사위를 삼았습니다. 그때 고조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 가지고 증조부님하고 두 분이서 살고 계셨더만요. 따님이 한 분, 그러니까 증고모 한 분이 계셨는데 일찍 출가하였고. 그래서 전주 이씨 집으로 장가가는 계기가 되었어요.

이런 인연들이 묘하게 고부봉기와 농민전쟁에까지 얽혀 들어가게 되는데….

증조부님은 나중 동학혁명이 일어날 당시에도 원님의 아들 덕을 많이 봤다고 그래요. 왜냐하면 당시 잡아들이라고 명령이 있었는데 자기하고 동문수학하던 옛정도 있고 해서 원님집 부엌에도 숨겨 주기도 했다는 거요. 그리고 저번에 역사문제연구소장 이이화씨가 쓴 책에도 있지만, 조병갑의 수탈에 처음에는 동학혁명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먼저 진정서를 냈어요. 당시 전창혁, 김도삼, 정일서 세 분이 그러셨잖아요. 거기에서 전창혁씨는 감옥에서 맞고 고문을 당해서 감옥에서 나오셔서 그 후유증으로 돌아가시고, 거기에 대한 동학의 대물림을 해가지고 증조부님하고 김도삼 씨하고 전봉준 씨하고 세 분이서 의논해서 동학봉기를 일으키자고 해서 일으켰다고 하거든요.

15세에 동문수학하던 원의 아들이 30년이 지나서도 고부에 남아서 정일서를 숨겨주었다는 대목은 재고해보아야 할 것이다. 고부에 집을 둔 수령이 있었을까.

그런데 그때 전해오는 집안 이야기를 보면 전봉준 장군 성격이 우직하고 뚝심이 강했다는 거요. 증조부님은 가슴에 털나고 수염이 대자었는데 선보름에는 앞가슴의 털이 서고 후보름에는 내려갔다는거요. 또 천기를 기가 막히게 보았대요. 전주 다가공원에서 패했을 때도 진군하지 말자고 전봉준 장군에게 말을 했었고 거의 모든 작전을 내리셨다고 하더라고요.

약간은 신비적으로 각색한 듯하지만 정일서에게는 그렇게 특이한 면이 있었던 모양이다.

전봉준 아버지 전창혁 씨하고 잡혀서 전주감옥에서 갇혀 계시다가 많이 맞고 일단 풀려났어요. 제 친구가 총무처 조직교육과 있는데 저번에 전화를 해서 동학자료가 많이 있냐고 하니 이번에 일본에서도 많이 모아오고 해서 있고 동학 가족들에게 연락하고 있다고 하드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 친구한테 증조부님 함자랑 적어서 연락을 했어요. 정읍의 문화원장이신 최현식씨는 증조부님이 민보군 때도, 1898년[고부 정읍에서 일어난 영학당사건] 때도 참여했는가 하는 것이 의심스럽다고 그러더라고요. 민보군 때도 제가 알기로는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며칠 전 족보를 보니까 증조부님이 돌아가셨을 때 묘를 썼던 주소가 나오는데, 지금의 경남 합천군 용주면 노리실이라는 곳이요. 우리 장형도 다녀왔고 아버님도 다녀오셨어요. 거기서 숨어 살면서 할머니 한 분을 얻으셨고. 둘째 할머니시죠. 증조부님은 거기서 이화선씨로 개명해서 사셨고 따님 한 분을 두셨다요. 저의 고모할머니 되지요. 고모할머니가 그 마을 윤경선 씨라고 하는 분한테 시집을 갔어요. 그래 행정전화를 해서 용주면에다 전화했더니 이장을 알려주더라구요. 이장 이름이 윤숙현이더라구요. 고모할아버지가 윤경선인데 뭔가 친분이 있을 것 같아 그 집으로 전화해서 그 마을에서 가장 오래 사신 분이 누구냐 했더니 자기 아버님이시라고, 청력이 좋다고 하시기에 바꿔달라고 해서 혹시 윤경선이란 분을 아냐고 하니 안다고 하고, 그 장인되시는 분을 아냐고 하니 그렇다고 하고, 그 장인되는 양반이 이화선이란 분이 맞냐고 하니 살 당시 이화선으로 알고 살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정일서 장군이라는 얘기가 들리더라 하더군요.

