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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록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농민군 3대 장군 김개남, 손자 환옥
대상인물

김개남(金開南)

1853~1894. 본관은 도강(道康). 본명은 영주(永疇) 또는 기범(箕範). 그리고 이릿이가라고도 함. 태인현 산외면 동곡리(지금의 정읍군 산외면 동곡리 원지금실)에서 태어남.
김개남은 농민군 남접의 3대 지도자로 꼽히며 무장 고부봉기 단계에서부터 참여했음. 그가 태어난 고장과 일가들이 농민전쟁에 대거 참여하였고 또 “기범은 스스로 말하기를 꿈에 신인(神人)이 ‘개남’ 두 글자를 손바닥에 써서 보여주었기 때문에 이름을 ‘개남’으로 고쳤다”고 함(『오하기문』). 전주강화 이후에는 7월부터 남원을 차지하고 전라좌도를 호령하였으며 2차 봉기 때 전봉준과 달리 독자노선을 걸어 청주공격에 나섬. 그 후 태인 산내면 종송리에 있는 매부 서영기 집에 숨어 있다가 친구 임병찬의 고발로 전주에 있는 강화영의 중군인 황헌주에게 잡혀 불법으로 전주 서교장에서 처형당했음.

증언인물

김환옥




1919~ . 김개남의 손자로 지금 김개남이 태어난 집 아래에 살고 있음.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았고 본인의 말로 일자무식이라고 함.



가계도
가계도 이미지
정리자

이이화

출전

다시피는 녹두꽃

내 용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대부분 할머니에게서 들었다며 “우리 할머니가 아흔 살에 돌아가셨어. 그런디 무릎팍에다 앉혀놓고 다 얘기를 해서 내가 죽 외아. 허망한 소리지”라고 하였다. 할머니가 오래 살았기 때문에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충분히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허망한 소리”라는 말로 과거사에 대해 별로 집착하지 않는 듯했다. 농민전쟁에서 김개남이 한 역할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소년 김개남은 어릴 적에 서당에 다니면서 경서보다 『육도삼략(六韜三略)』 같은 병서(兵書) 읽기를 좋아했다 하며 청년시절에도 서자나 가난한 사람들과 사귀기를 좋아했다(김동기의 증언). 소년 김개남은 무척 개구장이었던 모양이다. 고만한 또래의 아이들을 데리고 ‘서리’를 하는데 여느 아이들과 달리 닭서리, 참외서리, 콩서리 보다 ‘돼지서리’를 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할 적에 환옥은 아주 은밀스런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 “우리 할아버지가 남원에서 도지사했다여. 전봉준이가 뭐 알아. 우리 할아버지가 앞장서라고 시킸디여”라고 말한다. 어디 김개남의 남원(전라좌도) 통치가 도지사에 비길손가. 그는 김개남의 사람됨과 활동에 대해 이렇게 전한다.

우리 할머니가 들려주더랑께. 우리 할아버지가 쌀을 팔아가지고 있는데, 비가 새벽부터 쏟아져. 가마솥이 일곱 발이래, 돌아가면서 그 밥을 헌게 수천 군사를 다 먹이지. 그걸 알아야 혀. 이런 양식을 다 없애버리고, 할아버지보고 할머니가 하는 소리지. 당신은 서울 가버리면 끝나는디 우리 새끼들을 어떻게 먹여? 응 그려 그려. 할머니가 종 두 명을 두고 밥 마라[밥 하지 마라] 그랬대. 그러자 할아버지가 비오는 마당에 나가 무릎꿇고 앉아, 사모님 뵙시다 그런다 말이여. 그걸 보고 할머니가 버선발로 뛰어나가 영감 내가 잘못했다고 그랬다는 거여.

그의 할머니가 어렵사리 목숨을 건지고 살아나서 할아버지에 대한 평가를 이렇게 하였다 한다.

할머니가 피난할 적에 도강 김간디 박가로 성을 바꾸고 피난했다고 혀. 그때 도강 김가라고 말하면 모다 잡아다 죽이는디.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도 우리 할아버지보고 좋은 소리 한나 안혀. 이 골짜기서 논 마흔닷 마지기 지어가지고 사는디 십만 군사가 뭣이여. 십만 군사를 일주일 먹인게 마흔다섯 마지기 농사가 하나도 없드래. 그러다 군사가 떠나는디 금산면으로 말을 열몇 필 가지고 가서 쌀을 팔어 왔는디 내일 아침이면 조반 먹고 떠날 참이여. 내일 새벽부터 비가 퍼붓어. 그런게 할머니가 복이 없응게 영감 마흔셋에 죽고 “내가 종을 두셋이나 두었단다”고 말해. 편하면 느그 한아씨라 그러고 안 편하면 니 할아배라 그려.

이로 보아 김개남의 집에서도 농민군이 들끓었던 것 같고 재산도 활동할 당시 탕진하였던 것이다. 김개남이 잡혀간 뒤 그의 할머니는 이렇게 살아남았다.

청음면 성밭이라고 있어. 거기가 할머니 친정이여. 친정에 간게 당신 조카들이 그동안에 어떻게 피난했소? 여기에 계시라우. 고모부가 잽혔으면 내가 연락해줄 테니 그렇게 아시요. 그러고 지내다가 우리 할아버지가 잽혔다고 당신 조카들이 알려줬대요. 그래서 나갈라니 일본놈들이 막 쥑일라고 하니 못나갔지. 조카들이 가만히 계시요 하니, 그럼 “너희들이 수습을 해놓고 나한테 연락을 해라”고 일렀대야. 우리 할머니가 국문을 잘 하거든, 나는 무식하지만. 써놓고, 참 기가 맥혀, 이 일이 안되면 나 차라리 죽을란다. 우리 새끼들은 남 밑에 줘버리고 나 죽을란다. 조카들이 밥 갖다주면서 고모님 가만히 계십시요, 고모부는 잽혀서 벌써 죽었응게 가만히 있어라우. 인자 그래도 저쪽 할아버지땜이 할머니도 잽히면 죽거든. 아 그렁게 임실 가면 지금도 개남이 장군 손이 어디 있냐고 어떻게 살았냐고 그래.

