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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록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함평의 삼형제 농민군 장경삼·옥삼·공삼, 증손자 원석
대상인물

장경삼(張敬三), 장옥삼(張玉三), 장공삼(張公三)

1842~1894. 본관은 흥성(흥덕). 족보명 헌규. 함평군 신광면 개천리 사천부락 태생. 여기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괘치마을로 이사. 이조참판 장이길(張以吉)의 11대 손. 장이길은 1562년에 무과급제. 장성현감을 시작으로 이조전랑, 대사간, 우부승지 역임.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낙향해 있다가 임금의 의주 파천시, 전주로 내려올 것을 상소함. 공홍도 관찰사 제수.
학문에 뜻을 두고 과거에 여러 번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내려와 향교의 장의 등을 지내다가 농민전쟁이 일어나자 함평의 접주 이화진의 권유로 가담. 접주로서 고막교 전투(11월 1일) 등 주로 나주와 함평 일대에서 활약. 부상을 입고 피신하다가 체포되어 1894년 12월 9일 함평에서 처형됨.

증언인물

장원석(張源錫)




1851~1895. 족보명 동규. 형인 장경삼을 도와 병력동원과 군량미 조달을 위해 가재를 털었다 하며, 피신 도중 체포되어 2월 17일 함평에서 처형됨. 함평 대접주 이화진은 장옥삼의 처남.
1854~1895. 족보명 응규. 형들과 함께 괘치마을 앞에서 군사를 조련하는 등 농민전쟁에 적극 가담. 이후 괘치마을 앞의 들판을 삼정들로 부르게 되었다 함.
1941~ . 장옥삼의 증손자로 광주미화 전무로 재직 중이며 동학농민혁명유족회 부회장으로 활동중.



가계도
가계도 이미지
정리자

배항섭

출전

다시피는 녹두꽃

내 용

무장에서 기포한 농민군들이 함평에 들어온 것은 4월 16일. 그러나 장경삼 형제들이 이때 곧바로 농민전쟁에 가담한 것은 아닌 듯하다.

그전에는 동학에 입도한 적도 없고, 바로 우리 건너 동네 이화진 접주도 함평이여, 내 증조할아버지의 처남이니까, 진외갓집 할아버지지요. 자기 힘으로 농민군이 규합이 안되니까. 그 시기는 확실히 모르지만, 아마 일차 봉기 말쯤 되는 것 같아. 그때부터 가담을 했어. 바로 처음에 가담한 건 아니지요. 교도였다면은 처음부터 했을텐데. 그분들의 생활이나 자기의 신분이 경삼씨는 나이 어려서 함평 향교 장의를 한 사오년 보시고, 향교 증축을 하고 그랬어. 옛날에 젊은 나이에 주들 않는데, 그 양반의 인물됨이 훌륭하고 그러니까 그렇게 해주셨다고 어른들이 얘기하시대요.

아주 건강하고 체구도 컸다는 이들이 농민전쟁에 가담한 것은 이보다 얼마 뒤 장성 전투(4월 23일)가 끝난 무렵이었고, 활동은 주로 나주와 함평 일대에서 하였다.

어렸을 때 들어가지고, 여러 군데 전쟁허는 데도 갔다고 어른들이 말씀해주셨지만, 어디어디냐고는 안 물어봤어. [가담한 게] 장성 전투 끝난 후인 것 같아. 장성 끝난 바로 후쯤 될 거예요. 그런데 우금치까지는 안 가시고, 함평하고 나주하고 이렇게[활동하였다]. 괘치마을 앞에서 훈련을 했는데, 아흔 몇에 돌아가셨습니다만 임춘택씬가 그 양반이 말씀을 하세요. 자네 증조부들 삼형제가 이 들에서 훈련을 했다고 해서 지금도 삼정들이라고 허네. 그래서 알았어요. 나름대로의 활동은 상당히 크게 하신 것 같아요. 그러니까 재산도 상당히 많이 갖고 살으셨으니까 내 증조 옥삼씨께서 사람 규합하는 것과 군량미, 자금을 모으는 일을 하셨던 것 같아요.

이들이 가담한 데는 함평의 ‘거괴(巨魁)’로 알려진 이화진의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화진은 바로 장옥삼의 처남이기도 했는데, 병력을 많이 동원하기 위해 재산도 있고 향교의 장의를 지내는 등 명망도 있던 장씨 형제들을 끌어들인 것이다.

곡수를 많이 받고 살았다는 얘기만 들었어요. 부유한 편이니까 과거보러 댕기고 그랬겠지요. 어쨌던 경삼 할아버지께서 과거급제를 하러 가셨다가 동학 난이 일어나 세상이 시끄러운게 그해 봄에 돌아오셨어. 이화진씨가 자기 힘으로는 그 지역에서 농민군을 규합할 수가 없으니까, 힘이 있는 경삼씨를 불러들인 거여. 그러면서 자기 지명으로 접주로 명을 해했어.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을 모집해서 사천 부락 바로 위에 괘치마을 앞의 들녘에서 군사훈련을 했다고 그래요. 아무래도 농민군들이 모였더래도 훈련이 좀 돼야지 않겠어요. 그렇게 해가지고 삼형제가 훈련을 시키고 규합하고 그랬어. 집에서 가산을 털어먹고 그러고 수천 명을 데리고 나가서 고막천[나주와 함평 경계를 이루는 강]에서 훌륭한 전쟁을 했고.

