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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록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총상을 입어 진안으로 몸을 날린 함윤찬, 손자 기영
대상인물

함윤찬(咸允贊)

1868~1912. 본관은 강릉 양근. 본명은 기수(基壽), 자가 윤찬(允贊), 일명 완석(完錫). 김제군 하리면(지금은 금산면) 고리배미 출신으로 김덕명의 휘하에서 농민전쟁에 참가한 것으로 추정. 관군의 추격을 피하여 진안으로 피신하여 살았음.

증언인물

함기영(咸基永)




1947~ . 본명은 재영(在永), 기영(基永)은 자. 현대건설에서 노조운동에 참가. 현재 자동차 매매업.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상임이사로 활동.



가계도
가계도 이미지
정리자

우윤

출전

다시피는 녹두꽃

내 용

함윤찬이 태어날 때 난산으로 인하여 어머니 이씨가 타계하자 아버지 두향은 12명의 유모를 정하여 둘째아들 윤찬을 키울 정도로 상당한 재력을 가진 농군이었다 한다.

제가 듣기에는 우리 증조할아버지가 김제 일북면 그쪽에 상당한 토지를 가지고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왜 그런 얘기를 아느냐 하면은 할아버지를 출생하다가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셨답니다. 그런데 유모를 열두 명을 둘 정도로 재력이 있었답니다. 그래서 우리 할아버지 두 분은 상당히 유복하게 자랐고, 교육도 상당히 받은 걸로 저는 알고 있어요. 당시에는 주로 한학을 공부하셨겠고. 정확한 것은 몰라도 상당한 글을 읽었다고 알고 있어요.

이렇게 자란 함윤찬이 부패한 사회를 바로잡고 외세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고자 농민전쟁에 참가하였으나 일본군이 개입하여 농민군이 몰리게 되었다. 이때 집으로 피신한 함윤찬에게 돌아오는 것은 갑자기 변한 주변의 인심이었다. 그래서 택한 것이 야반도주인데, 손자 함기영은 곤혹스럽게 그때의 장면을 이렇게 말한다.

그때가 아마 막 체포령이 떨어져가지고 막 잡아들일 때, 야반도주한 걸로 알고 있어요. 얼핏 이야기를 듣기로는, 내가 우리 할아버지 고향사람들에 대해서 조금치도 누를 끼치는 얘기를 해서는 안되지만은, 같이 동참했던 사람들 중에도 나는 안했고, 저 사람은 했다고 관에 밀고를 했다고 들었어요. 그 얘기를 증언록에 넣어야 할지 말지 모르겠어요. 왜냐하면 그쪽 사람들이 이걸 보면은 저놈 집안이 도망을 가더니 결국은 그 손자놈들이 헌다는 소리가 고향 욕하고 다닌다는 소리를 할까봐. 그래서 내가 가능하면 그 소리를 뺄까 하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사실이 그런 걸. 대부분 밀고했던 사람들이 자기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나는 안했다, 저 사람이 했다 쪽으로 몰고갔기 때문…. 물론 아무것도 근거가 없는 사람이야 홀가분하게 거기를 떴겠지만은, 조상 대대로 산소가 있고 땅이 있고 재산이 있는데, 그걸 버리고 거기를 뜬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얘기해서 고향을 등지고 재산을 버리고 몸만 빠져서 야반도주를 한다는 거는, 그 이후의 생활이라는 거는 산 목숨이 아니고 죽은 목숨입니다. 살아도 그것은 자기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었다 말입니다.

