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문장로(文章魯)
1846~1919. 본관은 남평. 통훈대부충위참봉(通訓大夫忠衛參奉). 서산군 원복면 방갈리에서 태어나 태안 접주로 활동하던 중 1894년 10월 1일 방갈리에서 기포. 태안, 해미, 홍성 전투에 참가. 패배 후 광천 독배로 피신. 서산, 태안 등지의 기포가 9월 30일 밤에 문장로의 집에서 모의되었다고 함.
1872~1894. 문장로의 조카로 부접주. 큰아버지 문장로와 함께 활동하다 패배 후 체포되어 1894년 11월 16일 태안 개울가에서 총살됨.
문원정(文源貞)
1925~ . 문장로의 손자. 문구석의 조카. 현재 토목사업에 종사.
배항섭
다시피는 녹두꽃
문장로는 중농 정도의 집안에서 4형제 가운데 맏아들로 태어났다.
우리 할아버지 형제분이 사형제분인데, 그 중에 [문장로가] 제일 첫째. 우리 할아버지 경로를 말하면 내가 보지도 않고, 우리 아버지한테 들은 걸로만 전해지는데 우리 아버지가 갑오년에 네 살 잡쉈다요. 그때 삼백여 석 갖고 살았당께 태안서는 일류 집안이지. 그래도 우리 할아버지는 ‘이게 아니다. 이 정신은 벗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것갖고는 안된다. 이 세상 운수를. 돈 있구 쌀 많아도 우리 할아버지는 그걸 타개해야 한다 이랬다 이거여. 아들까지 죽여가며 말이여. 그래서 살면서 원북면, 이북면 친구들 모여서 앞으로 동학혁명이 일어나야 우리가 살 수 있다는 것을 계몽시켜 가면서 주도하신 양반이다 이거여.
문장로와 문구석의 활동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네 살 때니까 할아버지가 어떻게 어떻게 하는지 다 알지. 큰어머니가 우리 한 스물댓 살 먹을 때까장도 생존해 계셨는디. 우리 큰아버지가 할아버지하고 직접 동학에 가담하셨어. 큰아버지는 문구석씨여, 거북 구, 주석 석자, 헌디 10월 1일날 원북 방갈리서부터 기포해서 태안성을 쳐냈다 이거야. 그래서 우리 할아버지가 그때 접주였는데, 그땐 접주가 소접주니께 각 요소 요소마다 여럿이었던 모양이여. 태안성을 첫날 치구서 그 뒷날 동학군이 거기서 유교군[유회군]하고 싸워갖구서 승리는 했는데, 승리해서 서산성으로 가는 도중에 누구를 만났는가 하면 왜군들. 왜군들을 만나서 태안서 후퇴하는 동시에 재접전을 붙으면서 아주 완전하게 파멸상태로다 돌입되어갖구 다시 후퇴명령을 내려서, 거기가 어디냐면 삭선, 지금 미군부대 있는데, 원북면 소재지 근처야. 거기 펀덕지라고 하는 데 재정비했어. 재정비해서 태안성 재전투에 승리를 거뒀어. 그리고 거기서 또 재정비해서 나쁜 놈들 붙잡는 대로 막 처단하고, 서산성을 치구 해미성을 치러 가는 순간에 그 날짜가 무려 한 십여 일 걸렸다는겨. 그래서 거기서 다시 후퇴명령을 내렸어. 우리 큰어머니 말씀이, 그땐 접주가 하도 많아서 오십 명 단위면 아마 일개 소대 정도 되었던 모양이여. 그래갖구 사상자가 상당히 많아서 어떻게 할 방법이 안 나고 또 유교군과 왜군들은 점점 강성해서 홍성서 막 넘어오고 서산서 넘어오고 해서 할 수 없이 우리 큰아버지, 우리 일가들 해서 일곱 명이 붙잡혔어. 근데 우리 큰아버지가 그때 연세가 스물두 살. 큰아버지가 부접주로 되어갖구서, 태안 대호리라는 데가 있어, 태안서 내려오는 큰 개울에서 총맞아 돌아가신 자리라 내가 알어. 저 미루나무 밑에서 두루마기 옷고름에다 이렇게 대고서 큰아버지가 복부에 총맞아 돌아가셨다 해서 우리 큰어머니가 큰아버지를 일관하고 해서 모셔왔다는 그런 말씀을 하셨고, 그때 돌아가실 때 일곱 사람이 죽었단 말이여.
