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최관도(崔貫道)
1868~1898. 본관은 전주. 자는 관도(貫道), 본명은 일기(一基). 전북 정읍 출생으로 1894년 당시 고부지역에서 지도자로 활동하다 피신, 남원 등지에서 반외세 운동을 벌이다 체포되어 1898년 9월 9일 전주 관아에서 31세에 사형됨.
최낙진(崔洛鎭)
1939~ . 최관도의 증손으로 족보명은 낙봉(洛逢). 부여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뒤 1960년대 초 한국서민금고 함평지점을 운영하다 실패한 뒤 1967년도에 상경. 현재 서울 은평구 수색동에서 요식업을 하고 있고, 동학농민혁명유족회 부회장을 맡고 있음.
김양식
다시피는 녹두꽃
전라도 고부는 동학농민전쟁의 진원지로서, 이 지역 대다수의 농민이 농민군으로 활동하였다. 1894년 1월 10일에는 전봉준 등의 주도로 농민전쟁의 도화선이 된 고부 농민항쟁이 일어났고, 3월 25일에는 3월 20일 무장에서 봉기한 농민군이 고부 백산에 집결하여 본격적인 농민전쟁에 돌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밝혀진 농민군 후손은 많지 않은 실정인데, 그 중의 하나가 최관도의 증손 최낙진이다. 26세의 젊은 나이에 농민군에 가담한 최관도에 관해서는 자료가 없어 정확한 사실을 알 수 없으나, 최낙진을 통해서 어느 정도 최관도의 집안 형편과 농민군 활동상황을 복원할 수가 있다.
옛날에는 고부군인데, 지금은 정주시 망제동 366번지. 황토현하고는 한 이삼 킬로밖에 안된다고. 그 양반이 종손이거든. 내가 구대 종손이니까 그 양반이 오대 종손쯤 될 거야. 내게론 증조부지. 전주 최씨 뿌리가 내 집이야.
그가 살던 형편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재산은 앞들을 다 갖고 있다고 했으니까. 그 양반 재산이 지금도 임야가 한 만오천 평이 있어요. 그런데 지손들이 그 임야를 다 잘라가. 그 근거가 지금도 남아있어. 그런데 지금 세상이 이렇게 오래 돼버리니까, 전부 집안 지손들이 짤라가버렸는데 내놓으라고 할 수가 없는 거야. 할아버지 말씀 들어보면, 이 양반이 생존해 계실 때 마을 앞에서 소를 많이 잡을 경우 세 마리까지 잡아가지고 명절 때 고기 같은 거 못 먹는 사람들한테 나눠주었다는 거야. 동학이 일어나기 전에 우리 할머니가 네 분이나 된다고. 집도 엄청 크고 잘 살았고.
신분에 대해서도 그의 말은 아주 소상하다.
전국 궁술대회에서 예전 할아버지 한 분이 일등을 해가지고, 덕천면 높은 산에서 육안으로 보이는 걸 다 사사를 받잖어. 지금도 그 땅이 엄청나. 모두 지손들한테 나눠줘 가지고 다 쪼개먹었지만. 동숙산이라는 큰 산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내가 구전으로 들은 얘긴데, 우리집에 관복이 있었다거든. 그게 어떤 관복인지는 모르고. 할머니가 시집와서 본 게 그것이 있었는데, 왜정 때 어려우니까 유씨한테 쌀 한 말 받고 팔아먹였대. 그리고 우리 어려서 말이야.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요런 손가락만한 구슬이 달린 홍띠가 집에 둥글러 다녔다고. 그것이 뭔 것인고 허니, 옛날에 증조부가 맸던 도포끈이래. 그런데 우리가 잘라가지고 팽이채 만들어버렸다고. 지금 생각하면 좋은 종이로 만든 책들이 이렇게 쌓여 있었다고. 그 귀중한 책들을 재기 만들어 차버렸어.
용모와 체격도 “우리 증조할아버지는 구 척이래. 구 척 장신에다가, 그 양반이 운동신경이 굉장히 빨랐던 것 같아. 우리 할아버지 말 들어보면, 사람이 못 넘어가는 담도 손만 짚으면 뛰어서 넘어갔다고 하거든”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고부 황토현 근방에서 태어난 최관도는 예삿 사람보다 체구가 크고 힘이 셌으며, 그의 집안은 관복과 홍띠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양반가문이었고 재산도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남부러울 것이 없었던 그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는 동학농민전쟁에 가담한 것은 의아스러운 일이다. 이에 대해서 최낙진은 “나도 중간에 의아심을 가졌지. 그렇게 잘사는 양반이 왜 그런 운동을 했을까? 그런데 사가들을 만나본게 그것이 아니드라고. 조금 뭐헌 양반들은 국운을 생각하고 그 엄청난 걸 숨어서 했더라고” 하였다. 농민군에 가담한 동기가 무엇이었는지 짐작케 한다. 이에 따라 혁명대열에 동참한 최관도는 실제 지도적인 위치에서 활동하였다.
