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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록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호랑이를 쫓은 농민군 접주 박학준, 아들 철웅
대상인물

박학준(朴學俊)

1869~1955. 본관은 밀양. 족보명은 종기(鍾沂). 고흥군 두원면 유두메(유동)에 살면서 두원 접주로 활동. 우금치 전투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 화순 너릿재에서 체포되기도 하였으나 기지를 발휘하여 탈출. 고흥군 남양면 배다리에서 살았음.

증언인물

박철웅(朴哲雄)




1912~ . 박학준의 아들, 족보명은 민수(玟洙). 광주학생운동에 참여. 명치대 졸. 조선대학교를 설립하여 총장을 지냄. 현재는 은퇴생활.


1923~ . 박철웅의 부인. 평남 강서 출생. 이화여전 음악과 졸. 광주사범, 조선대 교수를 거쳐 조선대 이사장 역임. 1987년부터 장애인 종합재활교육기관인 사회복지법인 ‘덕산’을 설립하여 이사장으로 재직중.


박학준의 손자, 박철웅의 아들. 고려시멘트 주식회사와 나우콤의 대표이사.



가계도
가계도 이미지
정리자

우윤

출전

다시피는 녹두꽃

내 용

박학준은 고흥 두원면에서 접주로 활동하였다고 하는데, 후손의 증언에 의하면 고흥 출신으로서는 드물게 농민전쟁 2차 기병 때 농민군 본대와 합류하여 공주 우금치 전투까지 참여한 농민군으로 추정된다. 그의 아들 박철웅은 현재 고령의 불편한 몸이기 때문에 증언은 주로 박철웅의 부인 정애리씨가 기억을 더듬어 응해 주었는데, 이들이 기억하고 있는 내용은 우금치 전투 이후 부터였다.

접주라고 그러지요, 두원 책임자를 하셨다가 동학군에 참여해서 우금치에서 동학군이 깨질 때, 지금으로 말하면 화순으로 처음에 도망을 가셨다고 해요. 광주에서 화순 넘어가는 너릿재를 넘어가다가 잡히셨대요. 박정승 이름 팔고서 살았다구요. 고종 때 그런 사기꾼 있었다고 그러지 않습니까?

2차 기병 때 고흥의 농민군은 대체로 자기 지방에 머물면서 후방을 단속하고 있었으므로 만약 박학준이 우금치 전투에까지 참여한 것이 사실이라면 박학준의 행적은 상당히 주목할 만하다. 따라서 그가 우금치 전투에 참여하였다면, 그는 농민군 통치시기(7~8월)에 고향을 떠나 다른 곳에서 집강소 활동을 펼쳤을 가능성도 있다. 손자 박성현의 증언에 따르면, 박학준이 우금치 전투에 참여했다는 심증을 더욱 굳혀준다. “어르신들은 다 기억을 못하시는데, 제가 어렸을 때 들은 얘기로는 할아버님께서 당신이 우금치에서 죽으셨어야 된다고 그런 독백을 항상 하셨어요.” 우금치에서 죽어간 동료들의 모습이 내내 박학준을 괴롭힌 것일까. 공주성을 점령하려는 농민군이 우금치에서 대접전을 벌인 것은 1894년 11월 9일. 그 전후의 상황을 적으면 다음과 같다. 농민군 본대가 논산을 거쳐 경천에 본진을 두고 이인에서 첫 싸움을 벌인 것이 10월 23일. 효포 뒷산에서 싸운 것이 10월 24일과 25일. 이때 전사한 농민군의 피가 금강을 붉게 물들이는 처절한 혈전이었으나 공주성을 점령하지 못했다. 그래서 농민군 본대는 다시 논산으로 나와 대열을 가다듬고 경천 쪽으로 대군을 진격시킨 것이 11월 초. 공주를 거의 에워싸고 공격의 화살을 준비한 것이 11월 8일. 드디어 다음날 우금치에서 대접전이 있었던 것이니, 전봉준은 효포를 주요 목표로 삼아 공격하는 척 효포 쪽에서 먼저 싸웠지만 이 사이 주력부대는 서서히 우금치를 향해 뛰었다. 제1대가 무너지면 제2대가 우금치를 향해 돌진했다. 이렇게 40~50차례 싸웠지만 우금치에는 농민군의 시체만 쌓일 뿐 뚫리지 않았다. 이날 우금치 전투에 대해서 전봉준도 “2차 접전 후 1만여 명의 군병을 점고하니 남은 자는 3천여 명을 넘지 않았으며, 그 후 다시 2차로 접전한 후 점고하니 5백여 명을 넘지 않았다”하여 장렬한 싸움이었음을 회상했다. 이때의 군병은 물론 전봉준의 직속 부대를 말한 것이다. 이리하여 남은 농민군은 먼저 간 동료의 시신을 산야에 그대로 둔 채 퇴각했다. 이때 농민군 박학준도 죽창을 손에 꼬나쥔 채 혹독한 추위와 배고픔을 참으며 맨발로 언 땅을 밟고 퇴각하였을 테고, 최후로 원평(11월 25일)과 태인(11월 27일)에서 벌어진 반격전에도 참가하였을 테지만 관군과 일본군을 막지 못하고 다시 남하하여 광주에 이르러 손화중·최경선 부대를 찾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손화중과 최경선도 광주를 뒤로 한 채 퇴각하는 마당이었으니 박학준 역시 몸을 날릴 수밖에. 광주에서 화순 쪽으로 길을 잡은 박학준은 너릿재를 향해 달렸으나….