그의 아버지는 당시 아홉 살. 그러니 불법으로 처형된 김개남의 시신을 찾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김개남은 같은 고을 산내면 종송리 매부집에 숨어있다가 이 마을에 사는 친구 임병찬의 고발로 잡혀 전주에 끌려왔다. 그리고 감사 이도재에 의해 서교장에서 효수당했고 이어 그 머리는 서울로 보내져 조리돌려졌다(『오하기문』3필). 어느 때인지 할머니와 어린 아들이 다시 모여 살림을 꾸렸으나 남은 재산은 거의 없었고 이웃과 일가도 경원시하여 참담한 삶을 꾸렸다는 정도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일가가 얼마나 핍박받았는지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 큰한아버지가 우리 한아버지가 몸을 피했다고 여기서 자살했어. 묘가 뒤에 있어. 일전에 파갔어. 김개남 장군은 둘째지[사실은 셋째]. 참말로 기가 맥히지. 여태까장 내가 그 소리 안했어. 우리 큰한아씨가 동생이 그렇게 됐는데 내가 살아서 뭣하냐고 하면서 자살했어. 우리집도 참 우리 한아씨 때부텀 참 똑똑한 사람이 많았어.

족보에는 김개남의 큰형 영백은 1895년 7월, 작은형 영수는 1897년 4월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처지였으니 “우리 한아버지가 읽던 책이 많았는데 우리 아버지가 싹 마당에 놓고 태워버렸어. 내 어릴 적에 눈으로 직접 보았지”라는 말도 들려준다. 그 자신은 이 동네에서 태어나서 그의 아버지처럼 무서운 고생을 했다고 말한다.

고생한 것 들을 것도 없어. 기가 맥히지. 넘이 세 끄니 먹으면 나는 두 끄니만 먹고. 나는 그래도 살았지만, 어머니 아버지가 고생이 심하셨지. 학교는 뭐여. 나는 일자무식이여. 대놓고 이게 죽이라나 살릴라나 해도 나는 몰라. 그래서 잘 안다닐라고 해. 내 손자놈이 인자 학교 댕겨. 고등학생이 둘이여. 우리 손주딸은 전주서 고등핵교 댕기는디 시험만 보면 일등을 해. 고삼짜리 손자들도 있어. 대학교 가야 할 것인디.

그 자신의 고생은 제쳐두고 자손들에게 큰 희망을 걸고 있었다. 그러면서 이런 이야기도 덧붙인다.

곤란이 막심하지. 마흔다섯 마지기 다 없어져. 기가 맥힌 얘기지. 어쩌다가 임실 가고 남원 가면, 김개남 장군이라고 안혀. 김개남 어쩌고 저쩌고 허지. 내가 김개남 손잔디. 참 쓰잘 떼 없는 소리, 내가 김개남 손자여, 속으로 그러지. 내가 무식헌게 뭔 말을 안혀. 그런게 지금 핵교 교수들도 그때 세상을 모르고, 세상에 국민핵교도 보내야 하고 뭣이라 허는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그때 세상에 개남이 손이라고 하면 다 때려죽일라고 하는디, 정부에서 전봉준이, 김개남, 손화중 떠들고 있으니 내가 활발하게 돌아다니지, 그때 세상에는 우리 식구가 밥만 어떻게 먹지, 어떻게 핵교를 댕겨. 허망한 소리지.

그러나 그는 거듭 자손들에 대해 빠뜨리지 않으려는 듯 “우리 할아버지 손은 내가 손자가 여덟이고, 우리 딸들은 겁나. 말할 수가 없어. 우리 한아버지 딸이 셋이여. 우리 아버지가 하나여. 우리 형제는 둘이여. 자식이 넷이여. 서울 가 있고, 부산 가 있고, 전주 가 있고. 잘살지는 못해도 얼굴은 다 좋지. 허망한 소리여”라고 말을 잇는다. 또 시국에 대해서 나름대로 이렇게 밝히기도 했다.

내가 서울서 한국일보니 뭐뭐 오길래, 나 늙고 헐 말도 못 헝게 다들 알어서 하라고 말했지. 나같은 사람이 고생 말할 것도 없고, 굶기를 밥먹듯이 했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가만 본게 대통령도 도둑놈을 맨드는 것 같애. 농민 살려내야지. 조합장이 개인재산이 수천만 원이여. 탕감시켜줘야 돼. 정부가 잘 해야 돼.

그는 지식은 없으되 기개가 있었고 진솔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원 하나를 들려준다.

다 아니까 나 할 말도 없고 내 욕심이 있어. 우리 할아버지 싸움터가 여긴게, 우리 할아버지 씨움터에다 사당을 지어갖고 흥패라도 하나 내 생전에 해주면 쓰겄는디. 아 황토재에다가 하니 내가 쪼깨 서운허네. 나 욕심이 살던 집터에다가 사당 하나 지어서 단독으로 해주어야지. 전봉준이가 뭣이냐고. 내가 군수나 경찰서장한테도 말해.

그의 나이 칠순이 넘었는데도 눈빛이 살아있었고 기력도 대단히 좋은 듯하다. 그는 큰아들과 세 칸 초가에서 농사를 지으며 근근히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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