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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록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송아지 팔아 자금댄 문장준, 증손 형식
대상인물

문장준(文章俊)

1861~1909. 본관은 남평. 자는 학연(學連). 충청도 서북 지역인 서산, 홍성, 아산, 예산 등은 동학 교단의 영향하에 있던 지역. 따라서 1차 기포 때부터도 농민군의 활동이 있었으나 본격적인 기포가 이루어지는 것은 동학 교단의 무력봉기 선언이 내려진 9월 18일 이후. 서산, 태안 지역에서도 9월 말부터 기포하기 시작하였으며, 기포가 처음으로 이루어진 곳이 바로 문장준이 접주로 있던 서산군 원북면 방갈리. 문장준이 활동한 것은 이때인 것으로 보임. 문장준은 훗날 『역사』라는 짤막한 회고록을 남김.

증언인물

문형식(文亨植)




1937~ . 문장준의 증손으로 충남 예산에서 농사와 정미업에 종사.



가계도
가계도 이미지
정리자

배항섭

출전

다시피는 녹두꽃

내 용

서산 방갈리 일대는 주로 박덕칠에 의해 포교가 이루어졌으며, 가족이 모두 동학교도인 경우도 많았다. 문장준도 바로 그런 경우이다.

우리 증조부는 형제죠. 그때 사시던 곳은 서산 원북면 방갈리였어요. 원북면 일대는 모두 동학교도들이였지요. 우리 증조부들도 마찬가지였죠. 거기[서산 방갈리]에 그 당시 많이 계셨고 지금도 많이 계셔요[남평 문씨들이].

문장준은 일찍부터 동학에 깊이 관여하였고, 집안사정은 전혀 돌보지 않았다고 한다.

할머니 말씀이 체격이 좋으셨다드만. 수염이 여기[배꼽]까지 나오시고. 글도 잘 하셨다드만. 그런데 우리 할머니 말씀이 당신 속옷은 없어도 일년에 평균 송아지 한 마리씩 계속 가져 가셨다고[동학본부로-필자] 하더라고. 그렇게 살은 거여유.

그래서 가족들이 겪은 어려움은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얻어먹었겄지유. 아까 송아지 얘기를 했는데. 그때만 해도 소 한 마리만 있으면 큰 부자였단 말이야. 그러니까 거기서 그 소를 가지고서 아마 날품을 팔으셨을 겁니다. 송아지는 팔아다가 총부 올려가고, 그렇게 살은 거여유. 그뿐이겠습니까, 우리 할머니 속옷이 한 벌이었는디, 시아버님 출타하시면은 빨어 담장에다가 널으셨다는 기유. 치마만 걸치고. 그러면 그 양반이 그때 마침 어딜 갔다 오신다네. 아휴, 혼나셨다구 허드라구. 그런디 그걸 말러야 입지유? 척척한 걸 그냥 입을 수도 없고. 살그머니 걷어다가 뒤란에다 널었다가는 꼼짝 못하구 쭈그리고 앉았다가 말르면 입고 나왔다고 그러드라구. 당최 생활을 그렇게 했다고 그러드라구. 그러니까 얼마나 고생을 허신 거여. 또 우리집에 도장 같은 것, 이만한 각도장 큰 것 있잖아? 나 어릴 때 많았거든. 근디 지금은 한 개도 없어, 그 당시 관여하는 양반도 없었고 할아버지나 관여하시구 아버지나 관여하셨는데 그 양반들이 관리를 해 오시다가 몰래 가져다내버린 거지.

현재 천도교 서산 교구장인 최제열의 증언에 따르면, 이 지역에 동학을 최초로 전교한 사람은 최학순이라고 한다. 그때는 교구가 서산, 태안, 홍성, 당진, 합천으로 해서 대교구였고, 서산이 중심지였다. 이 지역 농민전쟁에 대해 최제열 교구장의 말을 들어보자.

갑오운동은 해월선사 명을 받고 태안에서부터 기포해가지구 서산으로 해서 당진, 면천으로 번졌지요. 지금이 태안군으로 분군된 지가 몇 해 안됐거든요. 서산군이었지. 그러니까 서산이 중심지가 된 거예유.