정일서는 합천으로 피신해 가 이화선으로 개명하여 숨어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고부봉기 때까지 주요 인물인 정일서가 고부봉기 이후 사료 등에 거의 나타나지 않아 항상 의문을 가졌는데, 증언을 통해 미루어보면 아마 고부봉기 직후에 합천으로 피신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쪽으로 피난 와서 살 당시에는 증조부님이 구척장신이었대요. 풍채가 좋고 영특한 노인이었고 힘이 장사여서 나이가 칠십일 때도 쌀가마니를 들어서 던졌다는 거요. 만가실[추수가 한창일 때] 때 벼타작을 하는데 아침에 할아버지가 일어나셔가지고 오늘은 추수를 하지 말아라 하니까 노인이 노망 들었다고 했대요. 옛날에는 라디오도 없을 때니까. 그런데 점심 후 두시경 일을 하고 나락을 한참 훑었는데 소낙비가 쏟아져서 벼를 떠날리고. 그래서 그 마을 사람들이 참 훌륭한 노인이라고 무릎을 꿇었다는 거예요. 죄송하게 되었다고 처음에는 노망 들어서 그런 줄 알았다고 하더래요. 또 하나 무슨 일화가 있었냐 하면 일꾼이 논에서 일을 하는데 동네사람들이 울면서 도망왔다는 거요. 송아지하고 소하고 데려가서 논일하고 있는데 호랑이가 내려와서 송아지를 잡아먹으려 하니까 소는 소대로 자기 새끼 보호할려고 하고 주인은 작대기 들고 소하고 호랑이하고 같이 싸우는데 사람들은 무서워서 못 가고. 그래 할아버지가 걸어가서 큰 돌을 주어가지고 바위에다 세게 치니까 천둥치는 소리같이 큰 소리가 나서 호랑이가 겁이 나서 도망갔다요. 그때부터 그 동네에서 신처럼 생활을 했다고 하더라고. 그럼 사시던 그 집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까 하니까 그 집은 다 부셔져서 지금 다른 사람이 땅을 사들여서 집을 지었다고 해요. 그래서 월요일날 다녀오기로 했어요.

합천에서의 일화는 정일서에 대한 전혀 새로운 이야기이다.

제가 얘기 듣기로는 동짓달에 증조부님, 손화중, 전봉준 장군 세 분이서 고부에서 동학이 패해서 마지막으로 있으면서 피난갈 곳을 의논했는데 증조부님이 경상도 쪽으로 피난을 가야겠다니까 손화중 씨하고 전봉준씨는 일단 여기에서 숨어있으면서 서울 쪽으로 도망간다고 하셨어요. 그날 도망가려고 문 밖으로 나오는데 한겨울인데 구렁이가 길을 막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증조부님하고, 손화중씨는 구렁이를 피해서 이쪽으로 갑시다해서 그 자리에서 헤어졌다는 거예요. 손화중 씨하고 전봉준씨는 순창 피로리 쪽으로 가고, 증조부님은 용신리를 거쳐 대전 문경새재 넘어서 경상남도 하동을 거쳐 합천 용주면 노리실로 피난을 가셨는데, 그때 당시 그 구렁이를 노망한 구렁이라고 하면서 전봉준 장군이 목을 베었다는 거예요.