삼형제가 함께 농민전쟁에 가담하였던 만큼, 증조부에 대한 장원석씨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그래서 농민전쟁에 관한 자료에 형제분들이 안나오는 데 대해 불만도 없지 않았다.

장경삼의 형제들은 증조부님이 삼형제입니다. 장경삼, 장옥삼, 장공삼 이분들이 다 가담하셨지요. 저는 옥삼씨의 증손자입니다. 그런데 전쟁사에 나온 것이 무안 배상옥씨만 나온단 말이여. 우리 할아버지는 안 나와 부러. 그런데 그 양반보다 더 많은 병력을 이끌고 가서 더 허셨단 말이여.

일심동체가 되어 함께 활동하였던 삼형제가 최후를 맞은 곳도 같은 곳이었다.

어려서 어른들한테 들은 얘긴디, 일본군이 참전을 해부럿다드만요. 그런 게 그 총에 못이겨서 무안읍에 가서 전쟁을 할 때는 경삼 할아버지께서 많은 화상을 입고, 부상을 입었어. 그래서 피신할려고 고향으로 올라오면서 잽혀버렸거든. 옥삼씨는 바로 형님 따라서 오다가 부상을 입어 잡혀버렀고. 공삼씨도 그랬고. 그래갖고 우리가 제사모시는 날이 정확한지 어쩐지 모르겠어요. 경삼씨는 12월 9일날이고, 두 형제분은 그 이듬해 2월 17일날입니다. 전부 함평현에서 옥사를 했지요, 세 분이 다. 총살을 했는지 칼로 짤라부럿는지 잘 모르지만, 듣기로는 총살을 한 것 같아요.

함평에서 처형된 세 분의 시신은 다행히 문중에서 수습을 했지만, 이후 남은 가족, 친지들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시신은 우리 문중이 많으니까 그렇게 해서 죽었다 하니, 함평 아전들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거 끄집어내서 이렇게 해줄테니 너희가 인수해가라 해서 시신을 마을 앞에다 갖다 모셨대요. 우리는 피신해서 도망다니며 사니까 모르고. 그러니까 우리 문중에서 해준 거죠. 가까운 집안에서는 못하고 먼 일가들이 그 마을에서 한 육 키로 정도 떨어진 손불면에 사시는 분들이 계셨는데, 그분들이 와서 하셨대요. 그래가지고 날짜가 지난 후에 우리가 정신을 좀 차리고 나서, 말을 듣고 여그는 너희 큰할아버지고, 여기는 둘째할아버지고, 여그는 셋째할아버지다, 그렇게 모셔다 선산에 다시 모셨대요. 우리는 다른 성씨들보다 피해를 많이 입은 것이 완전 가산을 전부 몰수해 가버렸거든, 선산까지 싹 몰수해 가버렸습니다. 경삼씨로 해서는 육대조의 선산까지 파묘해 가버렸어. 그런 몰락을 줘버렸습니다. 그 당시 장씨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우리가 그렇게 남에게 인심을 잃은 집도 아닌데, 하여간 피해를 고렇게 입어부럿어. 가장 중요한 것이 큰집인 경삼씨가 살으시던 집을, 얼마나 좋게 지어 살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뜯어다가 함평현의 객사를 지었다고 그래요. 객사는 여러 채 아닙니까? 어느 한편을 보수 하는데 뜯어다 썼는지 어쩐지 몰라도 어른들한테 그렇게 들었어요. 큰 집은 나주 문평면으로 도망을 했구요. 우리는 영광 불갑으로 도망을 갔고. 셋째 할아버지네도 나주군 문평면 명동리라는 데로 도망을 갔습니다. 큰할아버지는 아들이 육형제였고, 둘째할아버지께서 난리가 막 끝난 후에 이도재 씨가 감사로 왔어요. 그런데 이도재 씨하고 경삼할아버지하고 아주 친굽니다. 과거보러 다니면서 친구가 됐어. 이도재씨도 여러 번 낙방을 한 모양이드만. 그런데 그 양반이 함평에 관찰사를 오셨어요. 그래서 전부 사면을 해주고 글 안했습니까? 민정을 순찰하면서 전부 정리를 했지. 그때 경삼할아버지의 둘째아드님께서 거기를 가 사면을 받았어. 농토를 싹 뺏겨버린 놈을, 몇백 마지기 되는 논을 다시 물러주고. 선산도 파묘는 당했더라도 다시 찾아가거라, 해서 다 줬는데. 그때 가서 심의한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는 아전도 들었을 것이고, 함평 읍내 거시기도 들었을 것이고, 뭣도 들었을 것이고, 이 사람들이 그랬겠지 하는 생각만 합니다. 함평서 영광으로 가는 재를 가마를 타고 막 넘어가는데, 오늘날로 말하면 테러지, 이 사람들이 몽둥이로 때려서 그 둘째아드님이 현장에서 즉사해버렸어요. 그리고 돌려준 거[농토와 산] 다시 가서 없애버렸으니 우리는 받을 수가 없지요. 그래서 완전히 집안이 몰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경삼할아버지의 손자들은 서울 가서 살고 있고, 옥삼할아버지의 후손은 함평, 전남 지역에 살고. 공삼 할아버지의 후손들도 서울 가 살고.