이 양반이 동학 때 백마를 타고 댕겼다고 하거든. 지휘관이 아니었나 싶어. 고부에서 우리 마을로 넘어오는 길이 있다고, 그 길을 넘어올 때 보면은 휘하에 말이 한 백오십 필 정도 따라왔다고 그랬거든. 그러니까 엄청난 장수였던 것 같아. 우리 할아버지 말 들으니까,우리 마을에도 말을 한 백 필씩 밤에 끌고 들어와서 숨고 그랬다는군. 그리고 중간에 할머니 한 분[부실]이 뭔 얘기를 했는고 허면, 처녀 때 고부 관아에서 우리 마을 넘어오는 길이 자기 집 담벼락 밑으로 지나갔다고 그래. 그때 보면은 공작모를 쓰고 뒤에 몇 백 명 씩 따라다니고 그랬다더군. 그리고 또 언젠가는 뭔 얘기를 허는고 허면, 그 집이 앵기라는 마을로 고부에서 우리 마을 넘어오는 소롯길인데, 앵기 박씨가 부잣집 딸인데, 그 집을 한번 털러들 왔드래. 그런데 우리 증조할아버지가 와서 지휘를 허는 거야. 동학 때 우리 마을 앞에서도 엄청난 싸움을 했던 것 같아. 왜 그런고 허면, 우리 마을 밑에 피내보라는 보가 있었다고. 그전에 우리가 들을 때는 피내보 피내보 무심코 들었는데, 근간에 어느 사학자 보고 물어봤더니 옛날 동학 때 그 앞에 피가 내를 이루어 내려와서 피내보래. 만석보 자리에서 상류 쪽으로 한 육 키로 올라와서 피내보라는 데가 있다고. 우리 어려서는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져버렸어. 그리고 그때 동학에 가담한 거물급들이 옛날에 어사가 차던 것 같은 어떤 명패를 갖고 있었던 것 같애. 그런 뭣을 우리집 와서 막 찾는데, 다급하니까 집 앞에 있던 미나리 깡에다 던져버렸다고 하드라고. 동학군들이 사용했던 도장 있잖아, 그 목도장 하나가 섬[위도]에 있던 우리집으로 왔드라고. 뭔일인가 나는 모르겠어. 그걸 여그다 숨기고 저그다 숨기고 변소 지붕에다도 숨기고 그랬는데, 공교롭게도 변소에 불이 나서 다 타버렸대. 그런데 이 양반이 최종적으로 돌아가시는 해는 1898년. 남원 쪽 숨어서 활동하다가 돌아가셨다는데, 구전으로 듣기에는 삼사년간 숨어서 외국사람들 배척운동을 했다고 그러드라고. 그러다가 남원, 운봉 어디서 잽혔다는 것 같아. 무술년이면은 1898년이거든. 그해 가을에 음력으로 9월 9일날 전주 관아에서 사형집행을 당했다고. 그래서 집안사람들 한 사십여 명을 동원해가지고 가서 시체를 거다왔다고 하더라고. 길가에서 한 번도 쉬지 않고 정읍까지 모셔왔대.
고부가 동학농민전쟁의 진원지였고 황토재가 격전지의 하나였던 만큼 이에 관한 기록과 이야기는 많이 전해온다. 이것은 최낙진의 증언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최관도는 고부 지역 농민군의 한 지도자[접주]로 활약한 것으로 보이며 그것은 그가 말을 타고 다녔다든가 명패와 도장을 지참한 데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이렇게 고부에서 활동하던 최관도는 피신한 뒤에도 반외세운동을 벌이다 결국 체포돼 1898년에 사형되었다. 1898년에는 고부·정읍 일대에서 영학당 투쟁이 벌어졌는데 여기에 연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기록이 없어 확인되고 있지 않으나, 사형될 정도이면 그의 활동이 매우 두드러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그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체포, 사형은 곧이어 후손들의 도피와 역경으로 이어졌다.
