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손화중(孫華仲)
1861~1895. 본관은 밀양. 족보 이름은 정식(正植), 자는 화중. 정읍에서 태어나 일찍 동학에 입도하여 접주로 활동했고 1차 봉기 때부터 남접의 3대 지도자였으며 2차 봉기 때 공주 전투에 참여치 않고 광주, 나주지방의 방어임무를 맡았음. 1894년 12월에 잡혀 서울에서 재판을 받고 이듬해 3월 30일 교수형에 처해짐.
손홍렬(孫洪烈)
1936~ . 손화중의 손자로 정읍농고를 나와 공직에 근무하였고, 현재 정읍농협 조합장으로 있으며 동학농민혁명유족회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음.
이이화
다시피는 녹두꽃
손홍렬은 오랫동안 할아버지의 행적을 조사해왔다. 그는 먼저 집안 내력에 대해 소상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우리 선조가 한림공[翰林公]입니다. 내게서 심삽대조가 되는데, 한림공이라면 왕세자를 가르치시던 스승 아닙니까? 그걸 하시다가 나중에 역적으로 몰려가지고 정읍으로 귀양살이를 왔지요. 그래서 정읍이 고향이 됐지요. 우리 할아버지도 태어나서 자란 곳은 정읍이예요. 정읍에서는 지금으로부터 한 오백 년 전부터 살았지요. 벼슬을 국가에서 한 것은 별로 없고, 진사 같은 양반들이 하는 그런 것은 있지요. 우리 정읍에서는, 양반이다 하면 손가, 유가, 안가 하거든. 그 중에서 손가가 제일 양반이다, 토반이다 그래요.
사실 이곳 손씨들은 큰 벼슬을 하지는 않았으나 토반으로 행세했다. 특히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의 실록(實錄)을 내장산으로 옮겨 잘 보관한 손홍록(孫弘錄)의 음덕도 있었다. 이 공으로 손홍록은 나라에서 표창을 받았다. 손화중은 맏이로 태어났고 동생은 어릴 때 죽어서 외아들이 되었다. 손화중은 본처에서 3남 1녀, 부실에서 1남 1녀를 두었는데 홍렬의 아버지는 본처의 막내로 태어났고 그 자신은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손화중은 큰 부자는 아니나 머슴을 몇 명 거느릴 정도의 촌부(村富)였다고 한다. 체격이 크고 성품이 온화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런 유전 탓인지 홍렬도 체격이 당당했고 그의 아버지 형제들도 모두 6척 장신이었다 한다. 그의 할아버지에 대해서도 그는 소상히 알고 있었다.
우리 할아버지가 정읍에서 한학을 공부하시다가 장가를 일찍 가셨어[12살], 유씨 집안의 부잣집 딸하고 결혼을 했어. 이십대 초반부터 한학을 깊이 연구한다고 지리산에서 수학을 하시다가 동학의 물결을 타고 거기서 동학사상에 접하셨던 것 같아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동학에 입교해서 동학공부를 시작한 거지요. 그래서 최시형 동학교주라든가 이런 분들하고 직접 면담도 하고, 대화를 해가면서 전라북도에서 동학 포교를 시작한 것이 제일 최초의 케이스고, 또 제일 연소자가 아닌가 생각해요. 그러다가 대원군 초기에 정부에서 동학교도들을 구박하고 체포해서 형을 내리니까, 동학을 포교하는 과정이 그때 당시의 오지, 교통이 발달되지 않고 또 관헌의 눈에 뜨이지 않는 곳을 찾게 되고 고향인 정읍 지역에서는 노출이 되니까, 흥덕을 거쳐서 무장으로 가신 것이지요. 그래서 무장에서 포교를 본격적으로 했고, 그때부터 동학접주로서의 명성이 높았고, 그러니까 전라도에서는 교세를 많이 확장하고 접주로서의 역할을 잘 한 분이 손화중이다 그랬지요. 그러니까 동학에서는 대접주로 임명했지요. 우리 가족들은 그대로 정읍에 살고 있었어요. 할아버지 혼자 무장에서 거처를 하고 계셨으니까, 젊은 나이에 혼자 있으니까 가는 곳마다 소첩들을 거느리지 않았겠느냐 생각해요.