마치 민담과 같은 대목들이다. 농민전쟁에서 패하여 몸을 피할 때 손화중과 전봉준은 만나지도 않았고, 따라서 서로 상의하지도 같은 방향으로 가지도 않았다. 어쩌면 고부봉기 직후(1894년 3월 초)전봉준과 정일서가 처한 상황이 아닐까 한다. 고부봉기는 1894년 1월 10일 밤 고부 말목장터에서 군민들이 일어나 손에 낫과 쟁기, 죽창을 쥐고 밤공기를 뚫고 달려 고부 관아를 점령한 사건이다. 관아를 점령한 이들은 먼저 옥사를 헐어 억울하게 갇힌 사람들을 풀어주었고, 무기고를 부수어 무기를 나누어 가졌으며, 곡식창고를 열어 빈민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었다. 이때 전봉준과 최경선, 정일서 등이 중심이 되었는데, 이들은 말목장터로 사람을 보내어 고부 농민들에게 원성의 표적이 된 만석보 아래의 새로운 보를 허물게 하고, 예동(禮洞)과 두전(斗田)에 쌓아놓은 보세미(洑稅米)를 농민들에게 돌려주도록 하였다. 또 한편으로 백산으로 농민군을 보내어 백산성을 쌓도록 하였다. 그런데 2월 말쯤 신임군수 박원명이 고부에 부임하여 봉기에 참가한 농민들을 초대하고 크게 잔치를 베풀었다. 그리고 농민들의 뜻을 들어준다고 약속하였다. 이는 전봉준 등 최고 지도자급과 봉기에 참가한 향촌의 유지들 사이에 갈등을 야기시켜 결국 3월 초 농민들은 해산하기로 하였다. 향촌에서 어느 정도 재력이 있는 동장·집강 등이 참여했다는 점에서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 전봉준과 그의 직속 간부들은 고부를 표연히 떠나 무장으로 달려갔다. 손화중을 만나 그의 협조를 구하려는 목적에서였다.

1894년도 동짓달에 피난가신 거죠. 그러니까 1898년 민보군에 정규군으로 참전 안하셨죠. 참여하셨더라도 하동에서 하셨을지 모르죠. 하동이 증조부님 처갓집이에요. 동학책에 보니까 그때 당시 농민봉기가 일어났더군요.

그러니까 1894년 동짓달에 피신했다는 증언도 재고할 부분이 되는 셈이다. 정일서가 노환으로 죽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그렇죠 증조부님이 경상남도 용주면 노리실에서 돌아가신지 몰랐지. 어떻게 찾았냐면 거기서 얻으신 증조할머니한테 유언을 하신 거예요. 나는 동학혁명을 일으킨 정일서이다. 내 후손들은 봉남면 양전리에 숨어 있다. 가승[집안의 제사, 식구들 생일 일절]과 시신을 그쪽으로 해달라 하셨대요. 증조할머니가 가승만 가지고 그쪽으로 찾아오셨대요. 일년 후에 저의 고모할머니 집에서 서둘러서 증조할아버지 시신을 경상남도 용주면 노리실에서 이리로 모셔와서 고모할머니 땅에 안장했어요. 육탈이 덜되어서 오셨다고 하대요.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할아버지의 풍채를 다 보았다고 해요.

그런데 최근에는 합천 쪽 하고는 거의 왕래를 않고 지낸단다. 가정의 시시콜콜한 문제로 감정의 골이 생겼다 한다.

증조부님이 외동딸을 두셨기 때문에 쉽게 말해서 데릴사위를 윤경선씨가 온 거예요. 증조부님이 거기로 피난 갔을 때 돈을 약간 가져가서 거기서 생활을 했던 모양이예요. 그래가지고 남은 재산을 증조부님은 여기에 자손들이 있으니까 자손들한테 물려주려고 했는데 그 윤경선 씨가 욕심을 내고 안 준 거예요. 우리 장형이 지금 일흔 살인데 우리 아버지랑 재산문제 때문에 거기에 갔었는데 포기하고 돌아오셨다는 거예요. 그 길로 소식이 끊겼었는데 윤경선 씨 고모할아버지가 이번에 알아보니까 자손이 없어서 양자를 한 명 두었는데 그 양자가 또 자식을 못 나서 대가 끊겼다는 거요. 근데 그 양자 온 사람은 쉰 살에 부산에서 죽었다는 거요. 그러니까 증조할아버지 둘째 할머니 자손들 중 피붙이는 아무도 안 살아있죠. 저희 집이 원래 손이 엄청나게 귀해요. 그런데 가장 이상한 게 저의 고조할머니 산소가 동곡면 지금실에 있는데, 역사문제연구소의 이이화씨가 『한겨레신문』에 해놓은 것을 보니까 전창혁씨가 동곡리에서도 좀 계셨더라고 하더군요. 김개남씨의 고향이 동곡리예요. 우리 선산이 거기 있어요. 우리 친할아버지가 성함이 덕자 현자, 덕현씨인데, 봉남면 용신리에 숨어사셨어요. 거기서 숨어 살면서 우리 큰어머니를 맞이하셨어요. 할아버지 며느리지요. 인동 장씨 집에 숨어살았는데 큰어머니가 심부름하면서 하도 착하니까 자기 며느리로 삼았어요.

