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김학삼(金學三)
1852~1894. 본관은 김해. 족보명은 상휴(相休), 학삼(學三)은 자, 호는 모성당(慕聖堂). 당시 관산접주로서 활약하다가 장흥 지역 전투에 참여하였고, 12월 15일 석대들에서 패전한 후 처가가 있던 방촌에 피신해 있다가 체포되어 12월 26일 장흥 벽사역에서 42세의 나이로 처형당함.
김병운(金炳云)
1934~ . 족보명은 철호(哲鎬). 김학삼의 증손으로 일본에서 출생. 1945년 겨울에 부친을 따라 귀국하여 고등학교를 마치고 『호남일보』에 재직하다가 지금은 고향인 장흥에서 활동중.
우윤
다시피는 녹두꽃
당시 장흥은 1880년대 초에 이미 동학도인이 있었으나 1891년이 되어야 이인환, 이방언, 문남택 등의 접주들이 입도하여 교세가 수천 명 정도에 이르게 되었다. 이즈음 이방언과 내종당숙질 사이인 김학삼도 입도한 것으로 보이며, 이후 관산접주가 되어 장흥지역의 주요 인물로 부상하여 농민전쟁에 참여하였다. 일반적으로 선조에 대한 희미한 기억만을 갖고 있는 농민군 후손들인데, 김병운 역시 증조부 김학삼은 물론이고 당시 집안형편에 대한 기억이 분명하지 않다. “재산 관계는 잘 모르겠어요. 그러나 먹고살 만하니까 주도했겠지요. 주도를 할라면 말만 갖고 기운만 갖고는 되지 않고 어느 정도 돈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수긍할 수 있는 말이다. 이어 김병운은 “양반이었지요. 십팔대 중시조가 김조라고 계셨어요. 그분이 예조판서 하시고, 충청감사, 경상감사를 하셨어요. 또 김학삼씨로 해서는 증조부께서 학자였지요, 매헌공[梅軒公]이라고” 집안이 시골 양반 축에는 끼였음을 강조한다. 이런 집안에서 태어난 김학삼이 동학 접주로 활약했다는 사실이 김병운에게는 아쉬운 추억과 함께 기억되고 있다.
중학교 이학년 땐가 여름방학 땔 거예요. 할아버지께서 하루는 나를 오라고 해서 농 안있습니까? 궤짝에서 노란봉투를 내주시면서 이것이 너로 해서 증조할아버지 유품이다, 그러니까 잘 보관해라 하셨는데. 우리가 크면서 시대가 얼마나 복잡했습니까? 여순반란사건, 육이오동란, 여순반란 사건 때는 학교가 중도 폐교했지요. 그 뒤로 중학교를 다니고, 광주까지 올라가서 고등학교까지 다녔지요. 그 과정이 상당히 복잡해서 나이는 모르겠습니다만, 내가 집에 있는 중이요. 광주 학교로 가기 전에 하도 가사가 복잡하고 그래서 전부 다 없애버렸어요. 인제 후회가 되지 않습니까. 봉투에 써진 주소는 알겠어요. 서울 종로구까지는 알겠어요. 서울 종로구 관훈동인가 어딘가는 몰라도 거기서 보낸 편지예요. 그런게 천도교 중앙본부에서 왔었는가 그 당시 그렇게 추측이 되겄지요. 그것이 통문이었든가 어떤 서류였든가, 두툼했었으니까.
아마 김학삼이 관산접주였음을 추인하는 천도교측의 편지였을지도 모르지만 복잡하고 어려운 가사 속에서 계속 보관하기가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김학삼이 이방언과의 인척관계라는 김병운의 말에서 당시 향촌에서의 혈연관계가 동학조직과 포교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당시 이방언은 장흥 용산면 일대에서 세력이 가장 큰 대접주였으므로 김학삼을 쉽게 끌어들였을 것이다.
증조부께서 이방언 장군하고 내종당숙이 돼요. 그런 관계로 해서, 또 그렇게 할 만하니까 접주도 하셨을 테고, 관산 이남은 전부 다 관산에 집결한 모양이예요. 그래가지고 묵촌 앞의 이방언 장군 밑으로 전부 다 모였다고 봐야지요, 제 추측입니다.