손화중은 정읍 과교리(꾀다리)에서 태어나 어릴 때 이웃 음성골로 이사를 갔다. 그리고 남접 지도자 중에서 가장 일찍 동학에 입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무장 포덕(布德) 당시 선운사 석불의 비결을 꺼낸 것으로 유명하다(오지영, 『동학사』).
농민전쟁이 일어날 때까지도 무장에 계셨거든요, 그래서 일 년에 한 번 내지 두 번씩은 꼭 우리집에 들러서 이삼 일씩 쉬어가실 때도 있고, 특히 그 양반의 아버지나 어머니의 제사 때 또는 할아버지 할머니 제사 때, 추석 명절이나 설 명절에는 집에서 며칠씩 거처하시다가 가신 걸로 돼있고, 농민전쟁이 일어날 무렵에는 우리 음성부락[지금 정주시 상평동]이라는 데를 오시면은, 오실 때마다 전봉준 씨가 꼭 우리집에 찾아오신 걸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 조모님이 동학난리 일어난 이후에도 한 이십오 년 이상 회갑이 다 되실 때까지 사시다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조모님의 말을 아버님이 듣고, 그 내용이 저희들에게 전해진 거지요. 그러니까 동학난이 일어나기 전에는 늘 할아버지한테 오셔가지고, 그때는 전봉준인 줄도 몰랐지요, 사랑방에서 밀담을 하고, 또 할아버지에게 애걸을 하는 모습이 할머니에게 목격이 되어 가지고 키도 조그마하고 상투도 조그마하고 나이도 좀 많이 든 사람이 무엇 때문에 할아버지한테 저렇게 애걸을 하고 사정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런 의심을 가졌다고 그래요.
그의 할머니에게 들은 이 이야기는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의 만남, 이것은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또 전봉준과의 관계에 대해 그는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동학의 활동 내용에 관해 할머니한테 들은 얘기를 종합해보면, 전봉준씨는 우리 할아버지의 밑이래도 한참 밑이다, 그런데 왜 역사에는 전봉준씨가 앞에 나오고 할아버지는 뒤에 나오느냐? 그건 우리 자손들이 미약하기 때문에 할아버지의 역사적 자료를 충분히 제공 못하고, 역사가 오류가 있는데도 고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드는데. 내가 생각을 해봐도 동학 포교를 할 때는 전봉준씨는 어디까지나 우리 할아버지의 수하에 있던 것이 사실이고, 또 증언 내용을 볼 적에는 전봉준씨는 동학에 독실했던 사람이 아니예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서당을 했다치면 자리를 잡고, 정착을 한 것도 아니고. 그 시대의 정치에 대한 불만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주민들을 대표해서 선두에 서서 그 시정을 요구했던 것은 사실이고. 그런데 그것이 자기의 역량으로 하다보니까 도저히 힘이 미치지 못하니까 여러 세력을 모아야겠는데, 그때 당시 정부에서 금지시키는 동학교를 등에 업고 해야 하지 않겠느냐 해서 우리 할아버지를 찾아다니면서 “이러저러한 부패가 있는데 우리가 이렇게 가만히 있어서 되겠습니까. 우리 국민으로서 어차피 피해다니면서 교를 형성하고 교세를 확장하고 있는 차에 이 기회에 나서서 정치를 바로잡도록 해주는 것이 좋은 것 아니요. 취지가 맞다고 하면 다같이 동참해서 힘이 되어 주시고, 접주님이 주관을 해주시오.” 이렇게 된 걸로 판단이 돼요. 그때 우리 할머니가 들은 얘기로는, 조부님이 “아직은 시기상조다. 지금은 때가 아니니까 더 있으면은 자연히 그럴 때가 닥칠 수 있다. 그때를 맞춰서 해야지 지금 해서는 안된다”하는 걸로 전봉준씨에게 늘 설득을 했다고 합니다. 그때는 양반 상놈이 있기 때문에 나이 차이가 있어도 우리 할아버지가 반말을 하고 전봉준씨는 꼬박꼬박 존대어를 했다고 합니다. 그때 우리 할머니가 술상이나 밥상을 내면서 들어본 것이 그렇답니다. 저는 할머니를 뵙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 아버님한테 들은 얘기지요.
