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연락처
기념재단
TEL. 063-530-9400
박물관
TEL. 063-530-9405
기념관
TEL. 063-530-9451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사료 아카이브 로고

SITEMAP 전체메뉴

증언록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무장 거괴로 지목된 김규일, 증손 재훈
대상인물

김규일(金圭一)

1843~1894. 본관은 청도. 자는 자범(子範), 별호는 병운(丙云). 전북 고창 출생. 동학농민전쟁 당시 무장지역에서 크게 활동하다 체포되어 1894년 12월 12일 52세의 나이로 효수됨.

증언인물

김재훈(金在焄)




1937~ . 김규일의 증손. 1986년 셋째 아들 세진의 분신자결을 계기로 재야단체에 적극 참여하고 있으며, 현재 한세전자(주) 회장과 동학농민혁명유족회 부회장을 맡고 있음.



가계도
가계도 이미지
정리자

김양식

출전

다시피는 녹두꽃

내 용

전라북도 무장은 동학농민전쟁이 시작된 곳으로, 동학농민군 3대 지도자의 하나인 손화중의 지역적 기반이었다. 즉 1894년 1월 10일에 일어난 고부 농민항쟁의 패색이 짙어지는 3월 중순경에 전봉준은 휘하 농민군을 이끌고 무장으로 갔다. 여기서 전봉준은 손화중을 설득해 본격적인 농민혁명을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3월 16일에는 이미 통문을 받고 수천 명의 농민군이 무장 동음치면 당산으로 집결하였고, 20일 경에는 무력봉기를 알리는 포고문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조선 전역을 피로 물들게 한 농민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김규일은 바로 이같은 무장에서 크게 활동하였는데, 이는 “적괴(賊魁) 20명을 12월 12일 체포하여 그 가운데 김병운(丙云, 김규일의 별호)은 효수하고 박경석(朴京錫)은 물고(物故)하고 송진팔 외 18명은 영광군으로 보내어 경중에 따라 처분케 하였다”는 기록에서 확인되고 있다(『동학란기록』하, 709쪽). 효수되었다는 것은 그가 농민군 지도자로서 크게 활동했다는 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 김병운이 나중에 족보에 올릴 적에 김규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그에 관한 기록의 전부이다. 그렇지만 현재 그의 증손인 김재훈이 생존해 있어, 그에 관한 더 많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살던 곳은 ‘무장현 하이면 고산(현 고창군 상하면 장암)’이었다. “증조부께서 사시던 옛집은 일제시대 신축하여 없어졌고, 새로 지은 집이 여섯 간 겹집이고 행랑채를 갖추었음에도 오십여 평의 넓은 마당이 있으며 앞에 오십여 평의 채소밭이 별도로 갖추어져 있고 뒤로는 이백여 평의 넓직한 대나무숲이 우거져 있고 그 앞에 동백나무가 세 그루[당시 정원수로 추정됨]가 심어져 있습니다. 장군산을 배경으로 대나무숲에 포근히 싸인 정남향의 넓은 집터[총 사백여 평]의 규모로 보아, 당시로서는 살림의 규모도 꽤 컸을 것으로 보입니다.” 집터에 대해 설명하고 이어 재산 정도를 이렇게 말한다.

집안에 전해오는 말로는 할아버지가 피난 오시기 전에 무장에서는 부자였는데, 농민전쟁 후 도망오면서 돈이고 뭐고 우물에 다 집어넣고 왔는데, 그래서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후일 가보니 전부 가져가고 우물도 없어졌다고 합니다.

김규일이 출생하여 성장한 무장 장암은 농민군이 처음 집결해 무장한 뒤 농민전쟁의 깃발을 올린 무장현 당산 구수마을과 인접한 곳이었다. 무장으로 그의 13대조 여의(麗儀)가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정착한 뒤 세거해 온 김규일 집안은 그의 가계나 집터의 규모로 보아도 그렇고, 그의 아들이 성균관에 출입한 것으로 미루어볼 때 부유한 양반층에 속하였다. 이러했던 그가 52세 되던 해에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여기서 농민군 지도자로 활약하게 되는데, 이에 관해서는 후손들도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집안에서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했다는 것은 절대 금기사항이었으며, 특히 여인들에게는 발설치 않았고 수락할아버지[김규일의 아들]는 함구로 일관하셨습니다. 무장에서 풍비박산하여 헤어졌던 규일 할아버지의 동생의 후손들이 후일 피신처인 정읍 장재동에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동학농민전쟁 가담 사실이 은밀히 알려지게 되었습니다.”라는 김재훈의 증언은 김규일의 활동내용이 왜 자세히 전해오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말해주고 있다. 농민군으로 활동한 사실을 숨겨야 했던 과정, 그것은 지난날 우리의 어두웠던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다행히 김규일이 농민군으로 크게 활동하다 효수된 사실은 다음과 같은 증언에서 확인되고 있다.