따라서 관산접주가 된 김학삼은 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이방언 휘하에 집결하여 1차 기병 때부터 활약상을 보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농민전쟁에서 장흥이 주 격전지가 아닌 관계로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공주 대회전이 패전으로 막을 내리고 농민군들이 쫓겨 남쪽으로 밀려와 장흥이 마침내 주 격전장이 되면서 세인의 비상한 관심을 끌게 되었다. 이때부터 장흥 농민군은 장령성(l2월 5일)과 강진현(12월 7일), 강진병영(12월 10일)을 점령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펼치고 최후의 큰 싸움을 치러야 했다. 물론 그 이전부터 이 지역은 반농민군의 활동이 활발하며 대격전의 가능성은 이미 심지에 불붙어 있는 상태였다. 즉 9월 중순부터 강진현 이교들이 강진 경내 민정(民丁)을 모아 낮에는 축성하고 밤에는 함성을 질러 성을 지켰고, 10월 1일 강진병영에 설치된 집강소를 혁파하고 수성소(守城所)를 세워 이 지역 농민군을 진압하려는 움직임에 착수하였다. 이에 대하여 농민군 쪽에서도 10월 16일 장홍 사창 장터에 천여 명을 모아 수성소의 움직임에 대응하였다. 그러자 수성소에서는 10월 18일 수천 명의 민군을 징발하여 병영 장대에서 조련을 실시함으로써 이 지역 농민군을 토벌하려는 대규모 반농민군 활동에 본격적으로 돌입하였다. 11월 3일에는 강진병영 무사와 이교들이 모두 모여 영내의 농민군 집을 훼파하기도 하였고, 11월 6일에는 수성군이 해남현에까지 나아가 농민군 5명을 체포하였고 농민군의 무기들을 탈취하여 돌아오기도 하였다. 이는 분명 이 지역 농민군에게 대단한 위협이었고, 이에 따라 장흥의 농민군은 논산 대본영에 있는 전봉준에게 구조를 요청하였다. 논산 대본영에서는 금구의 김방서(金邦瑞)로 하여금 구원군을 이끌고 내려가게 하였다. 이리하여 김방서의 구원군이 내려오게 되었고, 뒤이어 공주 대회전에서 밀린 농민군이 장흥에 집결하자 건곤일척의 대격전이 눈앞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드디어 12월 15일 석대들은 농민군의 함성으로 덮이고 화약연기가 하늘을 가렸다. 그러나 우수한 화력과 매서운 날씨에 밀린 농민군은 승리의 벽을 넘지 못하였다. 이때 김학삼도 농민군을 이끌고 전투에 참가하였으나 밀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후 김학삼의 행적에 대해 김병운으로 부터 들어보자.
인제 처형당하신 과정은 알고 있지요. 비석에 전부 다 되어 있습니다만은, 석대전에서 완전 패전해가지고 자울재를 넘어서 피신하셨는데요. 집으로 가셨나 어쨌나는 몰라도 자기 처가를 가셨어요. 처가가 방촌인데, 거기서 숨어 계셨는데 일본헌병과 우리나라 관리들이 찾으러 다닐 것 아닙니까, 지도자니까. 그래서 도저히 처가가 살 수가 없게 됐어요. 거기 숨어 있는 것을 동네사람들이 다 알고 있으니까 말이 자꾸 들어가지요. 짚벼늘[벼를 훑은 후 짚을 쌓아둔 것] 속에 굴을 뚫어 그 속에 숨어 계시다가 처가가 멸족하게 돼있거든요. 그래서 강진 대구면 구수리라는 데가 큰댁이어서, 그리로 피신하시려고 친구하고 가셨는데, 뭣을 두고 가셨어요. 서류였던 모양이지요. 그래서 다시 처가로 왔다가 잽혀버렸어요. 그리고 고문당할 때 혀를 절단하셔서 말씀을 안하셨답니다. 전에 할머님이 이야기를 자주 하셨는데, 내가 우리말을 잘 못알아먹고 그런 때라 놔서 기억이 잘 안 나요. 또 숙부님도 자주 이야기를 하시고 그래도 어려서라 뭔 관심이 없었지요. 지금 국민학생들 광주사태 때 이야기하면 뭘 알겠어요? 실감이 안 가지요. 결국 장흥 벽사역에서 화형을 당하셨지요. 유지기를 씌워서.
무슨 서류를 빠뜨려놓았던가, 안타깝게도 그 서류로 인해 김학삼은 체포되어 처형당하고 말았는데…. 그런데 그 뒤 시신을 찾아 수습하는 이야기는 더욱 기가 막힌다.
그 시신을 증조모님께서 어떻게 찾았느냐 하면, 옛날에는 버선발하지 않습니까? 버선 댓님을 잇는데, 댓님가에 수가 놓아져 있었는데, 그것이 안 타졌나 봅니다. 자기가 손수 놓은 수니까 그걸 보고서 남편인 줄 알고, 자울재를 넘어서 송산이니까 삼십 리 길이지요. 그 삼십 리 길을 머리에 이고 오셧어요. 그러니까 증조모님께서도 여장부셨나봐요. 증조부님께서 칠 척 장신이셨다는데 그걸 이고 오셨다니. 그래서 길가에 남의 산에다가 모셔드렸는데, 지금도 그 자리에 봉분만 키워서 조그만한 돌이라도 하나 세워놓았습니다.