그러나 이 대목에는 얼마간의 혼돈이 있다. 문장로와 문구석이 태안에서 기포한 사실과 태안읍을 공격한 데까지는 다른 기록에도 나와 있다(조석헌, 『역사』). 그러나 10월 초 태안에서 서산으로 가는 도중 ‘왜군’을 만났다는 점은 착오일 가능성이 많다. 왜군들이 이 지역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농민군 진압에 나선 것은 10월 중순이 지나서이다. 그것은 홍성 전투(10월 28일)에서 관군, 일본군, 유회군의 연합 부대와 접전하여 패퇴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큰아버지(문구석)는 11월 16일이 기일인 것으로 보아, 대체로 홍성에서 패퇴한 후 해미(11월 8일), 서산(11월 8일) 등지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일본군과 관군에 몰려 흩어진 직후에 체포되어 처형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체포된 큰아버지의 목숨을 흥정하는 일본인들에게 사기를 당해 몰래 간직해뒀던 전재산을 날렸고, 관의 눈이 무서워 장례조차 제대로 못 지냈다 한다. 우리 큰아버지는 갑오년 스물두 살에, 큰아버지도 보통 아니었어.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고. 그런데 일본놈한테 붙잡혀서 너희 집에 돈 많으니까 돈 내놔라 해서 돈 준다 말여. 잿무덤[밭에 거름으로 쓰려는 재]에다 오쟁이에다 엽전 이백 냥을 넣어 묻어뒀다니까, 우리 큰어머니랑 할머니보고 너희 아들 안 죽일 테니까 돈 내놔라 그런께 잿무덤에서 꺼내 이백 냥을 내줬는데 떡허니 태안 개울가에 가보니까 총살당했다 이거여. 그런께 시체 가져가라는 것밖에 더 있느냐 이거여. 시신을 수습해다 모시는디 장사지낼 수가 없었다여. 하도 겁이 나고 못하게 해서 그래 우리 큰아버지 시신을 일꾼하고 데려다가 부엌 살강 밑에다 파서 묻었다는 거여. 사년 만에야 비로소 산에다 묻었어. 얼마나 징하고 혹독하면 그렇게 했느냐 이거여.
그러나 할아버지(문장로)는 다행히 체포되지는 않았으나, 그 후의 생활은 차라리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우리 할아버지는 그때 도피상태였어. 도피상태인데 태안서 이미 다 왜군하고 유교군이 완전 구성이 되서 더이상 재접전할 수 있는, 동학군으로만 어떻게 할 수 없다 이거야. 그래서 우리 할아버지가 접주라도 최대 강력하게, 우리 할아버지가 움직였다는 말씀을 하시더라구. 그래서 우리 할아버지를 잡느라 방을 걸었는디 그때 돈으로 천 냥이었어. 그런데 잡히나. 그냥 산 속으로 가서 큰어머니가 밥을 밤으로 이어다가 굴에다 해서 드리구 이렇게 해서 거기서 칠년인가 숨어살았대.
문원정은 그 산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정확히 몰랐으나, 그 뒤의 도피 행로에 대해서는 기억을 하고 있었다.
