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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록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호대접주 김인배, 증손자 영중
대상인물

김인배(金仁培)

1870~1894. 본관은 김해. 자는 양여(陽汝), 족보 이름은 용배(龍培).
김인배는 금구현 하리면 화봉리(지금의 김제군 봉남면 화봉리)에서 태어남. 이곳 김해 김씨들은 집단 마을을 이루고 살았고 이곳 농민군 지도자 김덕명(金德明)이 살았던 용계마을과는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한 고을이었다. 김인배는 어릴 적 서당에 다니며 글을 익혔고 장성해서 종백부인 현모(顯謨)에게 양자로 감.
김인배는 김덕명과 함께 무장·고부봉기 때부터 참여하였고 집강소 기간 동안 순천, 광양, 하동, 진주로 진출, 여러 고을을 석권하여 영호대접주(嶺湖大接主)로 이름을 떨침. 특히 진주 병영을 접수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 후 이 일대에서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다가 광양에서 잡혀 효수당했음.

증언인물

김영중(金穎重)




1932~ . 김인배의 증손자. 어릴 적 증조할머니에게서 증조부의 행적을 들었음. 동아대 경제과를 나와 철도공업주식회사 부회장으로 재직. 오랫동안 증조부의 활동을 조사해왔으며 지금 동학농민혁명유족회 회장으로 활동중.



가계도
가계도 이미지
정리자

이이화

출전

다시피는 녹두꽃

내 용

김영중은 증조할아버지의 활동을 어느 후손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몇십 년 동안 이 일을 캐는 데 매달려왔기 때문일 것이다. 우선 그들 조상의 내력에 대해 들어 보기로 하자.

용배할아버지의 고조부이신 성[成]자 현[鉉]자 어른은 승정원 좌승지로 국정에 참여하셨대요. 어느때 몸이 쇠약하여 와병중일 때 큰며느리 경주 이씨의 효성이 하늘에 닿아서인지 단지[斷指]하여 그 피를 시아버지의 입에 넣어 생명을 연장했대요. 또 두번째로 허벅지 살을 배어 그 끓인 물을 봉양하면서 갖가지 정성을 다하셨대요. 정미년[1847년] 효열[孝烈]로 나라에서 정려각[旌閭閣]을 세웠어요. 147년이 지난 지금도 화봉리 마을에 있어 후손들의 귀감이 되고 있어요.

이 정려각이 세워지면 후손들은 대접을 받고 자부심을 갖는 게 전통 사회의 모습이다. 또 이 며느리의 효행도 과거에 있었던 한 전형이다. 그러나 여기의 ‘좌승지’는 족보에는 증직(贈職)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실직은 아니요, 어떻게 받았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다.

용매할아버지는 어려서부터 매우 쾌활하였다 하며 배움도 역시 신동에 가까울 정도로 근처 마을에서 널리 소문이 났다 합니다. 문장도 뛰어나고 말도 잘하여 다른 아이들의 모범이 되었다 합니다. 점점 자라서 기골이 장대하여 장군감이라 칭송이 자자했다 합니다.

어릴 적 이야기는 이 수준 이상의 것은 알려진 것이 없는 듯하다. 영웅설화와 같은 이야기만 전해질 뿐이다. 아무튼 김인배는 전라좌도 쪽으로 이해 7~8월경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영호대접주’라는 소임도 전봉준이나 김개남이 붙여 주었는지 아니면 스스로 표방했는지, 중의에 의해 추대되었는지도 확인할 수가 없으나 관변 쪽에서는 한결같이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당시 김인배의 나이 24세. 범상한 지도력이나 용맹으로써는 감당할 수 없는 소임이었다. 또 당시 전라도에서 경상우도로 진출하여 집강소를 확대하려는 의도는 곳곳에 나타난다. 김인배가 집을 떠날 적에 몇 사람과 동행한 것으로 나타난다.

