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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록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정읍 농민 대접주 차치구, 손자 용남
대상인물

차치구(車致九)

185l~1894. 본관은 연안. 본명은 중필(重弼), 치구는 자.
차치구는 정읍의 접주로 1, 2차 봉기에 모두 가담했으며 정읍에서 주로 활동했음. 특히 그의 활동에 대해 “지금 도둑의 형세는 날이 갈수록 뻗어가고 심지어 수령을 죽이기도 하며 군·현을 함락하고 성지(城地)를 점거하기도 한다. 하물며 동학의 도둑 차치구는 관아에 들어가 행패를 부리고 삼강오륜을 깡그리 저버리고 있으니 일이 매우 절박하다”(「거의록」)고 기록하고 있음. 그는 농민전쟁이 끝난 뒤 흥덕 현감 윤석진에게 잡혀 처형당했음.

증언인물

차용남(車龍男)




1922~ . 차치구의 장손으로 한학자로 이름이 높으며 지금도 보천교(普天敎)의 일을 맡고 있고 주역 강의를 하기도 함.



가계도
가계도 이미지
정리자

이이화

출전

다시피는 녹두꽃

내 용

차치구는 정읍 입암면 마석리에서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릴 적 이름은 중필이었으나 나중에 행중으로 고쳤다. 신분도 평민이어서 서당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고 장가도 늦게 들어 29세에 아들 경석을 낳았다. 그는 20세 안팎에 이웃 마을 대흥리로 옮겨가 살았는데 이웃 마을 지선동에 임감역(벼슬이름)이라는 부자가 살았다. 임감역이 전라도 남쪽지방에 많은 땅을 가지고 소작을 주었는데 그곳 양반들이 소작료를 내지 않았다. 임감역은 청년 차치구에게 소작료를 받아 마음대로 쓰라고 했고, 차치구는 그곳 소작인을 모아놓고 힘센 두어 사람을 잡아 꺾고는 “양반인 주제에 도조를 안내는 도둑놈 짓을 하느냐”고 호통을 쳐서 소작료를 몽땅 받아내어 일부는 도로 돌려주고 나머지는 빈민에게 나누어주었다 한다. 그의 기개에 대해 “할아버지께서는 체격이 참 크셨어요. 기운이 장사셨고, 눈매가 무서우셨던가 봐요. 화[和]해서 좋게 지내실 때는 아이들도 모두 좋아하고 동네서도 모두 좋아하고 그랬지만은 화를 내실 때는 무서우셨대. 미친 개라고 옛날에는 광견이 종종 있었거든. 사람을 물거나 짐승을 물거나 하면 따라서 미치고 그래. 큰 위험한 미친 개가 길에서 올 때, 노목[努目]으로 화를 내서 쳐다보면 미친 개가 그 자리에서 뒹굴어버렸대요. 그렇게 눈이 무서웠던 모양이예요.”라고 말한다. 어느 때인지, 전봉준이 대흥리로 찾아와 함께 거사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처음에 차치구는 “우리 고을의 수령을 내쫓는 일은 할 수 있으나 다른 곳에 가서 거사하면 역적이 된다”고 거절했다 한다. 이에 전봉준이 나라를 위해 거사하자고 끈질기게 권유하자 전봉준을 따라 고부봉기에도 참여했고 이어 전주 입성에도 앞장섰다. 그러나 자신이 조사한 바로는 동학에 입도한 적은 없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 때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이웃 고을 흥덕의 접주인 고영숙이 생포를 당했을 적에 가서 구해내 왔다고 한다. 이런 일로 그와 흥덕 군수 윤석진과 기묘한 인연을 맺게 된다. 아무튼 그는 전봉준과 끝까지 행동을 같이했다고 이렇게 말한다.

우리집에 같이 오셨다가 며칠 유하시고, 자세한 건 모르겠고, 앞에 보이는 입암산, 행정구역으로 입암면이고, 옛날에는 산성이 있었지[지금도 산성이 일부 남아 있음]. 나라에서 전란이 나면 왕이 피난하고 했던 입암산성으로 들어가서 거기서 순창으로 함께 들어가셨어. 그러니까 여기 오셔가지고 순창으로 같이 들어가실 때 아버지를 데리고 할아버지가 가셨거든. 아버지께서 열다섯 되시던 해에 순창까지 따라가셨다가 순창에서 전장군은 거기서 유하기로 하고 할아버지는 거기는 불가하다고 도로 나오셨지요.

이 말이 어느 정도 정확한지는 알 길이 없으나 차치구는 마석의 뒷산인 국사봉 토굴에서 숨어지냈다. 국사봉 아랫마을 광조골에 사는 친구 최제칠은 몰래 밥을 날라다주었다. 이 소문이 퍼지자 흥덕 관아에서는 최제칠을 잡아다 고문했으나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 마을 사람 어느 누가 고해바쳤다. 그리하여 관군이 굴을 포위하자, 담뱃대와 칼 한 자루를 가지고 당당히 걸어나왔다. 잡혀 있을 적의 사정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가서 호통을 치고 호령하자 흥덕 군수가 문을 열고 겁이 나서 방으로 들어갔어. 바로 나가서 이러이러한 형을 가하라고 시켰어. 지금도 형장이 있을 거요. 내가 왜정 때 거기를 가봤거든. 학교 있고, 지서 있는 그 맞은편 언덕 위에 있었는데, 그 한쪽에는 형장이었어, 거기서 화를 당하셨는데 참혹한 화를 당하셨지.