방갈리 무슨 산이여. 그래서 “도저히 여기선 타개해 나갈 수 없으니께 도피하는 수밖에 없습니다”하고 식구들이 그렇게 이야기했어. 그런디 우리 아버지는 열두 살이었고 또 할아버지 의붓아들이 있었어. 따지면 우리 할머니를 다시 얻었어. 다시 얻은 분이 우리들 할머니가 되어 우리 아버지 낳았구. 근디 데리고 온 할머니가 먼저 영감께서 난 데리고 온 아들이 둘 있어. 그분이 조씨야. 그래서 할아버지가 문장로이기 때문에 문씨만 되면 어쨌든 걸리게 되서 조씨 성을 따랐다 이거야. 그런데 문장로는 아들이 하나다[라는 소문이 있었어]. 문장로라는 사람은 아들이 하나만 있고 딸하고 세 식구밖에 없다, 이렇게 얘기해서 그 사람만 잡으면 천 냥 보상준다 이렇게 방을 내걸어갖고 할 수 없이 거기서 견디지 못하고 밤에 원북 앞바다에서 배를 타고서 홍성, 광천, 독배, 여기가 새우젓 많이 나는 항구여, 글루다 밤새워 그 이튿날 아침에 도착했어. 그렇게 해갖구서 거기서 의붓아들 둘하고, 우리 아버지하고 할아버지하고 망태기를 짊어지구서 홍성군 홍덕면에 가서 이름들은 잘 기억 안 나는데, 경주 김씨라는 분의 집에 가서 사랑방에서 이틀 쉬는데, 경주 김씨 아버지 되는 분이 우리 할아버지 연세 정도 되는 분이 “노형 성함이 누구십니까?”하고 성함을 물은 것 아니여. 그런께 우리 할아버지가 “나는 조갑니다. 조아무개라고 합니다” 했어. 그 주인 되시는 분이 홍성장에 가면 방에 붙인 문장로라는 사람을 잡으면 천 냥을 배상금 준다니 문장로가 어디 있느니 하며 따져 물은 거지, 그래 거기서 한 달을 묵는디 참말로 조마조마하다 이거여. 잡히는 날이면 큰일나거든. 태안에 혁명당 모집은 우리 할아버지네 집에서 기포해서 나갔으니께. 계속 석 달간 모의작전을 해 갖구서, 그 내력 문서가 여기 있을겨. 조석현씨 문서의 첫장에 붙어 잇을껴. 그렇게 우리 할아버지 사랑방에서 모의작전해 갖구서 나간 것이 전부 돼 있다구. 그래갖구서 한 달 동안 있다가 도저히 있을 수 없어 청양 칠갑산에 가. 칠갑산에 가서 숨어 있는 순간에도 청양읍의 장에 갔는데, 청양장에도 문장로 잡은 사람 천 냥 배상금[준다는 방이] 붙었다 이거야. 그래 칠갑산에도 못견딘다 이거여. 할 수 없이 어디로 갔냐, 공주 마곡사로 갔다 이거여, 큰어머니 말씀이 마곡사에가 깊은 산속에 들어가 호랭이하고도 한치[같이] 잔다는 소리나게 깊은 숲에서 화전불 놓고 거기다 밭 일궈서 고구마, 수수, 서숙[조] 갈아서 칠년인가 팔년 동안 살았어.
이렇게 도망을 다니느라 적지 않던 재산은 다 날려버렸다.