이 양반이 잡혀서 사형일자가 확정이 되니까, 틀림없이 후손들한테도 영향을 미칠 것 아니야. 그러니까 전갈이 오기를, 그때 우리 할아버지가 여섯 살 때야, 누가 데리고 가든 빨리 위도로 숨어라. 그래서 증조할아버지 작은 마누라 한 분이 업고 위도로 숨는다고 위도로 숨었는데, 고향하고는 전연 연결이 안되는 거야. 그리고 무서워서 나오지도 못하고. 그 작은할머니가 우리 할아버지 스물세 살 때 거기서 돌아가셔. 여섯 살 때 들어갔으니까 십몇 년이야. 그런데 돌아가시면서 유언을 하는 거야. 여섯 살 때 들어갔으니까 아무것도 모르지. 이 양반이 스물세 살 때 고향 와서, 그 할머니가 내력을 알려준 대로 이틀만에 지손[支孫]을 하나 찾은 거야. 그런데 그게 친일파야. 그 후손들이 전부 면장도 하고, 의회의장도 하고 뭐하는 친일파 정읍 고을 거두를 찾은 거야. 그때 친일파 거두가 우리 할아버지한테 농사를 지으라고 소작논을 팔십 마지기를 얻어주어. 위도에서 나와서는 계속 그 마을에 살았어. 소작 받아서 농사짓고, 산에 임야 같은 것이 한 이만 평 가까이 남어 있으니까 밭떼기도 일구고 허니까 백 마지기 이상 농사를 지었어. 그래서 먹고 사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어. 소작이라도 많이 지으니까, 먹을 건 항상 풍부했어. 왜냐하면 할아버지가 딴 짓거리 않고 그냥 그 친일파 집에 가서 머슴마냥 종생활을 한대니까, 그 집에서 장가도 다 보내주고 그랬어. 그렇지만 먹고 살만은 했어도 교육시킬 정도는 못 됐지. 왜정 때 우리 아버지가 농사는 많고 쟁기질하다가 평양으로 도망갔다 온다고. 농사짓기가 싫어서.
최관도가 사형당하게 되자, 그의 유족들은 위도로 피신했다가 십칠년 만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집안의 몰락과 가난, 친일파로 전락해 있는 친척들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최관도의 아들 최귀문은 친일파가 얻어준 소작논 80마지기에 의존해 산을 일구며 힘겨운 생계를 꾸려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머슴과 같은 소작농의 하루하루, 한 뼘의 땅이라도 늘리려 산비탈을 일구는 고초, 농사짓기 힘들어 도망치는 아들, 이런 것들이 농민군으로 활동하다 생을 마감한 최관도의 후손이 겪은 삶이었다. 그런데 이같은 사실을 증언하는 최낙진의 말 속에는 지울 수 없는 두 가지 한이 서려 있었다. 하나는 친일파에 대한 원한이었다. 그것은 비단 친일파였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바로 증조부의 죽음과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집안의 내력과 깊은 관련이 있어서이다.
그러니까 구전으로 들리는 얘기에 우리 큰 증조할머니, 본 마누라지. 그 양반이 사형을 면할려고 친정이 잘살고 해서 돌아다니면서 천 냥을 갖다 넣었다거든, 그렇지만 이 양반이 살아나오면 최가들이 망하게 생겼거든. 그래서 지손들이 다시 돈을 써가지고 이 양반이 사형당했다고 하더라고. 우리 어려서 그 양반이 산 집을 보면 사랑채가 한 십여 칸 됐어. 그런데 우리는 살지도 못하고 지손들이 다 빼앗아 깔고 앉아 살아버렸어. 농사를 엄청나게 지은 건 사실인데, 자세히는 몰라. 지금도 땅이 많어. 옛날에 쓸모없는 땅, 버려진 땅은 안 가져가고 [쓸 만한 땅은] 전부 지손들이 다 가져가버렸어. 저그들 형제들끼리 서로 도장 찍어가지고 그 근거를 내가 지금 가지고 있다고. 그런게 우리 할아버지에게는 한 삼종뻘 되는 그런 집안들이지. 그런데 그 친일파 거두가 뭐라고 그러냐면은 저놈 할아버지가 살아 있으면 내가 지금 밥먹고 못사네, 그런 얘기를 한 거여. 여러 가지 구전을 종합해보면 이 양반이 너무 똑똑하니까 우리 집안사람들이 못살게 생겼으니까 최가들이 합동을 해서 이 양반 사형시킨 것 같어.