살아도 죽은 목숨과 다름없는 도주길에 오른 두 형제[공찬, 윤찬]. 이후 집안은 풍비박산, 가족의 고난사는 시작되었다. 이제야 그 고난사를 겨우 마무리하고 옛날을 그리워하는 손자 함기영이 말하는 고향이란, “사시던 원 출생지는 어디냐 하면은 김제군, 당시에는 하리면 고리배미라고 하는데, 지금 현재는 거기가 금산면이예요. 거기의 소용돌이를 지금 생각해보면 가담을 안할래야 안할 수가 없는 지리적 조건이었던 거 같아요. 바로 원평 근첩니다. 거기서 원평이 한 이 키로 정도 거리니까. 아 김인배 장군도 거의 이웃마을입니다. 고리배미라는 마을이 김영중 회장[김인배 후손]과 같은 마을이예요.” 바로 원평 부근이었다. 당시 원평은 김덕명의 주 활동지이며 농민전쟁의 진원지라 볼 수 있는 곳으로, 커다란 장이 열려 오가는 사람들로 크게 붐비는 곳이었다. 이런 관계로 농민전쟁의 핵심적 지도인물들이 살고 있거나 거쳐 갔던 곳이었으며, 그리하여 농민전쟁 직전 삼남 집회(충북 보은, 전북 금구 원평, 경남 밀양) 때 바로 원평 집회가 열리기도 했던 곳이었다. 원평 집회는 1893년 3~4월 척왜양운동을 추진하고자 전봉준·김덕명·손화중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대중집회로서, 같은 시기에 열렸던 보은 집회를 좀 더 강력한 투쟁으로 유도하여 농민전쟁을 촉발시키려 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또 농민통치기에는 전봉준의 세력권으로서 대도소가 설치되어 폐정개혁을 추진하던 중심 지역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의협심이 강한 함윤찬이 김덕명포에 들어가 1, 2차 농민전쟁은 물론이고 집강소 활동에도 참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농민전쟁이 막을 내리고 수색령이 떨어졌을 때 공찬, 윤찬 두 형제가 몸을 날린 곳은 진안이었다.

전라북도 진안군 상전면 산골짜기에 가서 저희 할아버지는 아마 총상을 입었던 것으로 얘기를 들었어요. 진안군 상전면 갈현리 갈버리라는 조그마한 산골 마을이예요. 거기에 가셔가지고 큰할아버지는 산지기를 하시고 머슴도 하시고 우리 할아버지는 다쳐서 인자 몸이 불편해가지고, 그나마 힘든 일을 많이 못하신 것 같아요. 그런데 요행스럽게 큰할아버지는 손을 못 봤어요. 할아버지만 거기 가서 한 사오년 있다가 우리 큰아버지 낳고, 아버지 낳고 형제분을 둘 수가 있었지요.

피붙이 한 명 없는 진안 골짜기에서 두 사람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혹시 해를 입을까’ 자식들에게 함구하는 고통까지 감수해야 했다.

저희 할아버지들이요 일체 함구를 하셨어요. 동학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 안하시고. 아버지도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큰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면서 약간 귀동냥하셨고. 나도 어려서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어머니한테 내가 철들었을 때, 왜 우리는 뿌리가 없냐고 질문을 던지니까, 사실은 이만저만해서 할아버지들이 동학혁명에 가담해서 집안이 다 풍비박산 나고….

그러다 그 지긋지긋한(?) 진안에서의 생활을 청산하는 계기는 우연히 찾아왔다.

어쩌다가 우리 가문에서 김제군 공덕면 회룡리에 사시는 우리 어머니를 중매를 했어요. 그래서 우리 아버지를 집안에서 김제 쪽에서 중매를 서서 김제로 장가를 드셨어요. 어머니가 시집을 와서 진안에 가니까 자기 고향도 아니고 아무것도 살 근거가 없는 거라요. 그래 어렵사리 거기서 남의 접방살이를 하면서 딸 둘을 낳고 친정에 다니러 아버지 하고 오니까, 외삼촌들이 도대체 아무것도 없는 진안 산골짜기에 가서 뭘 보고 사느냐 고향도 아닌데. 여기 눌러앉아서 살면은 처갓집이 뿌리가 있고, 집안 대대로 남평 문씨네 텃밭이니까 여기서 살면 굶어 죽지는 않는다. 그래서 아버지를 눌러앉혔어요. 그래가지고 진안에서 뜬 거지요. 그래서 도피생활이 끝난 거예요. 그게 아마 1935년쯤 될 겁니다.

함기영의 아버지가 처가의 덕을 톡톡히 본 셈이었다. 그렇지만 처갓집 부근에만 얼쩡거린다는 것은 젊은 혈기가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서 고생을 하기로 작정하고 무작정 상경하기도 했는데, 그런 아버지의 고생이 못내 안타까웠는지 가슴이 북받치는 함기영이다.