화순 너릿재에서 아버님이 잽했는데, 난 아버님한테 직접 들은 얘긴데, 꼭 죽겠드래요. 그래서 박정승의 조카라고 그랬다든가 누구라고 그러셨대요. 그러니 놔주더랍디다. 그래서 살아나셨다구.

이렇게 살아난 박학준이 고향에는 돌아갈 수 없고, 그런데 그럴수록 고향의 선영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은 후손으로서 당연한 일. 그때의 상황을 정애리시는 이렇게 들려준다.

나는 다른 거는 모르고, 두원에 당신 할아버지 묘가 두 분이 계시고, 매골이라는데 세 분이 계셨거든요. 그런데 아버님께서 우리한테도 그 얘기를 안해주시고 유씨라는 젊은 사람 보고, 자네가 우리집 묘 좀 봐주소 그러셨대요. 그러고는 당신이 다시는 두원을 못 들어가셨어요. 그때 잡을라고 그러고 하니깐, 무섭고. 절보고 유씨라는 사람이 우리 묘를 보고 있으니까 거기 가서 물어보면 윗대 할아버지들을 알 것이다 그렇게 얘기를 했어요. 아버님 다 돌아가신 뒤에 우리가 정신을 차려가지고 두원으로 가서 유씨를 찾아갔더니 금방 돌아가시게 생겼어요. 그래서 총장님[박철웅]이 우리 조선대학 부속병원에다 입원을 시켰습니다. 돌아가시면 아무것도 못 찾지 않겠어요? 그래가지고서 매골 어디가 있고, 우리 윗대 할아버지 묘가 두 분이 있는데, 총장님이 조선대학을 세우고 이렇게 자꾸 잘되니까, 거기 이모씨라는 사람이 거기서 세도를 쓰고 우리 아버님하고 좋지 않게 지내던 그 가문의 사람이 명당이라고, 그 묘 위에다가 덧장을 해버렸어요. 해서 찾기가 힘들다고 또 어디쯤 되냐고 그러니까 아프신 몸으로 해가지고서 알려줬어요. 그때 그걸 우리 신문사 사장이 가서 안내를 받아가지고 지도를 받아가지고 알았거든요. 호리꾼이라고 있지요, 묘 몰래 파는 사람을 불러가지고 동학으로 인해서 다 잃어버린 걸 인제 찾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이렇게 족보에는 어디어디 향이 어쩌고 이렇게 있는데, 아버지 묘가 아무 것도 없고 지금 이렇게 덧장만 했다고 그걸 가르쳐주고 그 노인은 이삼 개월 있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그 아들인가 우리가 논을 닷 마지기 사줘서 지금도 벌초를 하고 그러거든요. 그 어디쯤 되겄냐고 그랬더니, 자기가 하도 도굴을 하다보니까 눈치가 있나보지요. 그 에무왕[M1] 총을 소제하는 무슨 뭐 있답디다[꼬질대]. 그걸로 조사해보면 안다고 해서. 그러니까 이씨네 그 집에서 이제 난리가 나지요. 저희 묘 뒤진다고. 그런데 호리대를 그 묘자리에다 넣으니까 쾅쾅 들어가드랍니다. 그건 그 안에가 동공이 생겼다는 거 아니겠어요? 그래서 찾았지요. 싸움을 하고 돈을 주고, 그래서 지금 벌안을 완성시키고 얼마 전까지 다 완성을 시켰어요. 매골에 있는 세 분을 다 모셔다놓고, 지금 한 삼사 년 되나요?