집안에서 같이 가신 분이 있어요. 종숙인 세 살 위인 현익 씨라고 허는 분과 같이 가셨는데, 그분이 아주 글씨를 잘 쓰셨어요. 할아버지하고 콤비가 된 거지. 서기로 활동했대요. 요분에 대해서는 족보관계가 있으니까. 내가 열여섯일곱 살까지 얘기를 들은 거지. 상할머니에게서 들었어. 또 이 양반의 처남, 매형하고 같이 갔어. 같이 가가지고 요 내용대로 너는 집으로 가라고 하며 그때 포위망을 뚫어주어 나왔다는 거지. 그걸 집에 와서 얘기하고 그랬어요. 나도 오기만 하면 그 얘기를 들었고. 그때 갓 쓰고 여기 사마귀가 달린 할아버지 모셔 가지고 그 양반이 일흔여덟 살에 고향에서 돌아가셨어요. 그 후에 내용을 알 수 없잖아요.

여기에 나타나는 현익(顯翼)은, 족보에 정묘생(1867)으로 제삿날은 12월 5일로 기재되어 있다. 또 그의 처남은 유승현(柳升鉉)을 말한다.

처남은 김제 조씨란 말이예요. 김제 조씨에서 죽허니 전하는 것은 많이 내가 복사를 했어요. 인수라고 돼 있어요. 이분이 김인배 장인이여. 그 아들이 따라갔어요. 경오생이니까 나이는 같아도, 누님이란 말이야. 첫날에 여자가 나이가 더 많으니까 매형이여. 이 양반이 내게 얘기해줬지요.

유승현은 살아나와서 그 전말을 전해주고 있다. 김인배는 이들과 함께 그쪽으로 진출하여 활동을 벌였는데, 초기 동정에 대해 이런 기록이 전한다.

작년 유월 이후 금구의 도둑 우두머리 김인배가 이끄는 무리는 각처의 비도가 십만이 되었는데 성중[순천을 말함]에 들어와 영호도회소를 설치하고 관가의 군기를 빼앗고 남의 돈과 재물을 빼앗으면서 감히 군수(軍需)라고 일컬으며 돈을 배당하고 곡식 거두기를 마음대로 했다[『순무선봉진등록』].

김인배는 순천에 본부를 두고 유하덕(劉夏德)을 수접주로 삼았다. 이들은 9월 1일 1만여 명을 이끌고 하동으로 쳐들어갔고 민포군의 근거지인 하동 화개동을 소탕했다. 김인배는 계속해서 진주로 진격했는데 당시 진주의 농민군은 김인배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에 진주병사 민준호는 김인배를 정중히 진주 병영으로 맞아들였다. 그리하여 진주 병영을 무혈로 점령한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부산의 일본군은 진주를 공격했다. 그리하여 고승당산에서 무수한 농민군을 살육했다. 김인배는 고승당산 전투에는 참여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김인배는 8만여 명을 이끌고 섬진강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패전했고, 이어 세 차례나 여수의 좌수영 공격에 나섰으나 패전했다. 김인배는 다시 순천·광양을 근거지로 활동을 벌이다가 끝내 광양에서 잡혔다. 그가 어떻게 해서 광양에서 잡혔는지는 확실한 내력을 알 수가 없다. 아무튼 김인배는 유하덕과 광양, 순천, 진주, 곤양의 농민군과 함께 잡혔다. 김인배는 유하덕과 함께 효수를 당해 객사에 목이 걸렸고 그의 부하들은 모두 다 포살당했다. 이때 죽은 숫자는 95명으로 나타난다. 그가 죽은 날은 12월 초8일(「광양동도포착성명성책」). 이때 뒤에서 말한 김현익도 포살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어 광양 섬진역에서 잡힌 농민군 28명도 효수와 포살을 당했다. 이 중에 섬진역 상동에 사는 도집강 정홍섭도 포함되어 있다. 이런 기록 말고 그의 말을 들어 보기로 한다.

아까 얘기했던 것 같이 따라갔다는 분이 있었지요. 글씨 잘 쓰셨다는 분. 묘가 재광양이라고 돼 있는데, 묘가 광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광양에서 돌아가셨다고 해서 그렇게 적은 거라 틀려요.

