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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록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서산의 지역대장 문재석, 손자 왈향
대상인물

문재석(文在錫)

1870~1894. 본관은 남평. 자는 성재(聖在). 2차 봉기 당시 서산, 태안 지역의 첫 기포지인 원북면 방갈리에서 기포하여 활동하다가 태안에서 관군의 추격에 체포되어 1894년 11월 16일 처형당함.

증언인물

문왈향(文曰香)




1935년~ . 문재석의 손자로 여기저기를 떠돌며 고생하다 고향으로 돌아와 현재는 충남 예산에서 농사를 지음.



가계도
가계도 이미지
정리자

배항섭

출전

다시피는 녹두꽃

내 용

먼저 왈향이라는 이름이 특이하길래 그 사연을 물어보았다.

원 이름은 일환[日桓]인데, 일제시대 호적에다 기입을 헐 적에 이장들을 시킨 것이 일[日]자를 잘못 해가지고 왈[曰]이 됐지. 그래서 호적상에 왈이여. 환[桓]도 바꾸어져서 향[香]이요. 지금은 어디나 왈향으로 통하고 있어요. 나는 35년생이요.

문재석이 살던 곳은 이 지역에서 농민군이 최초로 기포한 방갈리에 있는 문씨의 집성촌이었고, 일찍부터 집안의 친족들이 다수 동학에 입도해 있었다.

서산 방갈리. 원래 거기가 기포지요. 문씨 동족촌인디 동학 때는 원북면 방갈리 거기가 아주 기포지라구요. 이 지역이 전부 발대지여. 방갈리 가면 동학란에 가담했던 사람들 무수히 있어요. 그래서 우리 할아버지가 주동 역할을 해가지고 그 지역의 대장 노릇을 헌 모양인디. 여기 이 양반 원정[문원정 씨, 문장로의 후손]씨 큰아버지 구석씨도 우리 할아버지 밑일 거유. 두 살 아래지유.

농민전쟁에 가담한 죄로 가족들은 많은 탄압을 받았고, 이 때문에 가족들은 문왈향에게는 할아버지의 활동에 대해 쉬쉬 하기만 하고 제대로 말해주지 않았다 한다.

그 내막은 사실로 내가 어리고, 아버지한테 받아야 할 텐디 아버지 일찍 돌아가시고 내가 어려서 객지생활 하다가 군에 들어갔다 육년 만에 나오니까 그 문서 같은 것은 아버지가 시켜서 했는지 어머니가 다 없앴시유. 왜 없앴느냐, 이걸 냄겨두면 왜놈들이 와가지구 나머지 우덜을 잡어죽이고 몰살시킨다고 다 불태우고 없어. 심지어는 족보까지 없애버렸어. 옛날 족보가 많이 있었는데 두 권인가 세 권밖에 안 남았어. 그리고 할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동경대전이나 이런 거 여러 가지 내가 보관하고 있지요. 태우고 남은 거. 천독송[千德頌인 것 같다]이니 뭐니. 그때 할아버지가 가지고 활동하고, 아버지가 회고록으로 쓴 거. 그런거 다 가지고 있지유. 그런데 옛날 글씨라 다 지워져가지구 분석도 잘 못할래라구. 그래도 할머니한테 많이 들었지유. 내가 듣건대, 유교군[유회군 : 양반 지주들이 중심이 되어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만들어진 각지의 반농민군을 말함]하고 동학 군하고 싸우다가 그 난리에 일본군이 들어와서 일본놈들한티 당하고 해서 나머지는 뭐 식기까지 다 빼앗긴다, 이런 얘기도 듣고 그랬는데. 우리집에서는 나를 늦게 뒀는데, 나도 죽을까봐 이래저래 나한테는 알리지를 않았시유.