그때 박학준이 부탁한 선조들의 묘를 최근에야 찾았다고 말하는 후손의 말에는 힘이 실려 있고, 감개가 무량한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몇 차례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기고서야 찾은 것이 아닌가. 선영의 일까지 부탁한 박학준이 정처할 곳을 찾은 곳은 고향을 지척에 둔 남양면 주교였다. 그러나 가진 것이라고는 맨주먹뿐인 빈털터리였다.

그래서 아버님이 거기 못 들어가시고, 저 장흥으로 어디로 피해 다니시다가 고흥 배다리라는 데가 있어요. 배가 다니니까 배다리. 남양면 배다리, 주교라고 그러지요. 거기로 가셔 가지고 자리를 잡으셔서, 자리 잡아도 한심할거 아니겠습니까? 우리 시어머니가 장흥 분입니다. 그때 피해서 장흥으로 어디로 댕기면서 배도 타셨대요. 거기서 우리 시어머니를 만나셨대요. 거기서 우리 시어머니 만나서 결혼을 하셨대요. 그러고 아무 것도 없이, 그래서 이거 챙피한 얘기지만은, 뭐 챙피하지도 않지요. 그때야, 그 솔버디, 베틀 짜는데 왔다 갔다 하는 게 솔이고 버디라고 그래요. 일반적으로 채 매는 사람이든가, 솔뿌리나 대나무 가지고 바구니 만드는 사람, 일종의 유기장을 만드셔가지고 당신 자식들 키우고, 우리 총장님도 업고 다니시면서 우리 시어머니가 광주리에다 그거 이고 다니면서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고 자식들을 키우셨드만요. 고흥군 두원면이 고향인데, 본적을 후에 남양면으로 옮겼어요. 두원에 박씨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습니다. 두원면 유두메[유동]에 사셨지요.

이를테면 결혼하여 천민들의 일이라는 솔버디를 만들어 생계를 겨우 꾸려갔다는 이야기다. 옆에서 손자 박성현이 거든다.

두원에서 못 사시게 되니까 제가 듣기로는 우금치에서 깨지고 나서 화순으로 피신할 때, 아까 너릿재에서 검문을 당했다 말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화가 화순에 사는 사기꾼이 있었어요. 이 사람이 인물이 좋아가지고 정승을 사칭을 하고 다닌거라. 그래서 갑오년 전에 고종한테 잡혀갔지요. 그게 그 당시에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인데, 고종이 얼굴을 보더니 너는 정승을 해먹고 살 만하다고 해서 봐줬다는 거예요. 유명한 사기꾼인데. 그 화순 너릿재를 넘어가다가 잡히니까 저희 할아버님께서 내가 박정승 조카다, 신원증명을 한 거지. 사실은 조카도 뭣도 아닌데. 그렇게 살아나셔서 화순을 거쳐 장흥으로 가셔서 있다가 장흥서 지금 할머니를 만나셔가지고, 장흥에서 배를 타고 고흥에 들어가셔서, 그게 저희가 고흥에서 자리 잡은 남양면 배다리라는 데가 바닷가예요. 거기 숨어서 자리를 잡으신 거지요. 아주 벽촌이지요. 광주서 고흥 녹동을 가다가 보면은 큰 산 넘어서 바닷가 한적한 동네라구요. 거기서 숨어서 사신 거지요.

다시 ‘박정승의 조카’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일화는 지금도 이곳 노인들에게서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차츰 식구가 늘면서 며느리도 보고 살림이 불어갔다.

내가 시집 갔을 때, 솔나무를 잘라가지고 지은 조그만 오두막이 하나 있고, 그 다음에 조금 살게 되어서 기와집을 하나 이제 제대로 지은 집이 있고 그러드만요. 그런데 저 집이 어머니하고 처음에 와서 살던 집이다 그러세요. 그래서 그걸 우리 둘째가 보존할려고 그래도 팔아주지도 않아요. 지금 다 물론 허물어졌겠지만은. 그런데 그 솔버디를 팔러 가면 있는 집으로 팔러 가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밥을 거기서 얻어잡숫고 그러신대요, 애기도 먹이고. 그런데 자손들이 자꾸 크니까 챙피하드래요. 그래서 집 뒤에 대밭이 있었거든요. 대밭도 뭐 왕대도 아니고, 이런 세대인데, 자생이니까. 그러면 동네 앞으로 못 가고, 솔버디만 가지고는 대밭을 꿰서 담에 넘겨놓고는 다시 돌아서 애기만 업고서 동네 앞으로 해서 집에 들어가셨다고, “내가 그렇게 서럽게 자손들을 키웠다”고 말씀하시더만요.