전쟁이 끝난 뒤 도망을 가는 통에 친정에 맡겨두었던 이불까지도 다 뺏기는 고통이 따랐다.

그런데 내 조모님이 그때 시집오셔서 살았는데, 조모님 말씀이 집을 비우고 피난을 가게 되어서 금고에 남아 있는 돈을 증조할머니하고 당신하고 고부끼리 집 뒤의 밭에다 흐쳐버렸다는 거여. 그리고 이불이여 뭐여 이런 것은 모다 묶어가지고 마을 너머에 당신 친정이었는데, 그 친정집 일가 되는 데다 맡겼다. 그런데 석 달 후에 돌아와서 이불도 좀 달라고 하구 돈도 있는가 해서 가보니까 없고. 이불도 관에서 뺏어가 버렸다고 하고 안 주드라는 거야. 그때 나주에 사시면서 우리한테 한 말이여. 혹시 거기 가거든 그놈들하고는 말도 하지 말고 살아라, 당신 친정인데. 청송 심씬데 마을이 약 구십여 호 이상 되는데, 그 마을에 한 집도 다른 성씨는 안 살거든요. 그런데 자기 친정마을 심가 놈들하고는 말도 하지 말고 살라고 신신당부를 하시더라구. 그 아무것도 없이 되야불고, 잘살다가 하루아침에 거지가 되야부르니 가서 이불도 맽겨놨으니 좀 달라고 해도 이불 한 채도 안 줘부르드라 이것이여. 그렁게 친정에 한이 맺혀부럿지. 당신 부모한테 맽겨놨으면 그러지는 않았겠지.

그 후로도 고향땅으로 돌아가지는 못했고 그곳에 남아있던 일가붙이들도 삼형제 분 때문에 피난을 갔다고 한다.

고향으로 못 갔지요. 좋은 곳으로 가서 고생고생하다가 요즘에 와서 생활 기틀이 잡힌 것 같아요. 요즘에 와서야 잘잘한 공무원들도 생기고, 의사도 있고 타지역에 가서 전부 일하고 살았지요. 옛날에 농업시대에 어디 가서 다른 거 하겠습니까? 글만 배운 사람들이. 장사도 못하지. 영광으로 간 데는 거기 우리 일가들이 많이 살고. 나주에도 우리 일가들이 많이 있어요. 그런 친관계로 피난을 가셨지요.

이렇게 재산은 다 뺏기고 온통 도망을 다니느라고 자식들을 제대로 돌볼 수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저희들 아버지 이 어른들이 피해를 보신 겁니다, 증조할아버지들의 손자. 당신 아들들은 당신들이 가르쳤으니까 괜찮애. 그런디 손자들은 못 가르쳐 버렸지. 손자들이 벌어가지고 증손자들을 가르쳤어요.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이제 농민전쟁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지고, 농민군이 ‘복권’되고 후손들의 증언을 기록으로 남기는 데 대해 기대가 크다.

저는 금년 들어서 다시 복권이 된다, 이런 운동을 거국적으로 해주시니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생각을 하고 있지요. 그런데 그 이전에 벌써 몇 년 전에 그 한계를 어디다 둬서 독립군으로 하고 안한다는 것을 제가 들어서 알고 있어요. 그래서 앞을 잘라버리고라도 복권을 해야 하는 것이 자손된 도리가 아니냐 하는 생각을 누차 해왔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광주일보사나 여러 곳을 다녔어요. 전대 송기숙 교수께서도 동학사에 대해서 책을 쓰시고, 지금 전남일보 편집국장하시는 문순태씨 그 양반도 거기에 대해 쓰셔서, 그 어른들한테 가서도 논의를 수없이 했습니다. 그런데 뭣이 그렇게 잘 안되더군요. 그러다가 이이화 선생님을 뵈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하자고 해서 서로 협력을 하고 상황이 거기까지만 오고 있습니다. 인제 기회를 만들어가지고 서울 가서 세심하게 노력을 해서 나름대로 기록을 정리해서 냄겨놔야 않는가 하는 생각은 하고 있어요. 함평읍지나 정읍 최현식씨가 쓴 책에는 기록이 조금 있어요. 옥삼씨나 공삼씨는 몰라도 경삼씨는 기록이 있어요. 재판관계는 잘 모르겠어요. 있어도 만일 그걸 함평에 뒀다면, 육이오 때 관공서고 뭐고 하나도 두지 않고 불살러버렸거든요. 그래서 그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을 겁니다. 함평에는 12월 9일날 처형당한 할아버지는 몰라도 그 이듬해 2월 17일날 돌아가신 할아버지들이 재판기록이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요. 그런데 재판기록이 경찰서고 군청이고 관청이라고 생긴 곳은 싹 불질러버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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