증조부 할아버지께서 사시던 동네에 살고 계시는 먼 일가되는 김재성[在星, 84세, 장암리 거주] 씨가 할아버지의 추모비 건립시 할아버지 생가를 방문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일제시대에 옛 집을 헐고 새 집을 지을 때 땅을 파니 항아리에 담겨진 엽전이 몇 자루나 나왔고 본인도 직접 엽전을 줄에 꿰었다고 하였으며 이때 땅 속에서 화살촉도 나왔다고 합니다. 이는 당시 군자금으로 마련하였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전해오는 얘기로 손화중과 교류했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할머니에게서 들은 얘기로는 난리 때 가족들이 장독 속에 숨었는데, 관군들이 와서 일부 장독만 깨고 숨어 있는 가족들은 찾지 못하고 그냥 가더랍니다. 당시 장독이 많았는데, 열 가마들이 장독이 십여 개[애들 오륙 명은 들어가는 크기]나 되었고 이러한 독은 육이오 때는 땅에 묻고 방공호로 사용하기도 했답니다. 또 당시 농민군을 죽일 때는, 나무에 묶고 볏짚단으로 감아 불을 놓아 죽였다고 합니다. 증조부는 효수당했습니다. 무장관아에서 효수됐는데, 할머니께서 머리만 갖다가 선산에 묻어 놓으시고 도망하셨다고 합니다. 그전에는 겁이 나서 못 챙기고, 1972년에 정읍[정읍군 정우면 우산리]으로 이장할 때 보니까 실제 머리만 있었습니다. 장암리에 거주한 도강 김씨인 김재중 씨라고 계시는데, 그 어머니가 청도 김씨이고 규일 할아버지가 친정아저씨 뻘 됩니다.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할아버지를 동네에서 김대장, 동학대장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수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먹을 것도 대주고 했다고 부자이고 기골이 장대하며 인품이 좋았다고 하면서 친정 자랑을 했다고 합니다.

이상을 종합해 보았을 때 김규일은 손화중 포(包)에 속해 있으면서 군수곡이나 군자금을 조달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12월 12일에 체포돼 효수되었는데, 머리 부분만 어렵게 수습해 무덤을 쓸 수 있었다. 그가 체포된 것은 상놈이나 하는 동학에 가담해 집안 망하게 만든다고 이웃 동네에 사는 일가 친척의 밀고로 붙잡혔다고 한다. 이는 후환이 두려워 또는 상금에 눈이 어두워 또는 그동안 농민군에 당한 것을 보복하기 위해서 피신해 있던 농민군을 밀고한 경우가 많았던 예에 비추어볼 때 타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김규일이 효수되자 그의 집안은 일시에 풍비박산되었다. 그의 둘째동생 두일은 형의 죄에 연루되어 잡혀서 매맞고 옥살이를 하다 출옥해 병에 시달리다 죽었고, 농민전쟁에 동참하였던 막내동생 천일은 형이 효수된 뒤 농민군으로 따라나가 시신조차 돌아오지 못한 불귀의 고혼이 되었다고 한다. 이때 집안을 지키던 여성들의 억장은 무너지고 또 무너져 내렸으리라.