그는 손화중의 역할에 대해 특별히 강조하는 얘기도 근거를 대며 이렇게 말한다.
육이오 무렵에 나왔던 『야담』이라는 잡지를 보니까, 빨치산들이 불질러 버려 지금 갖고 있지는 않은데, 무장기포에서 황토현 전투까지는 할아버지가 직접 지휘를 해서 승리한 다음에 그때부터 전봉준씨에게 대장군을 넘겨주면서 “전투에서는 당신이 다 관장을 하고, 그 자문을 나한테 얻어서 시행만 해라”하는 기록을 봤거든요. 해방 직후에서부터 육이오사변 날 때까지 동학에 가담했던 사람들이 많이 살아있을 때입니다. 그러니까 그때는 충분히 살아있는 사람들을 근거로 해서 소설을 썼지 않았겠느냐 하는 생각을 하지요. 그런 것을 미루어봐서는 황토현에서 정부군에 승리할 때까지는 절대적인 영향력이 할아버지한테 있었다고 생각돼요.
기록에는 3월 20일 무장에서 출발할 때 세 지도자의 이름이 나오고, 이어 백산에서 부서를 짤 적에 대장 전봉준 아래 총관령(總管領) 손화중으로 나온다. 그러니 이 말과는 어긋나는 점이 있으나 그 깊은 내막은 알 길이 없겠다. 또 흥선대원군과의 관련에 대해서도 흥미있는 비화를 전해준다.
할머니 말로는 우리 할아버지는 서울을 다니셨다는데 그 내용을 들어보면 대원군하고 직접 상면을 했다 그런 얘기가 있거든요. 민비와 대원군이 정권다툼이 심할 때 대원군이 동학난민들하고 손을 잡고 자기 며느리의 정권을 빼앗으려는 작전이 돼있지 않았느냐 하는 생각을 해요. 그때 대원군의 서신도 받아 갖고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없어져서 전해지지 않아요. 그런 것들이 말로만 전하지 전혀 근거가 없거든요.
흥선대원군과 농민군 지도자의 연계문제에 대해서는 지금도 학자들 사이에서 계속 논란을 벌이고 있다. 손화중이 체포당할 때의 일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우리 할아버지는 패전한 후에 광주 쪽에서 올라와 갖고 지금 고창군의 이씨 제각에 숨어계시다가, 백부님이 고창서 잽했으니 니가 자수를 안하면 너희 아들을 대신 처형을 하겠다 하니까 재실지기에게 “그대는 사람을 데리고 나를 체포한 걸로 해서 니가 나를 손목을 잡고 가라. 가서 신고를 하면 군수도 시키고 상금도 삼천인가 얼마 되니까 그거라도 타서 벼슬도 하고 살림도 해야 할 거 아니냐”고 말해서 고발했대요. 그 사람이 황해도 어디 군수로 갔다고 합니다. 우리 할아버지는 자수를 하고, 그 자리에서 자식이라도 살려줘야 할 거 아니냐 해서 그 대가로 백부님은 풀려나서 다시 피난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동학 난으로 인해서 우리 직계로 자식들의 인명피해가 하나도 없었어요.
실제 그 재실지기였던 이봉우는 ‘괴수’를 잡은 공로로 황해도 증산군수 자리를 받았으나, 곧 쫓겨났다. 이제는 그들 자손이 살아남은 이야기를 할 차례이다. 그는 조리있게 차분히 풀어나간다.
우리 집안에서는 동학 난이 일어나서 조부님이 선두에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은 아들들이나 누가 참여한 것이 거의 없어요. 다만 조부님이 일찍 장가를 가서 할머니하고 사이에 아들들을 일찍 낳았지요. 우리 백부님은 그때 이미 장가를 갔대요. 백부님이 아홉 살에 장가를 갔으니까. 중부님도 장가를 갔고 우리 중부님은 열 살에 장가를 갔으니까. 우리 조부님이 서른세 살 나이에 동학 난리가 있어났는데, 서른네 살 먹을 분이 며느리를 둘 봤다고. 우리 아버지는 그때 다섯 살인가 자셨어요. 고모님은 두 살이고. 그러니까 위의 형들은 장가를 가버리고, 아버님과 고모님은 애기였고. 그때가 1894년이지요. 동학 난이 나서 있을 때는 주위에서 부러워하는 집으로 있었지요.