피난가서도 가연을 맺을 줄이야. 다음은 정일서 후손들이 어떻게 부대끼며 살았는지 하는 이야기인데, 여느 후손들이 경험한 가시밭길이 여기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금은 김제시 양전동이지만, 여기 봉남면 양전리에 우리 식구들이 정착해서 살 때는 어떻게 살았냐면, 옛날에 문둥병 걸린 사람들이 모여가지고 남의 것을 얻어먹고 그랬거든요, 그런 초랭이패로 숨어사신 거예요. 그러니까 생활이 무지무지 어려웠죠. 증조할머니가 신을 받아서 상계점(?)을 무지 잘 봤다고 그러더라구요. 그런데 들어보니까 상계점은 공부를 무지 많이 한 사람들한테 오는 거라는 거예요. 상계점이라는 것은 돌아가신 분의 생년월일, 죽은 날짜, 묘지를 내면 귀신이 와서 대화를 하는 거예요. 그것으로 생활을 많이 하셨어요. 고모할머니 한 분이 그 동네 제일 부잣집으로 시집을 가셨어요. 초랭이패면 상놈들 아니예요? 그런데 증조할머니도 잘 생겼고 고모할머니도 아주 잘 생겼었대요. 동네에서 눈치를 챈 거예요. 동네사람들이 이 사람들이 절대 초랭이패가 아니다, 무슨 사연 때문에 숨어사는 것이라고 했대요. 동학군이라고 하면 삼족을 멸하니까 말도 못하고. 그래서 거기서 덕을 좀 봤다하더라구요. 제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도 집에서 학비를 거의 못 댔어요. 우리 큰할아버지하고 둘째 큰아버지는 그래도 혜택을 받았어요. 우리 아버지가 막내시거든요. 사년 전에 작고하셨는데 아버지만 서당에서 좀 공부만 하셨지 혜택을 못 받았어요. 그래서 삼형제들 중에서도 우리집이 가장 어렵게 살고, 그래서 집안이 풍비박산이 되었죠. 지금에야 제가 김제에서 체육관하고 이리에다 레스토랑도 하면서, 조금씩 조부모님 역사에 대해 밝히려고 뛰어다니는 거죠. 이런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집안형편 때문에 엄두도 못 냈고 지금에야 할아버지는 봉남면 용신리에 계셨고 증조할머니하고 큰아버지랑은 봉남면 양전리, 지금 살고 있는 곳인데, 현 김제시 양전동 179번지요.

증손 정영환은 농민전쟁 백주년을 맞이하여 농민군 지도자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연구가 잇따르자 나름대로 서운한 게 하나 있다.

그런데 손화중씨나 김개남씨나 그분들이 당시 피난을 했던 것은 사실이요. 자수를 할 사람이 아니요. 그런데 지금 와서 역사에 부각된 것은 잡혀 죽은 사람들만 부각된 거요. 연구도 잡혀서 죽은 사람들만 하고. 증조부님 같은 경우 제가 알기로는 전봉준 씨하고, 김도삼 씨하고 세 분이, 원래 전창혁 씨까지 네 분이지만, 이분들을 중심으로 한 봉기가 시작되어서 농민전쟁까지 이루어진 것인데, 증조부님만 숨어사시다 돌아가셔서… [소외된 것 같다] 제가 이야기 듣기로는 시종일관 전봉준 씨하고 김도삼 씨하고 증조부님하고 활동을 같이하고 마지막에 동학이 패했을 때 최종적으로 남은 분은 손화중, 전봉준 장군, 증조부님하고 세 분이 남으셨다고 하더군요. 마지막으로 패해가지고 어디로 도망갈 것인가 연구했을 때도 세 분이 남으셨고 모든 작전이라든가 다른 곳에 숨어있을 때도 김도삼, 전봉준하고 증조부님하고 세 분이서 있었답니다.

농민전쟁 100주년을 계기로 정일서에 대한 정확한 행적을 밝히는 것이 급선무이고, 그리고나서 그에 대한 평가도 늦지 않을 것이다.

이 페이지에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도를 평가해 주세요. 여러분의 의견을 반영하는 재단이 되겠습니다.

56149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742 TEL. 063-530-9400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문화체육관광부 전라북도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