김현익의 이름은 광양의 관계기록에는 나오지 않으나 ‘명부지(名不知) 17명’을 함께 포살한 것으로 나타난다. 또 처남 유승현에 대해서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매형이 효수당하기 전날 밤 자정쯤에 어두운 밤을 이용하여 포위망을 뚫고 탈출 직전이었다 합니다. “매형 집에 같이 갑시다”고 했더니 “나는 갈 수 없네. 자네는 집에 가서 이 소식을 전하고 부모님을 편히 모시고 여생을 다하기 바라네. 나는 여기에 포위되어 있어서 많은 동료를 버릴 수 없어, 운명을 같이하기로 결심하였네. 대장부로 태어나 떳떳이 목숨을 마치겠네”라고 대답했답니다. 유승현은 사지에서 벗어나 몇 날을 걸어 무사히 집에 당도하였고 뒤에 누님댁에 와서 이 이야기를 전해주어 온 집안이 알게 되었지요. 그 어른을 어릴 적에 자주 뵈었어요. 집에 오시기만 하면 우리에게 싸운 이야기를 해주셨고 우리들은 자꾸 해달라고 졸랐습니다. 새삼스럽게 그분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항상 상투에 갓을 쓰고 갸름한 얼굴에 웃는 인상으로 흰 두루마기를 입고 집에 오신 모습이 떠오릅니다. 이분은 1948년 7월 27일 일흔여덟 살에 고향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유승현의 이런 말이 없었더라면 가족들은 까맣게 생사를 모를 뻔했겠다. 김영중은 이런저런 사실을 알게 된 배경을 “대동보에 김현익 할아버지가 적혀 있지요. 유승현 할아버지 일도 알고 있었지. 이건 상당히 오래 됐는데, 내가 이걸 한 이십 년 전부터 알고 있었지. 그전에는 신경 안 썼고 밥 먹고 살기 바쁜데 뭘 신경을 써. 그 이후부터 여유가 있어서 이 관계에 대해 신경을 쓰면서 좀 알고 있었지. 영호남 대접주네 이런 건 잘 몰랐지. 그때는 대장이라고만 알았어. 이 양반[유승현]이 얘기한 건 큰대장이라고만 했으니까. 그때 조사한다고 서울대 도서관, 규장각 같은 데 뒤지고, 밤 열 시 이후에 교수들한테 전화하고 그랬어요”라고 말한다. 김인배의 죽음 소식을 들은 가족, 특히 증조할머니는 여간 난감하지 않았을 것이다.

증조할아버지가 일본군[사실은 관군]에 붙잡혔다는 소식에 틀림없이 돌아가셨거니 생각했다더군. 하지만 제삿날을 정할 수 있나. 삼년 동안 제사를 못 지냈대요. 그래 상할머니가 떡시루에 흰쌀가루를 깔고 맨날 아침 들여다봤는데 음력 12월 9일 쌀가루에 새 발자국이 뚜렷이 나타나드래. 그날 이후 지금까지 증조할아버지 제삿날이 12월 9일이야.

황토흙 떡시루 등에 나타나는 표시를 이용해 종잡을 수 없는 시간이나 장소를 점치는 것은 전통 제수굿이다. 그의 말은 이어진다.

11월 9일날 제사일자를 정해가지고 했단 말이예요. 그런데 기록에는 11월 8일에 돌아가신 걸로 돼 있거든요. 이건 내가 광양에서 십몇 년 전에 복사해서 갖다놓은 거예요(「광양동도포착성명성책」). 묘는 지금 없지요. 거기 가 있으니까. 그래서 내가 금년에 그 흙을 파다가 증조모님하고 같이 쌍봉으로 해서 모셨어요. 그 당시에는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지요. 몸은 태워버리고서 머리는 잘라가지고 군청[객사라는 설이 유력] 옆에다 걸어놨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제삿날 문제에 대해 그 나름대로 이렇게 고심을 하고 있다.

이이화 소장님이 12월 8일로 밝혀졌으니까 제사를 옮기라고 해요. 그래서 백년 동안 지내온 것을, 그 양반이 9일에 오셔서 잡수시는데 어떻게 바꾸느냐고, 나중에 흙을 파다옮길 때 공중에 고하고 고치면 되는 거라고 다들 그런 얘기를 하더라구요. 그래서 그렇게 할려고 합니다.