이로써 보면 최관도의 경우도 뇌물을 써서 사형을 면할 수 있었으나, 농민군의 후손인 점을 두려워한 일가 친척들의 방해로 성사되지 못한 것 같다. 이들이 바로 일제 강점기에 친일파로 성장한 지손일 뿐만 아니라, 위도로 피난 가 있을 동안 최관도의 재산을 빼앗아간 친족들이었다. 소작농으로 전락한 직계 후손과 친일파로서 지역 유지가 된 방계 친족들의 엇갈린 삶은 바로 우리 민족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되면서 만들어진 비극적 산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같은 비극은 해방 이후 친일파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그대로 이어지고 있듯, 두 집안의 갈등 역시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가 86년도에 돌아가셨을 때 친일파 후손들이 같은 집안인데도 내 산인데도 마을 산에다 묘를 못 쓰게 하드라고. 거기다 묘를 쓰면 마을이 안 좋다네. 저그는 여기저 기 쓰면서도. 근데 우리가 어려서 기억이 나는데 한 삼십오 년 전 뭔 짓거리를 하느냐면, 그 친일파 집에서 뒤로 좀 올라가서 우리가 집을 짓고 살거든. 집을 지어놓으니까 저그 집 뒤에 집 지었다고 마을 사람들 동원해서 얼마나 우리를 못살게 굴었나 몰라. 우리를 그 마을에서 못살게 할려고 엄청 방해를 해. 그 짓거리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잖아.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허고 62년도 군을 예편해서 집에 있는데, 아버지가 내가 공무원이 됐으면 하고 원을 하드라고. 그때만 해도 관공서 등용문이 뭣이었냐 하면 촉탁이라고 있었다고. 일단 촉탁 들어가서 근무를 하면서 발판을 마련하는 거야. 그래서 면장하고 내가 촉탁으로 들어가기로 다 됐다고 다음 주부터 출근을 헌다 허고 같이 밥도 먹고 술도 먹고 했는데, 며칠 있다 면장한테서 안된다고 연락이 온 거야. 그 이야기를 아버지가 않더니 돌아가실 무렵에사 그 당시 우리 면의회 의장으로 있던 친일파 후손이 방해를 했다고 하더라고. 그 뒤 아버지가 화가 나니까, 63년도에 가을 농사를 지어가지고 나한테 사백 가마 쌀을 주는 거야. 엄청난 돈이지. 얼마나 화가 나셨는지. 너는 나가서 장사를 해라 하고. 그래서 함평에 가서 한국서민금고 함평 지점을 개설한다고 아버지가 돌아가실 무렵에 가서야 너는 가덜 방해로 절대 공직생활을 못하게 되어서 장사를 시킨거다 하고 그러시드라고. 그때 떠가지고 지금까지 객지살이를 하니까 그 친일파 후손들이 안해도 될 타향살이를 시킨 거야.
여기의 ‘면의회 의장’은 민주당정권 시절 지방의회가 있었을 적의 이야기다. 이처럼 증조부의 사형에서부터 비롯된 두 집안의 서로 다른 길은 우리 민족의 현대사가 그랬던 것처럼 크게 굴절된 것이었다. 최낙진도 같은 자손이면서도 미워하고 못살게 한 점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최낙진의 증언 속에 느낄 수 있는 또 하나의 한은 농민군의 후손이란 점을 숨기고 살아야 했던 점이다. 그것은 그의 할아버지가 보여준 태도를 통해 엿볼 수 있다.
60년대 말경 같어. 그 무렵만 했어도 나이 많은 사람들이 우리 고을에 많이 살아있었거든. 할아버지 친구들도 살아계셨고 그런데 동학관계는 원체 말씀을 안하셨어. 통감까지 읽은 양반이 나는 오로지 글이라는 것을 모른다 하고 생을 마친 양반이여. 그리고 친일파 집에 가서 이를 악물고 종노릇을 하는 거야. 뭐 일이 있으면 가서 전부 봐주어버려. 그리고 박 대통령이 혁명비 세울 때, 면직원이 우리집 와서 돈을 협조하라고 그러는 거야. 그때 돈으로 십사만 원이면 쌀 열네 짝이든가 그 돈을 요구하는 거야. 할아버지가 탑 세우는 데 협조를 허면 나중에 세상 뒤집어지면 뿌리채 다 뽑히니까 절대 그런 짓 하지 말라고 말린 양반이라고, 돈도 안 내고.
최낙진의 조부가 자신의 부친이 농민군 활동을 하다 사형당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살아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왜 그는 아무 말 없이 친일파의 소작농으로 묵묵히 생활하였고, 혁명탑 건립시에는 헌금을 내지 않았던 것일까. 그가 생을 마칠 때까지 동학에 관해 한 마디도 말하지 않은 것은 그동안 동학농민전쟁과 농민군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얼마나 왜곡 되어왔고, 그로 인한 후손들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었는지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이에 대한 정당한 평가는 농민군에 대한 신원과 명예회복, 더 나아가 고난에 찼던 후손들의 삶에 대한 최소한의 보답이 되는 일차적 과제가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이것이 곧 최낙진의 집안 내력에서 볼 수 있듯이 그동안 왜곡되고 파행적으로 흘러온 우리 현대사를 바로세우는 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