여기에서 ‘참혹’하다고 애써 표현을 바꾼 것은 분살형(焚殺刑)을 뜻한다. 자손으로서 차마 그 이야기를 바로 못하겠다고 한다. 그의 처형소식은 어린 아들에게 전해진다.

파수 군인들이 지키는 관계로 다른 사람이 들어갈 수 없지. 그적에 할아버지가 역적으로 몰렸었거든. 그러니까 아버지께서도 비밀리 달밤에, 달이 없을 때 날이 구름이 지고 비도 오고, 섣달 스무아흐레니까, 섣달 스무 아흐렛날 화를 당하셨으니까, 아흐레 그믐날이면 어두울 때거든. 달이 미처 뜨지를 못할 때야. 그때 비밀히 업드려서 줄을 들추고 들어가서, 욕을 많이 보셨지요. 시체를 분별하기가 어려우니까 그냥 죽은 시체면 알기가 쉬운데, 이런저런 말이 있습니다. 확실하게는 모르지만, 화형당하신 거 같아요. 할아버지는 건장하셨고 하니까. 아버지가 뒤에 업고 업드려서 기어 철망을 기어 나와서 삼십 리나 되는 선산으로 밤에 와서 비밀리 임시로 묘를 만들어 모셨어.

지금 족박산에 있는 소박한 무덤이 바로 그곳이다. 아직 이 묘에는 비석 하나 서 있지 않았는데 좋은 세상 만나 비를 세우겠다고 한다. 이 사실로 하여 그의 아들 차경석도 잡혀 윤석진에게 죽음을 당할 뻔 했으나 어느 인사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이때 차경석의 나이 열다섯 살이었다 한다. 차경석은 일제 식민지 통치 아래에서 신흥종교 보천교를 창건했다. 그리하여 세인의 입에 오르내렸고 일제의 탄압도 따랐다. 보천교에 대해 묻자, 용남은 신중하면서 긴장하는 듯했다. 그리고 용남의 달변과 조리있는 대답은 이러했다.

왜정 때, 자기[총독부]들이 발표한 것이 육백만입니다. 그때 우리나라 동포를 천 팔백만 인구라고 했지요. 교종이라고 교에서 종을 지은 것이 있어요. 종각이 있어서 삼시로 종을 치고 그랬는데, 그 종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컸어요. 그런데 경주 봉덕종이 크고, 서울 보신각에 종이 더 크다고 하지만은, 보천교 종은 우리나라 제일 큰 종인데, 저 산이 가리고 있는 순창 동곡면에서도 지붕 이올라고 집우 위에 올라가면 낮 오시에 치는 종소리가 들리고, 청명할 때는 이리에서도 들렸다고 그랬습니다. 지금 있으면 우리나라 국보가 될 것인데, 왜놈이 일일이 쪼개가지고. 그런데… 교인들이 숟가락, 밥그릇 하나씩 내가지고, 교인 하나 앞에 보통 수저 한 벌씩, 밥그릇 하나씩 내서 종을 지었거든. 그래서 쇠 수입한 것 보고서 왜놈들이 신도수를 발표했단 말이야.

일제의 탄압에 대해 특히 강조하고 있다.

왜놈 압박을 받아 나왔지. 아버지 돌아가실 때까지 이 방에 계셨으니까. 육백만 대중 교세가 그렇게 흥하여도, 이 집에서 거처하셨으니까. 뭐 하나 칠한 것도 없고, 사치 하나 한 것도 없고 지금도 아버지 입던 옷이 있지만은, 옛날에 여름에는 마포 모시옷, 겨울에는 그저 미명옷이라고 있었소. 가정에서 모두 짜서, 무명옷 입고 명주옷 그 이상은 안 입으셨고 그리고 왜놈 물건 일체 사용 안했었거든. 꼭 토산 장려만 했었고. 그래서 왜놈은 피하고, 아버지도 객지에서 칠년간 피해서 다녔었지만은. 보천교인은 방주[方主 : 포교 책임자] 밑에 육임[六任 : 포교 책임 직책, 방주 밑의 직책]만 잡으면 육년, 칠년이요, 방주를 잡으면 팔년, 십년이라, 신법률을 내가지고 그렇게 압박이 심했고. 그때는 시기가 그럴 때고 하니까. 또 아버지는 인물이 출중했던 모양이요. 교세가 흥한 이유는 인물과 시기의 두 가지 관계인 것 같은데. 왜놈들이 삭발을 장려가 아니라, 아주 강제 삭발을 시켰지. 시장에 가면 머리를 강제 삭발을 하고 했는데, 보천교는 아관청의[峨冠靑依]라고 갓을 쓰고 푸른 두루마기를 입어, 그래서 왜놈하고 싸움이 사사건건 나고.