그때 큰어머니는 I도망을] 안 가시고 할아버지 의붓아들하고, 의붓아들의 부인이 우리 할아버지를 모시고 항상 건너갔지. 그 큰어머니가 우리들이 한 삼십 먹어서 돌아가셨는데, 그 내용을 잘 알지. 우리가 서산에 한 삼백 석 했다는 거여. 원체 넉넉하게 지냈어. 그런디 우리 할아버지가 [돈이 필요해도] 내다 팔 수가 없었는데, 마침 서산 방갈리 우리 일가 되시는 할아버지가 찾아왔다는 거여. “형님, 이렇게 고생해가며 있으면 뭐합니까? 땅을 일부라도 팔아서 쌀이라도 사지”하니, “팔 수 있겠나? 팔아주게” 했다 말이야. “한 평에 서 전이라도 받아주게”하니, 서 전 줄사람이 어디 있냐고 그랬대. 그래서 할아버지는 다급하니까 서 전도 좋고 그 양반이 팔아다주는 대로 그냥 어물어물해갔구 도장 가지구 어떻게 찍었는지 알 수가 없다는 거여. 붙잡히면 죽을 판인디 어떡해? 산도 한 열다섯 정보 되는데 산은 그냥 일 전도 안 받고 어떻게 다 내버려버리구 일본놈 등쌀에 다 뺏겼다는 거야. 땅도 밭도 제값 받고 못 팔아먹었다는 거여. 땅을 팔아서 돈은 가져왔는데, 둘째아드님보고 공주 가서 장에 가서 반찬 좀 사오라고 하는데, [아드님이] 아이구! 공주장에 가면 아버지 성함이 방에 걸리는데 어떻게 하느냐고. 어디로 가야 우리가 안 잡히느냐고 말이여. 우리가 더 깊이 들어가자 말이여. 우리 할아버지는 미투리를 삼았어요. 미투리를 삼아 식구들 줘가며 나오는디 의붓아드님, 조씨 말이여, 그때 탄중리 이 근방이지, 도저히 거기서 서속밥, 강냉이밥, 감자밥만 먹을 수 없고, 젊은 나도 먹기가 나뿐디 노인이야 어떻게 먹겠느냐, 내가 가서 품이라도 팔아서 의붓아버지라도, 노인네니까 좌우간 쌀밥이라도 해줘야겠다고 여기 와서 품을 팔았단 말이여. 여기 부자 사람이 있어. 그 집에서 일년을 일하다보니까 탄중리라는 데가 토지도 좋고 평야지대라 여러가지로 살기가 좋은 것 같아서 문장로라는 분[을 수배하는] 방이 제거되는 동시에 우리 나갑시다[해서] 거기서 팔년을 살고서 나오는 순간에, 아주 화해가 됐어. 일본 정부에서 문장로고 뭐고 전부 화해를 시켜서 그렇게 되어서 할아버지도 여기 나왔다 이거여. 그러니까 팔십사 년 전에 신안면 탄중리로 근거를 두고서 나오셨다 이거여. 그래서 거기서 열심히 원칙대로 문장로로 이름이 되고 우리 아버지 병자 석자 이름도 결국 호적 관계가 이루어지고 해서. 구자 석자는 큰아버지, 병자 석자는 그 양반의 동생, 병자 석자의 큰아들이 덕자 원자거든. 우리 바로 위거든. 그러니까 우리 큰아버지는 갑오년에 딸 하나 낳고 돌아가셨은께 무후잖아. 무후니께 우리 큰어머니는 생존해 계신께 아들을 입후[입양]해준겨.
지금도 천도교 일을 보고 있는 문원정씨는 ‘6·25 동란’ 등으로 할아버지가 남긴 기록들이 거의 소실된 점을 안타까워하면서, 할아버지의 뜻과 ‘동학사상’에 입각해서 오늘 우리의 현실에 대해 따가운 비판을 마지않았다.
우리 할아버지 역사책이라는 게 육이오 때 많이 불태워 없었다고 병인년이라면 내가 탄생한 해인데 칠십 년 됐지. 그해 여기 탄중리 살다 큰물 나서 집이 떠내려갈 적에 그거 다 잃어버렸어. 상주에 사시던 우리 형님이 여든한 살에 돌아가셨는데, 그 양반이 많이 기록해 남겨놓은 것도 있고 무언가 형님이 챙겨놓은 것이 있어. 그런데 돌아가신 지 한 칠팔 년 되기 때문에 나는 그때만 해도 한참 젊어서 그런 거 신경도 안 썼는데 그 양반이 돌아가실 때 할아버지 역사를 정확하게 해야 할 텐데 너희들이 아는 것도 없고 해놓은 것도 없이 무엇으로 대답할려는지 모르겠다. 할아버지 역사는 이 말씀을 해놨는데 너희들은 어떻게 할래 그랬는데 돌아가실 무렵에 나 보고도 몇 번 그런 얘기를 하더만요. 그때 바로 필기해놨으면 별 문제가 없는데 그렇게도 못하고 듣고만 틀림없이 머리에만 담아놓을 테니까 염려 마시오 하고서는 열흘 있다 돌아가셨거든. 돌아가시고 났는데 가보니께 내 조카며느리에게 우리 할아버지 역사를 물어보니 원본이 거기 있는 걸로 알았더니 전부 카피로 쓴 것이 조금 있구선 원본은 없더라구. 왜 없냐니깐 다 불타버리고 잃어버렸다는 거야. 그러니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거야. 우리가 잃어버리구 싶어 잃어버리구 불타고 싶어 불탔나.