그 후의 사정은 우리의 흥미를 더해준다.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나봐요. 할머니께서 농사는 촌에서 밥 먹을 수 있도록 중간은 있었던 모양이예요. 옛날에 벼슬한 집안이라 조금 뭔가는 있었고. 이 어른이 양부가 아들 못 낳으니까 사촌에서 왔잖아요. 그때도 집안살림이 없으면 양자하는 데도 안 올려고 하지. 어느 정도 있으니까 왔지. 그래서 공부를 많이 하셨다고 해요. 농사짓는 사람이 농사 안 짓고 공부를 하셨다면 농사짓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는 얘기지.

그 후 김인배가 동학을 어떻게 믿었는지, 농민전쟁에 어떤 연유와 과정을 거쳐 가담했는지 제대로 전해진 이야기는 별로 없으나 아래의 사실은 하나의 시사를 준다.

어릴 때 들은 얘기로 시천지조화정영세 뭐라고 하면서 어른들이 떠들던데, 이 책을 보니까 시천주야. 그래서 아 그게 이거였구나 했지. 동학을 믿긴 믿었던 모양이야. 머리가 좋고 저기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런데 위험해서 그랬나 이름을 바꾸고 그랬나봐요.

이제 그의 집안을 일으키고 자손들을 키운 상할머니의 삶을 생생하게 들려준다. 상할머니는 바로 김인배의 아내가 아닌가. 김인배는 아들 둘을 두었는데 큰아들 종성은 다섯 살 작은아들 종철은 유복자였다. 상할머니는 이런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어떻게 살았던가.

농민전쟁이 일어난 이후에는 그 양반이 자기집이 있었는데 수해가 나서 망가진 거지. 내가 일고여덟 살 쯤 해서 집을 다시 지었지. 그러다 팔았지. 상할머니는 그 이후에 감시를 받으니까. 애들은 조그맣지. 유복자를 낳은 후에 95년 초부터 당했을 거예요. 상할머니가 꿋꿋하게 사신 분인데, 애들도 어리고 가까운 친척도 없지, 혼자밖에 없으니까, 거기서 계속 살지 못하고 친척집에 가서 피하고, 먼 친척집에 가 있고 그런 모양이여. 그러는 중에도 저녁에 나갔다 들어오잖아요, 그때 개가 짖는다거나 하면 뒤에 있는 대나무밭에 숨어서 새벽까지 기둘리다가 조용하면 살짝 나왔어. 계속 끝날 때까지 그 짓을 한 모양이야. 개가 짖으면 누가 온다는 얘기니까. 그러니까 논은 있다 하더라도 생활이 안되는 거지. 그래서 비단장사를 했어요. 중국비단이 우리나라에 한참 들어올 때니까. 그때 말로는 황해장사라고 그래요. 비단 같은 걸 가지고 댕기면서, 복잡하니까 그러고 다닌 거 같아요. 오래 하지는 않았고 한 이삼 년 했지요. 나도 그걸 얼핏 본 것도 같고. 그래가지고 생활을 했지요. 처음에는 숨도 못 쉬고 살았고.

상할머니는 억척스럽게 살았다. 그리고 아들 손자를 치마폭에 거두어 살렸다. 그래서 아들들은 탈없이 잘 자랐다.

그 후로 아들들은 어디 관계라든가 하는 데는 전혀 신경을 안 썼고 농사는 촌에서 쭉허니 지었고 그 후에 기본이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생활이 괜찮았어요. 증조할아버지 아들이 순 한문 공부지만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왜정시대에 봉남면인가 평의원도 하고 그랬어요. 안할 수가 없지요.