김학삼이 처형당하고 난 뒤의 집안은 자연히 내리막길이었다. 김병운의 부친은 이곳에서 살기가 힘들어 도일(渡日)을 결심하고 현해탄을 건넜다.
할아버지대는 형제분인데 전부 다 피난가시고, 잡혔으면 돌아가셨지요. 처음에는 방촌 외가로 가셨다가, 안양면으로 가셨다가, 다시 원림으로 오셔서 거기 가서 정착했지요. 저도 현재 그 집에서 살고 있지요. 재산은 하나도 없지요. 그러니까 남의 집 머슴 살았지요. 할아버지 형제분들은 전부 다 남의 집살이 하고. 아버지 형제분이 삼남맨데, 두 분이 일본에 가셨지요. 40년쯤이지요. 살기가 곤란하니까 가셨을 테지요. 여기서는 처세를 할 수가 없지요. 역적의 손이라 해가지고. 저는 직접 피해받은 것은 없고, 아버님은 정신적으로 은연중에 받았을 거예요. 그러니까 일본으로 가셨지요. 거기서 내가 출생을 했어요. 열세 살 때 내가 우리나라에 왔거든요. 그러고 보니까 우리말을 모르지 않습니까? 열세 살이니까 육학년인데 여기 와서 다시 오학년으로 들어갔어요. 지금도 말이 잘 안 돌아가지요.
일본군의 개입 때문에 패배하여 처형당한 농민군의 후손이 일본에 건너가 살아야 했고, 또 그 아들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산 덕분(?)에 아직도 우리말이 서툴다는 대목에서는 그동안 우리의 역사가 몇 겹으로 꼬인 것을 실감케 한다. 김병운의 아버지는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 생활의 짐에 부대껴서인지 김학삼에 대한 말을 일체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마음이 편했을지도 모른다.
아버님께서 절대 증조부님에 대해서 말씀 안하셔요. 내가 중학교 다닐 땐데 해방 후 방학 때 집에 있는데 사학자들이 찾아왔는데 절대 말씀을 안하셨어요. 부친께서는 저에게도 감추셨어요. 저는 고등학교를 나와가지고 집에 있는 판인데 내 삼종동생이 장흥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어요. 그 당시 장흥 향토지가 나왔거든요. 거기를 보니까 그 사람에게는 재증조지요, 재증조께서 향토지에 나왔습디다. 그때까지 나는 전혀 모르는 사실이었지요.
향토지를 통해 증조부와 농민전쟁에 대해 겨우 눈뜨기 시작한 김병운은 광주에서 호남일보사에 잠시 재직하다가 아버님의 권유로 귀향하여 최근에는 농민전쟁 관련 사업을 벌이기도 하였으나, 생활에 쫓기다보니 잠시 중단되고 있는 것이 내내 께름칙한 모양이었다.
제가 73년도에 자손찾기 운동을 했었는데, 계속 했어야 해요. 계속 했으면 올해도 장흥군에서 행사를 가졌을 텐데. 경제적으로 어렵고, 농촌이다 보니까 사람이 활동을 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먹고살기에 바쁘다보니까 의욕이 사라집디다. 오륙 년 동안 안했어요. 실제는 오륙 년 전까지 계속 했지요. 자녀들 교육시키다보니까 눈코 뜰새없이 바빠부르지요. 그래서 중단된 것이 딱 백주년 되야부럿어요. 이야기만 하고 실행을 못했어요. 그런데 [유족회 창립관계] 서울에서 연락이 와서 서울까지 다녀오고 제 마음이 흐뭇하지요. 앞으로 적극 참여를 해야지요. 앞으로 조상들에 대한 불명예를 씻을 수 있게끄름, 일반 국민들이 이해할 수 있을끄름만 했으면 좋겠어요.
그동안 농민전쟁 백주년 사업의 일환으로 대중사업은 물론이고, 특히 TV, 라디오 등의 대중매체에서 농민전쟁을 다루는 드라마와 다큐멘터리가 방영된 덕분에 유족들의 한맺힌 응어리가 조금씩 풀려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고, 그리고 마침내 1994년 3월 3일 농민군 유족회가 창립되기에 이르렀으니 유족들의 지역사업 전개와 권익 옹호에 나름대로 큰 역할을 하리라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