손화중의 직계 자손은 어려서 참여치 않았으나 손화중의 동생 익중은 체포되어 이해 12월 25일 정읍에서 처형당했다. 또 손화중이 사는 마을에는 60여 호가 살았는데 손씨들이 40여 호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 손씨는 손여옥 등 여러 명이 농민전쟁에 가담한 것으로 나타난다. 아무튼 그 자손들이 살아남은 이야기를 참담한 심정으로 다음과 같이 전한다.
동학군이 패해서 역적으로 몰리니까, 할아버지는 어디 계신지도 모르고. 백부님은 백부님대로 처가 근방으로 피난을 가시고, 백부님의 처가가 고창군 대산면이예요. 우리 조부님이 포교하시던 곳이 현재 행정구역이 성속면이예요. 그 성속면하고 대산면하고 붙어 있어요. 내 생각에는 포교를 하면서 며느리감을 찾아가지고 큰아들을 결혼시키지 않았느냐 싶어요. 지금 같이 교통이 발달되어도 무장 성속면까지 들어가려면 힘이 든디, 여기서 거기까지 사둔을 삼을 턱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우리 중부님의 처가가 장성입니다. 거기도 틀림없이 포교활동으로 해서 맺어진 것 같아요. 우리 중모님이 울산 김씨거든요. 인촌 선생하고 당내지간으로 육촌누님인가 재종누님인가 될 겁니다. 그러니까 중부님은 중부님대로 처갓집으로 피난 가버리고 백부님은 백부님대로 처갓집으로 가버리고….
정작 그의 아버지는 기막힌 사연을 남기며 살아남았다.
할머니는 아버지하고 고모를 데리고 지금 옥구 지방으로 피난을 갔다고 그곳에서 식모살이했지요, 큰 농가에 가서 밥을 해주고 아버지와 고모님이 같이 얻어먹고 오년간을 그렇게 피난을 했습니다. 우리 아버님이 다섯 살을 먹어서 말을 할 수 있는 처지 아닙니까? 그러니까 주위에서 누가 성이 뭔 가냐 이렇게 물어서 손가라고 하면 할머니한테 죽도록 맞은 기억이 있다고. 어떤 마을에서는 할머니가 이가다 하면 이가라고 하고 또 다른 마을로 옮겨가서 할머니가 김가라고 하면 김가라고 하고. 이렇게 피난했다고 그러다 아버지가 열 살 먹던 해 고향으로 왔대요. 할머니가 데리고 왔겠지요. 그때는 삼가족을 멸한다니까 한 오년 정도 지나고 무마가 돼서 찾지 않으니까 우리 마을에 와서 다시 남의 방을 얻어 가지고 살기 시작했지요. 토지도 다 몰수되어가지고 없고, 집도 다 불질러버리고 없고. 그러니까 빈터에다가 움막도 치고 그렇게 살았다니까.
비록 고향에 돌아왔으나 처음에는 살던 마을도 들어오지 못하고 먼 마을에서 이 눈치 저 눈치 보며 살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어 손화중의 세 아들의 그 후 삶을 알려준다. 먼저 큰아들은 이렇게 살았다.
백부님은 한학을 많이 했는데, 그 이후로 천도교 맥을 잇기 위해서 정읍서 말을 타고 서울로 나다니셨다고 해요. 그러다가 1900년경 백부님은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백부님 아들은 그 사촌형님이 장가를 가가지고 설태를 못하고 일찍 죽었어요. 그 형수씨가 수절을 하고 한 육십 넘게 사시다 돌아가셨고. 그래서 백부님 손이 무해버리고 딸이 있었는데, 그 딸은 출가를 해서 손을 낳아서 지금 정읍에 살지요.
이어 둘째아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엮어나간다.