우리 아버지는 너무 피해를 많이 받은 분의 한 분이예요. 왜? 고향도 없지, 부모도 집도 절도 없지. 그러는 와중에서 교육도 제대로 못 받았지. 가장 피해를 받은 분, 죄 없이 피해를 받은 분은 우리 아버지 대란 얘기예요. 우리 아버지도 참 놀기 좋아하고 키도 크고 힘도 세고 그래가지고 젊었을 때는 진안 시골 장터에서 씨름을 해서 황소도 탔다는 얘기도 들어보고 그랬는데, 이 양반이 처갓집에 와서 살다가, 처갓집에서 산다는 게 좀 그렇잖아요. 눈치가 보이니까, 이 양반이 다시 서울에 와가지고 심지어 막노동까지도 하고. 해방 전이지요. 고생이라는 건 말할 수가 없어요. 어느 정도 고생을 했느냐 하면, 고향에 내려와서 보니까 우리가 너무너무 먹을 게 없으니까, 우리 아버지가 피를 팔았어요. 이게 요즘에는 있을 수가 있지만은, 당시에는 피를 판다면 생명을 판다는 거였습니다. 쌀 한 말에 피를 팔았습니다. 마을에 누가 당장 수술을 해야 하는데, 당시에는 헌혈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당장 죽게 생겼으니까 물론 돈을 받고서 피를 판 건 아니고,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피를 혼자서 그 많은 수술하는 용량만큼 빼줬는데, 그분이 그 대가로. 그때 아주 어려웠을 때, 쌀 한 말을 받은 걸로 나는 기억을 해요. 나는 우리 아버지가 피를 팔은 것이 아니라 헌혈을 했다고 생각을 해. 왜, 누가 가서 그 쌀을 받아오는 사람이 없어가지고, 그 쌀 한 말을 내가 어려서 여덟 살 때 그 쌀을 받아온 기억이 나요. 준다고 그래도 우리 누나들도 형들도 쌀을 받으러 가지 않았어요. 그래서 내가 제일 어렸으니까, 여덟 살 때 무얼 압니까, 내가 쌀 한 말을 짊어지고 오다가 개울에 엎은 적이 있어요.

쌀과 밥이 피가 되고 살이 된다는 말은 있어도 피가 쌀이 된다는 말은 그 기구한 사연을 아는 사람만이 알아준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은 우리 할아버지도 역사의 희생물이고, 우리 아버지 우리 대까지 역시 대대로, 그러니까 삼대가 피해를 봤다고 봐야 돼요.” 그래서 후손으로서 제대로 입지도 못하고 학교가지도 못한 원망이 없을 수 없는데, “후손들 입장에서는 뭐 원망이랄까, 어떻게 해서 그런 데 가담을 하지 않았으면은 하지 않을 고생을 우리가 사서 하지 않는가”하는 야속한 생각이 들 때도 한두 번이 아니란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자랑스러운 조상이었음을 새삼 느낀다는 함기영.

우리 할아버지가 한 일에 대해서 처음에는 이해를 못하고 원망도 많이 했지만은, 요 근래에 와서는 우리 할아버지가 정신 하나만은 그 당시에도 올바르지 않았는가, 지금은 이해를 해요. 불의를 보고 그냥 안넘기고, 참 좋은 일에 앞장 섰다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지금에 와서는 내가 철이 드니까.

그동안 후손들은 어두운 긴 역사의 터널 속에 내팽개쳐진 채로 살아왔고, 그 속에서 고통과 비애가 겹겹이 쌓여 오늘에 이르렀으나 꿋꿋이 버틴 후손들의 삶은 그래도 밝다. 국민학교 5학년을 중퇴하고 독학으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친 함기영, 그는 이제 어려웠던 지난날을 자랑스럽게 회상한다.

