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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록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토호들이 벌벌 떨던 무주 농민군 지도자 이형택, 증손 영철
대상인물

이형택(李馨澤)

1859~1895. 본관은 여주. 자는 응백(應伯). 무주에서 농민군 지도자로 활동하다 1895년 을미년 일병에게 체포되어 희생됨.

증언인물

이영철(李永澈)




1932~ . 이형택의 증손. 자는 준지(俊址). 친척 할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웠고, 영동농고를 나와 경희대를 중퇴함. 서울에서 서예학원을 운영.



가계도
가계도 이미지
정리자

박준성

출전

다시피는 녹두꽃

내 용

오지영은 『동학사』에서, 1894년 3월 무장에서 기포한 뒤 고부성을 함락하고 백산에 진을 치고 격문을 발표한 뒤 각지에서 모여든 장령(將領)급 지도자들을 밝히고 있다. 이때 무주에서는 이응백(李應白), 윤민갈(尹玟葛), 성순(成淳) 들이 참가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다시 2차 농민전쟁 때 이응백이 9월 말 무주에서 기병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 무주의 이응백과 여기서 말하는 이형택의 자(字) 이응백은 활동으로 보아 같은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증손 이영철은 전해들은 증조부의 활동을 이렇게 알려준다.

전해지는 얘기로는 삼천 명 대장이셔 가지고 무주, 진안, 장수, 금산, 옥천, 영동, 보은 칠개군의 대장이셨대요. 이 할아버지가 토호를 잡아다가 쌀되는 말에다가 무릎을 꿇려가지고 말꿇림 벌을 줬대요. 그래가지고 양쪽에 말 두 개 놓고서 집어넣으면 병신된대요. 할아버지 앞에서는 누구든지, 그래 누구든 무주 군수로 올라고 안해, 거기 가면 다 죽고 당하고 하니까.

동학사와 증언을 바탕으로 보면 이형택은 1차 농민전쟁부터 2차 농민전쟁에 이르기까지 무주를 중심으로 인근 진안 장수, 금산, 옥천, 영동, 보은에서 활동하다가 잡혀 희생된 농민군 지도자였다. 이형택은 토호에게 단호했으며, 그가 활동하던 무주에는 농민전쟁 기간에 부사가 제대로 부임하질 못하였다. 실제 1894년 농민전쟁 전개과정에서 무주 부사 신경균(申慶均)이 사직하고 떠난 이후 그 후임으로 부임하게 되었던 조성희(趙性憙), 윤필구(尹泌求) 부사도 부임하지 못하고 사임하고 말았다. 증언만으로는 이형택의 활동 내용을 더 이상 알기 힘들다. 그런데 1957년에 만들어진 『적성지(赤城誌)』에는 이형택의 행적이 좀더 구체적으로 실려 있다. 이형택은 적상(赤裳) 사람이었다. 그때 서울에서 사대부라고 자칭하는 자가 무주에 우거하면서 거민에게 위세를 부리고 토색이 자심하였다. 형택의 아버지 내습(乃習 : 경석의 字)이 선산을 그 토호에게 빼앗기고 도리어 가혹한 형벌을 당한 일이 있었다. 아들들이 원통하고 분하여 설욕하기로 하고, 서로 상의하여 사방에 “지금 탐관오리로서 양반이라고 자칭하는 자들이 자기 이익에만 힘쓰고 인민의 고혈을 착취하고 거민을 도탄에 빠뜨리고 있으니 내가 마땅히 선두에 서서 이자들을 숙청하고 위기에 처한 민족을 구출하려 하니 바라건대 따르려는 사람들은 즉시 궐기하라”는 통문을 발송하였다. 다음날 이른 아침 수천 군중이 이에 모여 들어 호응하였다. 드디어 관아를 점령하고 토호 수십 명을 결박하여 곤욕을 보이고 다른 지방으로 쫓아보냈다. 그리고 “지금 왜인들이 호시탐탐 우리나라를 노려 국가의 존망이 조석에 있거늘 소위 사대부란 자들이 국가의 녹을 먹는 신하로서 몸을 바칠 것은 생각지 않고 두려워 떨면서도 인민의 재산을 약탈하여 사리에만 급급하고 있으니 단연코 이자들을 용서할 수 없다. 이제 내가 무도함을 없애고 우리 동지들과 경내 서민들을 구하고저 하니 각자 안도하라”고 선언하고, “①군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 ②계급을 타파한다, ③순천자(順天者)는 보호하고 역천자(逆天者)는 처벌한다”는 법 3장을 공포하였다. 이에 군중이 환호하여 동학에 들어가려는 사람이 많았다. 형택은 3천 명의 포군을 단속하여 외적을 방비하니 위세가 크게 떨쳤다(『赤城誌』地. 1968년 당시 98세였던 무주 읍내 사는 황일성(黃一成) 옹의 말에 의하면 1894년 농민전쟁 때 무주 부내에서 가장 권세가 높던 사대부의 집 3채를 헐었다고 술회하였다(『茂朱郡誌, 무주군지편찬위원회). 이형택의 가문은 원래 이규보의 후손으로서 양반 집안이었다. 아버지 경석도 ‘선략장군행용양위부호군(宣略將軍行龍?衛副護軍)의 직함을 가졌다. 생활도 살 만했다.