김영중의 큰아버지와 아버지도 고향에서 대를 이었다. 김영중의 가족사는 어디까지나 상할머니에 모아진다. 어릴 적에 어떻게 자랐느냐고 묻자, “나? 나는 인자 증조모한테 거의 컸다고 봐야지. 왜냐하면 내가 네 살 때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셨어. 어머니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우리 집안에 그때에서는 인자 손자가 없단 말이예요. 내가 장손이 되는데, 그래서 나를 누가 건드리기만 해도 상할머니가 얼마나 저기를 했는가 몰라요. 아들이 없다가 손자가 생기니까 어땠겠어요? 할머니도 계셨지만, 꼼짝을 못했어요. 시어머니가 모진 세파를 사셨으니까 얼마나 강합니까? 굉장히 강했을 거 아니예요? 그러니까 우리 할머니가 시집살이를 되게 한 겁니다. 그 상할머니가 나를 데리고 자고 했어요. 그 할머니하고 내가 쭉 살은 거예요”라고 들려준다. 그리고 그 자신이 겪은 삶을 마지막으로 들려준다. 그의 조상과는 달리 이처럼 순탄하다면 순탄하게 살아왔다. 어릴 적에 고향에서 자라다가 6·25 때부터 타향살이를 한다.

육이오 때 부산에 살았어. 학교는 그때 피난시절이니까 서울에서는 학교 다닐 수 없었고, 부산으로 갔어요. 그때는 여기 있는 학교들이 전부 부산으로 갔어요. 동아대 경제과를 나왔어요. 그때는 건물이라고 있는 학교가 별로 없었고, 창고 같은 학교들뿐이었는데, 그런 데는 가고 싶지가 않았어요. 그래서 동아대 경제과를 갔지요.

학교를 졸업한 뒤 철도공업주식회사에 들어가 지금까지 33년째 봉직 하고 있다. 이 인연으로 대전에 주소를 두고 살고 있다. 평생 말단직원에서 부회장 전무를 거치며 봉직한 회사 사정을 이렇게 말한다.

철도공업주식회사는 과거 1962년 이전에는 우리 회사 같은 회사가 없고, 이 일을 철도청 직원들이 했어요. 그런데 부정이 계속 생기니까, 철도에서 있던 사람들이 경험자들이 아니면 못하잖아요. 기술적으로. 나와 가지고서 이 회사를 맨들었지. 맨들어 가지고 주로 하는 일이 보선관계, 철길을 신설하고 보수하는 그런 회사예요. 철길을 놓다보면 레일을 용접할 수도 있고. 토목업자들이 노방을 만들고 나면 그 위에 하는 일은 모두 우리 회사에서 해요. 이와 같은 회사가 셋인데, 처음에는 하나였는데, 경쟁을 위해 둘로 쪼개고, 작년에 하나가 더 생겼어요. 지역을 나눠서 맡지요. 우리는 대전, 영주, 순천지역을 맡고, 지하철을 나누어서 맡지요. 연중 단가계약으로 처리를 하지요. 경쟁을 하는 데 기를 쓰고 돈주고 하는 게 아니고,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단가가 미리 결정된 상태에서 일을 맡지요. 크게 마진은 없습니다.

끝으로 100주년을 맞이해 아쉬움과 소망을 다음과 같이 들려준다.

고향집은 우리 어머니가 그 집에서 돌아가셨는데 지금도 남아있어요. 지금도 논이 여덟 마지긴가 있습니다. 그 집을 사년 전까지 가지고 있다가 팔았다는 게 아쉽긴 아쉽지요. 당숙들이 살고 있어요. 그 집을 보존하고 싶습니다. 또 증조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광양에 추모비를 세우고 싶어요. 유족회가 금년에 발족되지 않았습니까? 유족회가 할 일이 많습니다. 추모비를 세우고 기념관을 짓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농민군 지도자들이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어 국가의 공인, 민족의 공로자로 이름을 올려야 합니다. 그래야 선열의 원혼을 달랠 수 있고 정당한 민족사가 이루어질 것 입니다. 회장으로 이런 일을 얼마나 할 수 있을지 여러분의 많은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십 년 전쯤만 이런 생각을 했으면 더 많은 자료도 나오고 생생한 이야기도 들을텐데 무척 아쉽습니다.

김영중은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도 아주 조용하고 차분하다. 온화한 인상을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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