한마디로 얘기해서 초근목피로 유년기를 보냈다고 봐야 돼요. 저는 외가에서 출생을 했어요. 외가는 김제군 공덕면 회룡리라는 덴데 가정생활이 너무 어렵다보니까, 아버지는 서울에 와 계셨고, 그때는 날품팔이 하기도 참 힘들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서울에서 근근이 막노동을 하셨고 어머니는 기독교 쪽으로 신앙생활을 하셨기 때문에, 사실은 외가에 있는 것도 너무 어려우니까 교회에 소집사로 들어가셨어요. 공덕면 회룡리 송지동 교회라는 역사가 백 년 가까이 되는 아주 오래된 교회가 있는데, 어머니는 처녀 때부터 거기 주일학교 다녔어요. 그래서 그 교회 소집사로 들어가서 우리 형제를 교회 울타리 안에서 길렀어요. 옛날 동학이네 이런 거하고는 거리가 멀게 개신교 신앙생활을 하셨는데, 어머니가 교회 일을 하다보니까, 나 역시 어려서 틈틈이 교회 일을 도우면서 자랐지요. 청소도 하고, 교회의 모든 업무, 잡무를 맡다시피 하고 그러니까 우리 형님도 초등학교 밖에 교육을 못 받고, 사실은 나도 국민학교 오학년 밖에 못 다녔어요. 내가 이런 얘기를 하면 부모를 원망하는 건지 몰라도, 어머니 능력으로는 국민학교 오학년 밖에 못 보냈어요. 그래서 제가 조그만한 중학교 과정의 학교를 설립한 데서 이학년을 다녔어요. 그러다가 열다섯 살 때부터 사진관 종업원 노릇을 했습니다. 열일곱 살까지 사진관 종업원 노릇을 하다가 사진관을 하나 인수받았어요. 그래서 직접 내가 사진관을 이리에서 운영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치 않게 국민학교 동창을 만났는데, 이 친구가 공부를 해야 되지 않겠느냐 해서 들어간 것이 군산 중앙상업고등학교 야간붑니다. 지금 현재는 인문계로 바뀌어가지고 중앙고등학교지요. 거기 이학년에 편입을 했어요. 삼학년 십이월 달에 혼자서 학비니 조달을 못해 가지고 졸업시험까지 봤는데, 그리고 사실은 제가 졸업장을 못 받았습니다. 학교 졸업하는 날 학교를 못 가고, 그 다음날 서울 올라왔지요. 서울엔 아무런 연고가 없이 올라왔어요. 그래가지고 처음엔 입었던 옷도 벗어서 팔았고 이건 참 비참한 얘긴데, 내가 이월 달에 올라왔는데 그 추운 겨울에, 너무 견디기 어렵고 그래가지고 오바를 벗어서 팔았어요. 당장 밥은 먹어야 되니까. 어떻게 생각을 해보면, 고아나 다름없지요. 고아나 다름없이 컸고 옛날 육이오 이후에 흉년이 한 삼년 겹쳐가지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생을 많이 했지만은, 아마 당시의 식생활이라는 것은, 진짜 한마디로 해서 초근목피라고 표현을 하는데, 그 초근목피를 진짜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초근목피라는 말의 뜻을 모릅니다. 소나무껍질을 벗겨먹고. 독새기풀을 뜯어다가 삶아서 우려가지고 독소를 뺀 다음에 먹고. 피죽도 못 먹었다는 얘기를 가끔 하는데, 피라는 거는 흉작이 되면은 벼보다 피가 아주 성장률이 좋아가지고 벼는 다 말라서 죽어도 피는 자랍니다. 피는 새까맣게 여물면은 바가지를 들고 가서 훑어요. 피는 좁쌀만큼 작은데, 그걸 가마솥에 볶아서 문질러가지고 껍질을 벗기거든요. 그걸 다시 맷돌에다 갑니다. 맷돌에 갈아서 그걸로 죽을 쑨 게 피죽인데, 지금 사람들은 피죽이 뭔지 기억도 못해요. 그래가지고 제가 교회에서 자라면서 음악 쪽에 조금, 정식으로 교육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피아노 같은 건반악기를 조금 다룰 수가 있었어요. 그때는 어디서 레슨을 받을 수도 없었지만, 교회에서 자라다보니까 조금 할 수가 있었어요. 그래가지고 서울에 처음 올라와가지곤 음악을 한답시고, 곽준용 씨라고 하와이안 기타를 하시는 분 밑에서 잔심부름도 했고, 그다음에는 유니버샬 테이먼트의 악장으로 계시던, 미팔군 쇼단이죠, 김형진 씨라고 얼마 전에 대구에서 돌아가셨는데, 그분이 청소년 음악회 단장인데, 그 밑에서도 잔심부름을 한 적도 있고 배호 있지요. 배호씨가 천지 나이트크럽에서 드럼을 연주할 때, 그 밑에서도 잔심부름을 좀 한 일이 있고. 그러다가 군대를 간 거지요. 수도경비사 제5대대 헌병대에 들어가서 복무했고 거기 나와가지고서 뭘 했느냐 하면 처음에는 택시운전을 했습니다. 택시운전을 하다가 80년대부터 직업을 자동차 매매업으로 바꾼 거지요. 70년대 말에는 중동 해외근로자로도 가 있었고 현대건설에서 노조운동을 좀 하고 현대건설의 새마을 위원장도 내가 했어요. 우리 생활이라는 게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런 뿌리가 없이 서울 와서 자리를 잡는다는 것은 당시에는 너무 어려웠어요. 심지어 중국집 짜장면 철가방을 들고 배달하는 자리도 없었으니까. 먹고 자는 숙식을 제공하는 사람도 없었고 그러니까 당시에 서울 생활이라는 거는… 제가 66년도에 서울에 왔어요.