방갈리에서 기포한 농민군은 서산, 태안의 관아를 점령하고 서산군수 박정기, 태안 군수 신백희 등을 처형하였으며, 예산, 덕산, 해미, 대천 등지에서도 농민군이 기포하여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이들은 농민군 주력부대에 호응하여 공주로의 진출을 시도하였으나, 홍성을 공격하여 10월 28일 밤부터 이틀에 걸쳐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 부대와 일대 접전을 벌인 끝에 패퇴하였다. 이어 11월 3일부터 해미에 재집결하여 11월 8일 또한 한 차례의 큰 싸움이 벌어졌으나 패배하여 사방으로 흩어지고 만다. 한편 홍성 지역에서는 7월 초부터 농민군의 움직임이 가시화하였으며, 이교(吏校)와 사령(使令)들까지도 동학에 물들지 않은 자가 없다고 할 정도였다. 사방에서 농민군이 일어나 재물과 마필을 뺏기도 하면서 ‘이서배가 관장을 핍박하고 천류가 양반들을 능멸하는’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따라 정부에서는7월 15일 정경원을 선무사로 파견하였다. 이 무렵 이 지역의 유명한 ‘거괴(巨傀)’로는 홍성의 김영필·정대철·이한규·정원갑·나성뢰, 덕산의 이춘실, 예산의 박덕칠·박도일, 대흥의 유치교, 보령의 이원백, 남포의 추영성, 정산의 김기창, 면천의 이창구 등이 있었다. 8월 6일에는 선무사 정경원이 홍성에 도착하여 홍성 인근의 접주들을 모아 효유하였으나, 5, 6만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이창구 같은 이는 완강하여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한다(『홍양기사』). 문장준이 주로 활동한 지역은 바로 이 일대였다.

서산 방갈리 쪽 거기서 하시구 여러 곳에서 활동하셨지. 면천에서도 전투가 많았어. 면천, 홍성 이 근처에 동학 전투하러 많이 돌아다니셨어. 그런게 빠진 데가 없었던 게지.

농민전쟁이 끝난 뒤 문장준의 후손 역시 탄압도 많이 받았고, 재산은 다 날려버렸다 한다.

탄압을 받았겄지유. 안 받을 리가 있어요? 고생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이 하셨겠지유. 동학혁명하고 나오시다가 얼마나 있었는지는 우리야 잘 모르지만 하여튼 재산도 다 버리고 오셨다고 아무것도 안 가지고 맨몸만…. 그때는 피난길이니까 아무것도 없이 천안 광덕면으로 들어가셨다고 그러더라고.

탄압을 받으면서도 문장준의 후손은 꾸준히 동학에 관여해왔다고 한다.

거기 있다 어디로 갔는지 잘 모르겠어. 그리고 여기로 오셨지. 여기서 우리 증조부도 거처한 걸 보면 꽤 오래 됐지요. 제 손자까지 한 육대가 살았지요. 그때는 총부가 없었고, 동학 스승님들이 숨어댕길 땐데, 그 어려운 속에서도 [천도교에] 자금을 갖다줬다고 하대. 동학운동이 끝나고 의암선사[손병희]가 일본으로 가시고, 그때 춘암선사[박인호]를 통해서 기반을 닦거든, 춘암선사를 통해서 자금을 바친 거지, 그때는 뭐 솥단지까지 떼어서 갖다주고 그랬는데 살림이 남아난 게 없다고 하시드라구. 어지간한 거, 쓸만한 물건이라든가, 잡술 만한 것이 한 가지라도 있으면은 다 거기 갖다드렸다 하드라구. 그 양반들 운동허는디 자금으로 보냈겠지. 우리 할아버지까지도 생활이 굉장히 어려우셨지요. 그러다가 1909년에 돌아가셨어.

그러나 후손들은 탄압 속에 교육도 제대로 못 받았다. 그래도 열심히 산 탓으로 지금은 농사도 좀 짓고 정미업도 하며 어렵지는 않게 살아가고 있었다.

우리 할아버지는 별 교육을 못 받으셨고, 우리 아버지는 일정 때 국민학교를 나오셨기 때문에 교육을 많이 받으신 거고, 지금은 농사짓고, 돼지도 먹이고, 정미업도 조금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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