그래도 솔버디를 만들어 판다는 것이 유쾌한 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증언의 분위기가 고조되자 며느리 정애리시가 집안의 비밀을 슬쩍 들려준다.

우리 시어머니가 늘 그러세요. 난 느이 아버지 장가간 걸 몰랐다 그러세요. 그래가지고 오시니까, 마누라가 있다고 그러시드래요. 그래서 어디 계시냐고 그랬더니 낙성에가, 낙안에가 있다고, 그래서 우리가 낙성어머니 라고 그랬습니다. 얻어 놓으시고 동학군만 따라댕겨가지고 그 마누라를 내버렸어요.

박철웅은 이 이야기를 옆에서 듣고 있다가 화를 냈지만, 두 번 장가 간 이야기야 흔한 일. 예나 지금이나 전쟁통에 죽어나는 것은 여자뿐이다. 아아, 여성수난사가 이곳에도 있을 줄이야. 그런데 박학준에게는 이런 여성의 비화 말고도 또 다른 비화가 있었다. 농민군 박학준의 담력이 대단했음을 보여주는 믿기 어려운 실화이다. “고흥에 살 때도 살기가 형편없었지요. 농사를 지으셨지요. 체격이 얄캉하고 키도 크셨어요. 호리호리하시고, 매사에 강하셨지요. 장사는 아니셨지만, 호랭이 하고 싸워서 이기셨으니까.” 뭐, 호랑이와 싸웠다고? 박성현이 어머니의 설명으로는 부족했는지 좀 더 부연한다.

저는 그 말씀을 들었을 때, 삵[살쾡이]인지 호랑인지 왔다갔다 했는데요, 삵은 어른이 낫을 들고 마주서면 덤벼들지 못할 거 같아요. 그래서 호랑인거 같아요. 저희 형님들은 할아버지한테 그 얘기를 직접 들었던 모양이예요. 산에 나무를 하러 가셨는데, 호랑이랑 마주치신 거라. 그러니까 둘이 마주보고 있는데, 호랑이가 덤비드래요. 그래가지고 왼손을 내주셨대요. 그러니까 호랑이가 물을 거 아니예요? 물은 상태에서 끌려가지를 않을려고 오른팔로 나무를 잡으셨대요. 그 상태에서 마주 치면서 계속 발로 호랑이 턱을 때렸다는 거예요. 그걸 팔이 완전히 짓이겨지도록 몇 시간을 하신 모양이예요. 그래가지고 호랑이가 기가 질리니까, 놓고서 가버리고 아무런 약도 없을 때니, 팔이 완전히 망가졌을 거 아니예요. 뼈도 다 나가고, 근육 다 끊어지고, 그러니까 구더기가 쓸으셨대요. 그래서 썩어들어가기 시작했는데, 그걸 어떻게 해서 나았냐하면, 닭을 잡아 반쪽을 내서 팔에 끼우셨대요. 그러면 독기랑 구더기가 닭으로 옮아간대요. 그래서 나중에 낫고 나서도 근육이 끊어져서 뭉쳐가지고 양쪽으로 몰렸었어요.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아난다는 속담을 증명한 쾌거이니 역시 박학준은 농민군 접주이다. 그런데 그 후 박학준은 기독교 쪽으로 거취를 바꾸었다 한다. 새로운 환경 탓일 게다.

우리 아버님이 기독교로 돌으셨거든요. 동네에 사람이 전혀 없었지요. 그런데 기독교를 그렇게 열심히 하셨어요. 옛날 교회라고 뭐 집을 제대로 짓고 십자가 붙이고 그런게 아니라, 빈 집이 하나 있으면 아무리 허술해도 그걸 여기저기 해서 교회를 열세 개나 하셨어요. 그걸로서 자손들 키우시고, 하여튼 기백이나 정신력이 강하신 건, 그건 동학에서 싸움의 경험을 해서 그러셨던 가봐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아버님을 중심으로 해서 이렇게들 하니까, 동네에서 아주 어른 노릇을 하셨어요. 연령적으로도 그러지만, 많은 걸 가르치고 계시드만요. 참 지독하게 열심히 믿으셨어요. 총장님이 여기 매산학교 나오시고 전주 신흥학교에 가셨어요. 크레인 목사가 뭔가 해주시고, 고학하시고 그래서 우리 총장님을 하나님이 주셨다고 그러시고 얼마나 얼마나 감사하고 그렇게 하시드만요.