중부님은 그길로 방탕한 길로 들어섰지요. 그래서 왜정 때 경상도로 어디로 안다닌 곳이 없어요. 백부님이나 중부님은 제가 어렸을 때 봤지만은, 키가 이 미터가 다 넘어요. 웬만한 사람들은 한번 잡아서 내둘루면은 저 건너에 떨어질 정도로 힘이 셌습니다. 그러니까 중부님은 요새말로 하면 주먹 사이에서 산 거지요. 그래서 호남선 철도를 낼 때, 지금같이 기계화 되지 않고 전부 인력으로 되지 않습니까, 거기에 총감독을 했다고 그럽니다. 지금 현재 황등에서 이리까지 내려오는 구역의 총감독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거기서 돈을 무지무지 많이 벌었대요. 그래서 오입도 하고 아편도 하고. 중부님은 돈을 벌어가지고 와서 우리 마을에서 권세도 부리고 잘 살았어요. 그대신 본처를 보지 않고 계속 후처를 얻어 가지고 술도 팔고 아편도 하고 별짓 다해서 일류 기생들 데리고 놀고 그렇게 하시다가 일흔세 살 먹도록 까지 사시다가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그 양반은 아들이 없습니다. 본 큰어머니에게서 딸을 하나 낳고, 그 후로 방탕하게 다니다보니까 아들이 없고 딸만 있는데 외손들은 잘 살고 있습니다.
이제 셋째아들에 대해 말할 차례이다.
우리 아버지는 그 후로 그렇게 어려우니까 장가를 갈 수 있습니까? 삼십이 다 되도록 장가를 못 가고 스물아홉인가 장가를 가셨습니다. 어머니는 열아홉 살, 열 살 차이지요. 그렇게 어려운 처지에 있으니까, 좋은 규수가 나오지 않지요. 우리 외할아버지도 의병에 참여를 해가지고 전주형무소에서 돌아가셨는데, 이 딸만 하나 외롭게 친척집에서 컸어요. 소성면 애당리라고 하는데 거기에서 불쌍히 크는 처녀하고 결혼을 했지요. 어렵게 사니까 결혼할 상대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렇게 결혼을 해가지고 1919년에 저희 형님을 낳아 키웠지요. 그 후로 딸만 쪽 여섯을 낳고 그 다음에 나를 끝에 났지요.
그의 아버지는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무진 노력을 한 전형적인 한국의 농부였던 것 같다. 그리하여 이런 과정을 걸으며 이어져왔다.
집도 없이 장가를 그렇게 가고 하니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아버지도 일본놈들 소작을 많이 지었어요. 한 만 평. 아버님은 배우지도 못하고 무식헌게, 서당에 좀 다니고 해서 이름 정도 한자를 쓸 수 있고 한글은 독학을 해서 거의 읽을 정도지요. 우리 아버지가 열심히 일을 해서 왜정 때는 머슴을 두엇씩 두고 살 정도로 살았어요. 왜놈들한테 자작을 다 빼앗겨버렸으니까. 소작을 하고 소도 키우고 해서 잘 살았어요. 그 이후로 보니까 아버지도 형님[현 76세]을 왜정 때 일본학교까지 보내고, 형님은 사회활동을 못하고 농사만 짓고 살아요. 그 이후 육이오사변이 나서 그때 분배농지도 있고 해서 피난댕기면서 전부 팔아버리고 또 우리가 빨치산한테 주목 받고 피살대상자로 되어서 피난댕기면서 다 없애버리고 결과적으로 어려운 과정에서 나 같은 사람은 학교 진학을 못할 정도였지요. 아버님은 일흔네 살 자셔서 61년도에 돌아가셨어요.
마지막으로 이런 이야기를 덧붙이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얘기도 하대요. 어떻게 그 어려운 상황에서 자손들이 하나도 상하지 않고 살았느냐? 이거 진짜 유족이 아니지 않느냐? 그런데 공교롭게도 우리 할아버지의 직계 자녀들은 하나도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이야기지요.
지금 손홍렬씨 자녀들은 고등교육을 받고 또 살림도 그런대로 꾸려 나간다. 다만 할아버지의 가묘를 음성골 뒷산에 부부합장으로 만들어 놓고 이런저런 이유로 비석 하나 세우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리고 유족회 부회장으로 선양사업에도 열심히 거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