밑바닥 생활을 훑다시피한 서울에서의 생활은 눈물 없이 하지 못하고 눈물 없이 듣지 못할 지경이다. 이런 와중에 병역기피자를 면하려고 태어난 해까지 1950년으로 고쳐 주민등록에 올려야 했던 함기영은 “이것도 따지고 보면, 뿌리가 없이 떠돌이 인생이 돼다 보니까 이렇게 된 거라”며 ‘가족의 고난사’를 체념으로 받아들이지만 그래도 피는 진한 것. 함기영은 할아버지 못지않게 ‘꾼’이었던 모양이다.

할아버지 피를 받아서 그랬는지 몰라도 내가 성장하면서 노동운동 쪽에도 학생운동 쪽에도 했어요. 중학교 때부터 데모꾼으로 소문이 났었어요. 그러다보니까 지금도 정부에 뭐 잘못 된 거 있으면 수시로 건의도 하고 신문에 기고도 하고 그런 쪽이예요. 피는 못 속이는 것 같아요. 분명히 우리 할아버지는 내가 하는 짓거리 하고 닮은 꼴이 있지 않은가 싶고. 내가 세법도 고친 예가 있는데, 84년에 신문에 기고를 해가지고 정부가 국민에 게 부당한 세금을 징수한다면은 당연히 그것을 시정해야 하지 않는가 해서 한 육개월 동안 서울시 내무부하고 싸워가지고, 결국은 자동차에 관한 주소이전 등록세라는 걸 육천 원씩 받았는데 그걸 소멸시켰지요.

그래서 그런지 요즈음 부쩍 할아버지 찾는 일에 열심이다.

나는 근래 와서는 자주 우리 할아버지들이 쫓겨가가지고 아닌게 아니라 유배생활하던 그 동네를 갑니다. 가가지고 동네도 둘러보고, 그 동네 노인 만나 얘기를 들어봐요. 그 당시엔 우리 할아버지들 두 분만 도망온 게 아니예요. 들녘에서, 김제·만경을 얘기하는 겁니다. 쫓겨와가지고 길게는 이삼십 년씩 있다가 다시 자기 고향 찾아간 사람들도 있고, 아니면 서울로 이주한 사람들도 더러 있는데, 당시에 쫓겨가지고 와서 사는 사람은 지금은 없다고 그래요. 우리도 다 나오고 그랬으니까. 어차피 거기는 고향이 아니고 유배를 했던 곳이니까 정이 안들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아요. 그런데 거기 사는 팔십된 노인네가 우리 아버지를 알아요. 큰아버지를 알고 큰할아버지 얘기를 하는데 들어보면, 큰할아버지는 상당히 체격이 좋았답니다. 건장하고 뚱뚱하고 그랬다요. 그런데 이 양반이 아무리 어렵고 굶고, 며칠을 못 먹고 굶주려도 손을 벌려 빚을 달라는 얘기를 안했답니다. 그 정신 하나만은 대단했다는 겁니다.

할아버지가 살던 진안에 들르면 할아버지와 큰할아버지의 행적은 찾을 수 있건만, 정작 그분들의 묘가 어디에 있는지 찾을 길이 막막하다는 것이 못내 함기영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지금은 아무도 없어요. 큰아버지도 자식을 못 보고 일찍 돌아가셨어요. 거기에 큰할아버지, 할아버지, 큰할머니, 할머니, 큰아버지 산소가 다섯 개 있어요. 그런데 사실 내가 가슴아픈 게 그 산소를 다 잃어버린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아홉 살 때 김제군 공덕면에서 우리 아버지가 세상을 뜬 거예요. 그러면서 진안을 안 가르쳐줬어요. 그러다보니까 산소가 어디 있는지 몰라요. 그 동네 가서 물어보면 노인들이 여기일 것이라고 그러지만, 비석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이게 우리 할아버지 산손지 남의 집 산손지 모른다 이거야. 다 공동묘지에 썼기 때문에. 거기에 우리 선산이라도 있어 딱 모셔왔으면, 누구누구 묘인지는 몰라도 좌우간 우리 선조의 묘라는 건 알지만은 공동묘지에 묻어놓으니 어쩔 수가 없지요.

그러나 늘 의욕적으로 자신의 일에 충실한 함기영은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현재 유족회 일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바쁘게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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