기독교와 인연을 맺은 것이 박씨 일문을 일으켜 세우는 최초의 계기가 되었고, 이어 일본인 농장의 관리인을 한 것이 튼튼한 기반으로 연결 되었다는 것이다.

살림이 왜 좋아졌냐면은, 우리 아버님이 그래도 선각잡니다. 기독교를 하시고, 동학을 하시면서 많은 걸 배워 가지고 우리 돌아가신 시숙님이 큰아버님이지요. 그분을 숭실학교에 넣었어요. 숭실학교가 서울에 있지 않았습니다, 평양에 있었지. 그래 거기 가서 공부를 하고 오시니까 일본말을 하세요. 그래가지고 거기 간척지를 생마 농장이라고 아이마라고 하는 일본사람이 와서 간척지를 막았어요. 그런데 일본말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우리 시숙님이 그 생마 농장의 감독을 하셨거든요. 그러니까 쌀 쭉정이라도 있었지 않았겠습니까, 다 가져가도 마지막에 쭉정이라도 흔들면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 아버님 댁에서는 밥을 먹습디다. 일본말을 할 줄 아니까 거기서 관리인을 했지요.

다음 박철웅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래도 농민군의 후예답게 일본인과의 민족적 싸움에 뛰어들었으나 자신의 경력에서는 그것을 애써 내세우지는 않았다 한다.

광주학생사건 때 총장님 열일곱 살 땐데, 일학년이예요. 광주학생사건이 났거든요. 옛날에 총장님 존함이 박문수였어요. 크면은 문수같이 돼라, 문수같이 돼라 그러셨대요. 그러면서 광주학생사건 때 총장님이 전주 신흥학교에서 무슨 다리가 하나 있었다고 그러대요. 그 다리를 건너가지고 전부 학생들을 몰고 나오는데, 제일 어리지요, 장가간 학생들도 있고 그런데. 거기서 인제 총장님이 대표로 내가 다 시켰다고 그러고 잡혀 들어가서 형무소를 일년인가 살으셔가지고, 나오시니까 배은희[裵恩希 : 대구 출신으로 나중에 자유당 정치인으로 활동] 목사라고 그분하고 교회 사람들이랑 학교에서 전부 다 그 열일곱 살난 애기 하나를 환영할려고 아주 인산인해를 이루어서 총장님 나오시니까 박수를 치고, 배은희 목사가 안아서 집으로 데리고 가서 치료해가지고 거기서 공부시키고 그러셨드만요. 옛날 형무소가 얼마나 더러웠겠습니까. 그러니까 옴에다가 이질에다가. 그래도 총장님이 한번도 충청남도[독립기념관] 어디 있지 않습니까, 거기 내 이름 올라가야 된다는 얘기 안해요. 왜냐하니 나만 고생했냐 그거예요. 너무 많은 사람이 고생했는데. 그러고 지하실에서 밤새도록 태극기를 그리셨다는 말씀은 총장님 당신이 하시드만요. 아침에 갔는데, 가슴이 막 두근두근하더라구 그러시대요, 어려서. 지금 아마 총장님 기록이 일본 홍고경찰서에 가면 있을 겁니다.

광주학생사건의 관련자로 형무소에서 1년간을 보냈다는 사실은 아버지의 피가 흐른다는 뜻일 게다. 그리고 현해탄을 건너 일본에 가 유학생활을 할 때의 이야기다.