또 민족독립운동에 대해서도 이렇게 털어놓고 있다.

그 중에 조만식이라고 하는 분이 비밀리에 국가를 위해서 임정에서 군비관계로 수금을 하고, 군자금을 보내고 그랬었거든. 조만식 씨라고 평양에 사는 분인데, 여기 위 교인 간부 집에서 잽혔어. 그분이 잽혀서 교인 간부들은 고문당하고, 그때 사건이 컸었어요. 그러다가 조만식씨가 나온 후에 벗어부치고 교에 수호사장[修護使長 : 외교를 책임지는 직책]으로 한 일 년간 있다가, 자기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다시 들어갔지. 그러다 두번째 나오다가 인천서 왜놈한테 잡히게 됐는데, 그 후에 또 징역살다 나와가지고 교에 피해가 가면 안될 것 같으니까,다시 평양으로 들어가서 천주교[사실은 기독교]로 종사하셨을 거야. 그때 모모한 분들이 많았어. 그러니까 고하 송진우라고 보천교에 비밀리 군자금 한 분이야. 또 민세라고 평택에 사는 안재홍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해방 후에 건국준비위원장을 하셨어요. 여운형이 하고 그분들도 다 보천교에서 비밀리에 군자금을 가져가고 했는데. 얼마 안 가면은 그분이 군자금 보천교에서 삼만 원인가 얼마 가져간 거 나올 것이요. 다른 사람 개인 사적에 나올테니. 경상남도 김해시에서 백치문이라고 하는 분하고 비밀리에 상해로 군자금 가져가다 고문 당해가지고 그런 분이 있고. 독립투사 비석을 김해에 세 개를 세웠다고. 목포에서도 그런 바가 있고. 많았어요.

그리고 보천교에서는 민립대학 창설운동에도 자금을 댔다고 근대사의 비화들을 털어놓았다. 마지막으로 보천교의 친일문제를 질문하자, 용남 옹은 이렇게 그 사정을 말했다.

사실은 내가 기자들에게 많이 당했소. 왜정 때도 『동아일보』, 『조선일보』에게 교에서 피해를 많이 받고. 저 교에서는 시국대동단결이라고 주창해. 일본 중의원 귀족원, 그때 상하 양원이 있었는데, 그 양원에 가가지고 일본이 현재 중국을 침범하려는 욕심을 가지고 있는데, 만약 중국을 침범해 들어가면 일본은 반드시 망한다, 일본뿐만 아니라 동양삼국이 다 망하니까 그러지 말고 우리나라를 좋게 내놓아가지고, 조선이나 일본이나 중국 삼국이 서세를 막아라 했어요. 이것이 시국황인종대동단결입니다, 아세아주 대동단결. 그래서 왜정 때 소위 서천태일랑이라고 하는 사람이 조선의 유사종교라는 책을 썼는데, 그 책에도 보천교에서 쓴 시국대동단결론이 나옵니다. 꼭 동포끼리 싸움 붙이고, 교에서도 간부들 매수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민족종교는 아주 적극 없애기로, 박멸하기로 적극 나오기 때문에. 그래서 왜놈이 제일 없애기로 그때 헌 것이, 보천교, 천도교 두 교가 유사종교 책에도 우리나라 지도를 그려 가지고, 보천교는 푸른 점, 천도교는 붉은 점으로 찍어가지고 여러 종교를 다 해놓고도 그렇게 해서 놨어. 하여튼 왜놈들 정책에 한두 가지가 아니라. 우리가 많이 당해 봤기 때문에 알아. 교인도 수십 명을 주요 간부들만 매수해가지고, 그참 교묘하게 서로 싸움 붙이고. 교에 역시 혁명이라, 개혁 혁신한다 운동해 가지고 경찰이 앞에 타고, 무술가들 수백 명 데리고 와서 싸움을 붙이고 또 교를 그 사람들이 각자 나가서 증산교다 뭐다 해서 각 교를 수십 개를 하도록 해서 교를 분열시키고, 그런게 굉장히 심했어요. 그런데 아버지 계실 때는 왜놈들이 그렇게 노력만 했지, 적극 대하지를 못하고 나왔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강제해산을 시켜 나왔는데….

그의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남에게 할아버지에 대해 말한 적이 거의 없어. 무엇보다 갑오년 당시의 움직임을 동학과 연결짓는 게 싫었기 때문이야. 물론 할아버지는 동학교도가 아니었어. 그 수많은 사람들이 일어난 게 어디 동학 때문이겠어. 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지”라고 소감을 피력했다. 그는 드물게 보는 지식인이었다. 따라서 그의 지식을 토대로 과거의 일을 말하면서 자신의 견해가 많이 섞여 있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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