문재석은 정확한 날짜는 모르지만 농민군들이 홍주성 전투에서 패배하여 퇴각을 하던 도중 태안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당시 태안에서는 관군과 일본군들의 행패가 극에 달하였는데, 농민군들을 체포하여 굴비 엮듯이 엮어 한꺼번에 생매장하기도 하였고, 유명한 접주들은 작두로 목을 자르고 장대 끝에 그것을 매달고 각지를 돌기도 하였다. 다행히 시신은 수습하였지만, 일제시기까지 이어진 탄압은 묘자리까지 불편하게 만들었다.

시신은 그러니까 작은 아버지허구, 두 분이 계셨는데 한 분은 양자를 가셔가지구서, 아는 사람들하구 태안에 가서 일차적으로 우선 할아버지부터 찾았던 거지유. 우리 아버지가 밝으니까. 그래서 갖다가, 일제시대에 일반 산에다 그냥 못 묻게 하니까, 아버지가 묘적지까지 내가지고 우리 산에 묻었는데, 그 지역 산이 다 우리 산이었는디, 할아버지 돌아가시구 엉망진창이 되니까 그이들이 다 이전해가지고 갖고, 우리는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고.

그 이후 탄압으로 문재석이 남긴 제법 되던 재산은 다 잃어버렸다.

재산이야 내가 잘 모르지유. 그 당시에 우리 선조들이 그 지역을 주름잡고 살으셨다고 해야 하나. 이번에 이 위에 할아버지 십대까지 전부 전기 회사 들어가는 바람에 땅들을 다 팔아가지고 묘지를 파내게 되서 그때부터 있던 산소를 전부 파서 옮겼는데. 사실은 우리는 밥굶고 살지는 않았대요. 묘 쓴 거 그 지역 전체를 파냈는데 우리네보다 더 좋은 묘가 있지를 않아요. 재작년엔가 발전소 들어간다고 묘를 전부 팠어요. 그래가지고 우리 할아버지는 갑오동란에 돌아가셨다는 비에다 내가 새기기까지 했는디.

남은 가족들의 생활도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할머니는 오래 살다가 돌아가셔서, 나를 그렇게 귀해했다구, 우리가 손이 귀했었어요. 고생을 하다하다 더 이상은 잡어다 죽이지 않고 하니까, 그런대로 노력해서 먹고사느라고, 우리 할머니도 할아버지 스물몇 살 때 돌아가시고 나니 계속해서 홀로 살으시다가 거기서 돌아가셔서 할아버지하고 합장했어요. 재산은 다 뺏겼지요. 그런디 이 지역이 전부 발대지여. 방갈리 가면 동학란에 가담했던 사람들 무수히 있어요. 태안에서 승용차 타고 삼십 분 가야 방갈립니다. 이 양반들이 거기서 견뎌나지를 못하고 공주, 천안, 광덕으로 전부 피신을 나갔어. 우리 아버지는 옥살이를 하고 그 양반들은 피난 나갔어. 그러다가 [탄압이] 완화되니까 탄중리로 와서. 우리 아버지는 농사를 지을 줄도 모르고. 당시 비가 와서 멍석이 떠나가도 애들이나 가르치고 그냥 들어앉어 있었던 분이고. 그렇게 선비 생활을 했었고, 할아버지 돌아가신 거 이런 거나 별 데를 다니면서 문제를 수집허고 했었는디. 그때 당시 고생한 거야. 우리네도 고생했는디, 우리 아버지들이야 말 헐 수 없는 처참한 꼴을 당하고 옥살이까지 허고 그놈들한티 주리틀리고 얼마나 고생을 했겄어유? 옥살이한 것두 지금 나와 있지두 않고, 또 내가 모르니까 기록도 못하는 거 아니유? 그런게 이 할아버지 병석씨 하구 비슷하게 고생을 했을 거유. 우리 아버지가 촌수로는 낮았어도 연령적으로는 병석씨보다 더 자셨다구. 우리 할아버지도 그 양반[문구석]보다 더 자시고. 학생들도 그 뒤로는 가르치도 못허구 일도 못허시구 그저 앓으시다 돌아가셨어유. 나는 할아버지를 보지두 못했습니다. 할아버지는 내 조부다 해서 할아버진 줄 알지, 보두 못했구. 병석씨가 자기 손자들한테 얘기한 게 아니라 계속 나한테 얘기를 했어요. 그깟것들은 다 쓸디없는 거고 니나 알으라구. 순전히 나만. 그래서 이 할아버지를 내가 그렇게 많이 따라다니구 여러가지루 듣고 이 할아버지 있을 적에 공주도 따라가봤어 요. 우리 윗대 산소 있는 시제 지낸다는 거기두 내가 따라가봤다구.