할머니께서는 할아버지의 머리만을 선산[장군산]에 묻고 아들과 자부를 데리고 야밤에 도주하여 고부 북면[현 정읍군 북면]의 칠보산 밑 가정리에 숨어살았는데, 이때 임신중이던 자부가 엄동의 산중 눈 위에서 출산하기도 하였습니다. 거기서 일년여 산 뒤 지금의 정읍 장재동으로 옮겨 정착하였다고 합니다. 김재섭[金在攝, 69세, 서울 관악구 봉천 11동 궁정아파트 205호]씨에 의하면, 그의 할아버지 수종[秀鍾, 규일의 조카이고 수락의 8촌형]씨가 안내하여 칠보산[보림산] 밑으로 도피시킨 뒤, 평소 친분이 있던 박영효에 부탁하여 신분을 보장받고 그의 주선으로 정읍[금구?] 거부인 장부자의 신변 보호와 재정 지원을 받아 안전히 장재동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일설에는 선운사 근처에 선산이 있는 서울 민대감 댁의 주선으로 정읍으로 이주하였다고 함].

이리하여 규일의 직계가족은 무사히 정읍에 살 수 있게 되었는데, 특히 집안이 다시 복구될 수 있었던 것은 김규일의 장자 수락이 성균관에 출입하고 높은 학식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본이 조선을 강점한 을사조약과 경술조치 이후 수락은 고향으로 내려와 보림산 밑에 석련당(石蓮堂)을 짓고 은거하면서 후학을 기르는 데 전념하였고 그의 다섯 아들로 하여금 신학(일본학교)을 못하게 하고 한문만 가르칠 정도로 일본과 신학문에 부정적이었다. 이러한 집안 내력을 증언하는 김재훈은 만감이 교차되면서 잊을 수 없는 아픔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의 두 아들이 1970, 1980년대 민주화운동에 깊이 관여된 데서 비롯되었다. 그의 큰 아들 갑진은 YWCA위장결혼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고, 막내 세진은 서울대에서 학생운동을 하다 1986년에 분신자결한 장본인이기도 하였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그의 집안 전통인지도 모른다. 그의 12대조 응룡(應龍)은 임진왜란 때 두 동생들과 사위 또 친척들을 데리고 의병에 가담하여 행주산성에서 형제가 전사하였고, 그의 증조부는 농민군으로 활동하다 순절하였으며 그의 막내 아들은 꽃다운 나이에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아들의 죽음은 그의 부부에게 큰 충격이었다. 이를 계기로 그의 부부는 아들의 뜻을 이어받아 재야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1980년대 후반 통일과 사회개혁을 위해 ‘한겨레사회연구소’를 만드는 데 참여하고 군부독재의 실상을 폭로하기 위해 『자유언론』을 발행하였으며(2년간), 현재는 유가협, 전국연합자통위원, 서울연합자통위원장, 한사연 이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 그의 부인 역시 민가협 운영위원, 평화통일을 여는 사람들 공동의장을 지내면서, 농민군으로 활동한 시증조부의 뜻을 받들겠다고 열심이라 한다. 끝으로 고창군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는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맞아 1994년 5월 1일 김규일의 생가 마을 입구에 ‘갑오동학의사 김선생 추모비’를 세웠는데, 비문의 일부를 옮겨보면 아래와 같다.

무릇 애국선열을 우러러 흠모함은 애국애족의 대의를 위하여 신명을 함께 다하였기 때문이다. (중략) 선생은 1843년 10월 12일 당시 무장현 하이면 장암리에서 부 이진(以珍) 모 이천 서씨의 아들로 태어나니 기우(氣宇)가 활달하고 행의(行儀)가 탁이하였으며 효우(孝友)의 성(誠)이 돈독하였다. 정훈(庭訓)으로 가업을 이었으나 때마침 어지러운 세태에 뜻한 바 있어 불구문달(不求聞達)하고 일찍이 동학에 입도하여 대접주 손화중과 교역(敎役)으로 동사(同事)하였으니 오직 제세구민(濟世救民)만이 그의 뜻이었다. 갑오동학농민혁명 거사에 사재로 군수전을 출연(出損)하고 계제(季弟) 천일(千一)과 함께 동지를 이끌고 출전 하였으나 외세의 개입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갑오 12월 12일 무장현아에서 최후를 마치니 향년 쉰둘이었다. (중략) 갑오 거사 후 백주년에 이르러 역사적 재평가와 통한의 신원이 이루어지게 되었으니 역사의 필연적인 귀결이라. 고창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선생의 높은 뜻을 기려 고향에 추모비를 세우게 되었음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하략)”

이 페이지에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도를 평가해 주세요. 여러분의 의견을 반영하는 재단이 되겠습니다.

56149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742 TEL. 063-530-9400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문화체육관광부 전라북도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