우리 집안이 원래 이규보씨 후손이예요. 그러니까 원래는 양반집이었지요. 그러니까 말도 있고 그랬겠지요. 백마가 일곱 필이라는 얘기만 들었어요. 살 만하게 됐다고 그래요. 이 할아버지의 형제간들이 오형젠데 키가 일 미터 팔십이 다 넘었대요. 그래가지고 백마를 타고 삼형제가 나오면 무주에 시장보다가, 시골에서는 오일장이잖아요, 전부 장사 안하고 구경하느라구요. 말이 일곱 필 있었다면 가정은 어느 정도 생활할 만한데, 이 할아버지가 의협심이 강해가지고 이런 일을 했나봐요.

탐관오리와 토호들의 억압과 착취를 없애고 위기에 처한 민족을 구하려 농민전쟁에 참가하여 지도자로 활동하였던 이형택은 이듬해 1895년 1월 10일 서른여섯의 나이로 일본군에 잡혀 살해되고 말았다. 쉰다섯 되었던 그의 아버지도 아들의 활동 때문에 잡혀서 죽었는지 3월 13일 돌아갔다.

어떻게 잽혔는지는 알 수 없고, 시장에 나와서 말타고 가다가 잽혔다고. 재판을 해야 하는데, 그때는 그런 게 없잖아요. 뽕나무 밭에서 묶어놓고 결박당해가지고 거기서 살해당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때 부자간에 돌아가셨다는 말을 집안 할아버지들한테 들었어요. 부자간에 살해되셨다는 말이 맞지요?

부자가 죽은 뒤 이형택의 부인은 “잽히면 삼족을 멸할 때니까 다른 데로 시집을 갔고”, 여섯 살난 형택의 아들은 친척이 데리고 충북 영동으로 피신하였다. 그 이후의 생활은 농민군 후손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어려움이 계속이었다.

돌아가셔서 무주에 있으면 죽으니까 집안 어른이 손이나 이어야 되겠다고 영동으로 피신시킨 거예요. 집안이 풍비박산이 되어가지고, 다 뿔뿔이 흩어지고. 집안이 다 망하고 멸족되고 하는데. 영동에는 연고가 없었어요. 전연 연고가 없는 데니까 순 머슴살이만 했으니 국민학교도 못 나았어요. 그 지경이니 오죽 힘들었겠어요. 옛날에 독립운동한 사람들 고생 안한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영동으로 가서 머슴살이하며 어렵게 생활하면서도 증언자 이영철의 아버지 중현(형택의 손자)은, 3대 독자인데 “평생 동안 손이 많기를 원했는데 우리 아들 사형제, 딸 삼형제를 나서 흡족해하시고 돌아가셨다”고 한다. 무주에 있던 재산은 역적이라고 해서 다 빼았겼지만 머슴살이하면서 마련한 논을 팔아가면서 자식들 공부도 시킬 만큼 시켰다.

나는 영동농고 나오고, 경희대학교 나오고 아까 그 할아버지[증언자의 할아버지를 데리고 영동으로 피신한]한테 육년 동안 한문 배운 게 서예학원 하는 시초가 된 거예요. 니 증조할아버지는 칠개 군을 장악한 대장이셨는데, 니들은 말이야 그렇게 훌륭하게 될라면 한문을 배워야지 한문을 안 배우면 안된다고. 아홉 살 때 국민학교에 들어가서 열다섯 살에 졸업하고 중학교는 못 갔어. 한문 배우라고 중학교를 안 보내요. 언문 배우는 거 뭐하러 가느냐고. 현재 나이가 예순셋이요[32년생]. 그래서 삼년 동안 서당에 다니며 할아버지한테 배우고 고등공민학교를 다녔어요. 내가 학교 다닌다고 그냥 가서 접수했어요. 그때 고등학교 학생들 모자 쓰고 교복 입은 거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어요. 나라고 못 배울 거 있냐고 접수했어요. 영동농고 나와가지고 경희대 법대 다니다가 중퇴했어요. 내 바로 밑에 동생이 그렇게 머리가 좋아요. 그래 중앙대 경영학과 입학시키느라고. 형은 배우고 동생은 안 가르치면 나중에 원망을 얼마나 듣겠느냐 이거야. 그래 가지고 나 삼학년 때 중퇴하고 등록금 받은 걸 동생 입학금 대줬지요. 그래서 동생들은 한 놈은 제수씨가 숙대 약대를 나와서 약국을 하니까 괜찮고, 또 하나는 안경점을 하고, 막내는 공무원이고 동작구청. 아버님이 못 배워서 그 논을 팔아서, 우리 공부시켰어요. 그때는 가르친다는 것이 논 파는 것밖에 뭐 있어요.

끝으로 무주에 있던 재산은 다 빼앗겼다고 거듭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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