그의 말은 계속된다.
우리 교회는 무조건 세계 평화를 하라. 인내천 사상으로 세계 평화를 이룰려고 하는 것이 우리 천도교의 원 근본사상인께 뭐. 우리 아버지 죽을 때까지 염주 붙잡고 돌아가셨어. 이 정신 안 갖고는 이 사회 밝은 세상을 볼 수 없다는 거여. 하여튼 이 교를 떠나지 마라는 것이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 신조여. 그래 십년 전부터 계속 사대째 교회 일을 밀고내려오는 거여. 보통 동학 일로만 끝나는데 지금도 내가 어디 가면 그래요. 동학혁명이란 걸 역사로 보면 안된다 그거여. 선천운수 후천개벽을 바꿔놓은 동학혁명이거든. 원래가 당초에 그 때문에 혁명이 아직 우리 대한민국의 정신을 못 돌려놨어. 우리 민족성 정신이 없고 지금 서양놈의 등을 전부 업구서 다니고 있는겨. 그러니 자급자족할 수 있는 우리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이루어지는 정치가가 되고 지배자가 되고 운행이 되야 할 텐데. 지금 서양 문화를 받아서 서양놈이 움직이는 태도대로 움직이면 안된다 이거여. 그래 동학혁명은 지금까지 계속된다 이거여. ‘포덕천하 광제창생’이 인내천사상인께 인내천사상이 꽃피는 날로서 해야만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일개국이 구성되고 세계의 한국이 일개국이다. 미국이나 일본의 속국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야 된다 이거여. 거기까지는 동학혁명이 항상 지속하고 내려오는게 아니냐는 거여. 동학혁명이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디. 일본놈하고 동학군하고 차원이 틀려, 친일파하고 동학군하고는 원래 이거[적대적]거든. 또 양반들 말이여 감투 싸매고 없는 놈들 절절매고 매만 뚜드려 맞고 있으면 돈 갖다주고 쌀 갖다주고 혁명이 뭐여? 그거지. 왜 사람 평등주의인데 어째서 등급 있시 살 수 있느냐 이거야. 똑같은 사람, 똑같은 하느님이다 이거여, 하느님이 뭐여 산소, 공기를 마시고 사는 것이 하느님이여. 내 공기를 모시고 키우고 그놈 갖고 운용하는 것이 하느님이여.
문원정씨는 지금도 자식, 손자들에게 할아버지의 뜻을 길이길이 이어나갈 것을 가르친다고 하면서도 요새 사람들이 예전과는 달라졌다는 말을 빠뜨리지 않는다.
우리가 교육받은 것은 별로 없고 아버지 뜻대로 죽는 날까지 그대로 보전해 나온다는 정신은 항상 갖고 있고 할아버지가 이 많은 공을 세웠는디 아버지가 있고 내가 있으면서 내 손자까지 길이길이 이어가지게 해놓는 것이 우리 할아버지의 은덕 아니냐 하는 뜻에서 교를 내가 지극히 했더니 우리 애들보고 할아버지 정신과 자세를 어쩌든지 어디 가서도 굽히지 말고 이 나라의 공신자의 손자, 아들이다 하는 것을 굽히지 말라고 이런 얘기를 자꾸 하고 싶고, 또 하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