농민군의 후손이라는 죄로 겪어야 했던 모진 세월은 지금도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있다.

내가 배운 게 있으니 넘과 같이 뭣을 허나. 배우질 못했으니 농사나 짓고 있는데 국민학교두 다니다, 옛날에는 일본놈들 학교지 따지믄. 그 학교가 그런게 팔일오 해방되고 얼마 있다 육이오사변 나기 전에 학교가 불이 났어요. 불이 나서 학교 다니던 사람들이 전부 흩어져가지구 선생두 별로 없고 남의 집 사랑방에다가 칠판 갖다 붙이구서 국민학교 졸업이라구 했는디 그 졸업장도 어디로 갔는지 없구. 그러다가 그냥 집이서 아버지 일 못허구 하니까 작은아버지 따라서 일만 배웠지. 그러다가 그 일만 해서는 안되겄구, 그래서 내가 인천 지역을 잘 알아가지구 도시에서 그냥 객지 생활을 좀 했지유. 순전히 몹쓸 짓만 허구 다녔어유. 집이서는 그렇게 구엽게 키우고 죽을까봐 겁나게 했는데, 인천 수봉산 그 무지헌 산 거기 가서 남포질을 않나, 돌 뽀개는 거, 또 지금 말하면 원양어선 같은 그런 것도 타보고, 별짓 다했어요. 지금은 그냥 어떻게 연명하는디 일이 너무 지나치니께 그런가, 아침에 자고 일어나서 뭣 허다 보면 오후 너다섯시 되면은 어디 나가고 싶지 않구 드러눕구만 싶어. 말초신경이라고 그러는디 내가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채석장에 있을 적이 그 무지허게 높은 데 가서 발파 구멍을 뚫고 발파를 할라면 발이 달랑달랑하구 떨리구 할 적에 무지허게 힘을 없앴거든. 그 여독이 오면서 그러지 않나 그려. 다치기도 많이 했고. 동상도 무지하게 걸렸고. 동상에 걸려서 기어다니다시피 했지. 워낙 몸을 못쓰게 썼어. 지금도 다리를 제대로 딛지를 못하고 굳어 있어요. 그래서 일도 제대로 못허고 아줌마들만 시키고 그러는디 몇 년이나 할래나 모르겠네요[현재 비밀하우스 재배를 하고 있다].

그는 이런 고생 속에서 터득한 ‘진리’를 한탄과 함께 털어놓았다.

이거 서구 문명을 받는 것이 동경대전이나 우리 할아버지들 믿던 책 보면은, 외세 침략이라고 허는 데서 우선 미국놈 일본놈이 이 나라에 떠나야 좋은 해방이 된다고 그랬다구. 지금 천도교를 계속 젊어서부터 믿으시고 돌아가신 어른들은 반다시 그걸 지금 착착 맞아들어 간다 하는 말씀을 하시는 양반들이 많아. 인내천, 이것이 사람이 할 일이고 마음속에 자기 하늘이 있는 거고, 하늘이 있다고 하는디 하늘이 어디 있어? 제 마음 한가지를 잘 먹으면 다 좋은 건디 무슨 소용이 있어. 지금 암만 착한 놈은 갖다가 멀쩡허게 코를 짤라가도 아무 소리 못허고 있는 세상인디. 이런 얘기 저런 얘기 허나마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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