민족학교라는 걸 맨들었어요. 황성수[黃聖秀 : 국회부의장 지냄]씨랑 전부 다. 총장님이 그때 대장이 나서 얼마나 또 거기서 일본서 독립운동 하다가 홍고경찰서에 가서 고문을 또 얼마나 당하셨는지. 이은태[李恩泰 : 여수 출신으로 국회의원 지냄] 씨라고 있지요. 이은태씨가 그때 명치대학을 같이 댕기셨는데, 총장님보다 후배지요. 형무소에서 나와가지고 학교에서도 많이 기다리고 있다가 당신을 찾더래요. 갔더니 야 은태야 뭐 먹을 거 없냐 그러드래요. 형무소에서 나왔으니 뭐 먹을 게 있었겠습니까. 총장님 공부하시고 고생한 거[말도 못할 정도로 많다]. 민족학교는 황성수씨랑 같이 했어요. 뭐를 기억하고 나를 보고 얘기를 하시냐면요, 아 일본놈들이 가난한 놈들은 전부 거리로 데리고 다니면서 신문배달 시키고, 조센징이라고 해가지고 총장님은 달동네 있지 않아요, 그런 데만 이제 배달을 시키드래요. 신문을 지면은 겨우 손가락이 구부러질 정도만 많이 가지고 달동네로 올라갔다가 겨울에 얼음에 미끄러졌대요. 그러니 그 신문이 다 언덕으로 흐트러졌을 거 아닙니까. 그걸 다 줏어가지고 다시 배달하고.

그런데 박철웅이 일본에 가서 뼈에 사무치게 느낀 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조선에도 그럴 듯한 대학교가 있어야 하겠다는 것.

그런데 내 제일 중요한 얘기는 우리 시어머니한테 들은 얘긴데, 당신이 일본서 공부를 거반 다 끝나게 되니까, 어머니 일본 구경 한번 시켜드린다고, 오라고 그래서 가셨대요. 뭐 넉넉하지도 않은 세상인데 인제 오라고 해서 갔더니, 와세다 대학인지 뭔지 계단이 아주 길더래요. 거기를 올라갔는데, 우리 한국 애기들이 꾀 벗고 먼지 묻고 코 이만큼씩 달고, 꼬치 다 내놓고 일본학생들이 내버린 담배꽁초들 줏고 있더래요. 그래 총장님이 어머니하고 오면서, 너무너무 자존심 상해서 나 저 새끼들 다 데리고 죽고싶다고 그러면서,나 고향 돌아가면은 꼭 이런 대학을 세워가지고 저 새끼들 다 공부시키겠다고 그러시드래요. 그것을 실현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우리 학교 이거 다 뺏겼지만은.

일본에서 한국인의 자존심을 세우려는 결심이 결국 조선대 설립으로 결실을 맺었으나, 최근 민주화과정에서 조선대사건이 터지고 그 결과 박철웅이 손을 뗀 것이 못내 아쉽고 허전하다는 이야기인데, 화살은 계속 날아간다.

그러니까 요새 젊은 사람들은 우리 세대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들은 그거 몰라요. 그런 사정들은 모르고, 요새 젊은 것들이 기타나 타고, 연애나 하고, 뭐 기분이 어떻고. 기분 생각할 사이가 어디 있습니까? 하도 배가 고프니까. 내가 일제 말에 함흥 영생고녀 선생을 했거든요. 그런데 겨울에 여자들이 명태를 팔러 나와요. 짚새기가 얼음에 다 젖지요. 그런 걸 신고 와가지고 시장을 다 들어와야 짚새기는 어디다 묶어놓고서 고무신을 신드라구요. 그렇게들 고생해서 자손들 키우고, 공부 시키고, 그 덕인 줄을 몰라요, 이 젊은이들이.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선배의 메시지다.

과거에 조상들이 비참했지만 일본놈한테 굴하지 않고 살았다는 것은 기가 맥힌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떠들고 까불고 댕기는 놈들 과거에 어느 집 자손인지도 모르고, 갑자기 부자들이 되니까 자기가 제일 잘난 줄 알아요. 자기밖에 없는 줄 알아요. 과거에 할아버지 때, 아버지 때 생각을 안하고 요새 땅투기나 하고 뭐이나 조금해서 산업이 좀 발전하니까, 온천을 간다 어디에 간다 그 사치들을 하고, 차를 굴리고 돌아다니고, 어떻게 나라가 될려고 그러는지. 참 걱정을 합니다.

최근 우리 사회의 혼란이 바로 과거를 자꾸 잊어가기 때문이라는 뼈아픈 지적을 할 때는 힘이 들어 있고 약간 상기되어 있다. 요즈음의 여러 말들을 의식한 것일까. “우리는 얼마 살지도 못하겠지만. 옛날 동학이 가졌던 그 기백, 그 일제에 항거하느라고 애쓴 사상. 지금도 마찬가지지요”라고 말하는 정애리시의 얼굴에는 지난날 투쟁하던 선조의 모습이 떠오르는지 사뭇 긴장된 빛을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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