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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록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혁명가 집안을 세운 농민군 이신교, 손자 한구
대상인물

이신교(李信敎)

1840~1894(?). 동학교단의 무력봉기 선언(9월 18일)과 동시에 신창에서 정영태와 함께 기포하여 활동함. 1894년 10월 15일 집을 나간 후 소식을 모름. 홍성 전투(10월 28일)에서 홍주 목사이자 호연초토사(湖沿招討使)였던 이승우에게 체포되어 처형된 것으로 추정됨. 집 나간 날에 제사를 지냄.

증언인물

이한구(李漢求)




1927~ . 이신교의 손자로 사업을 하기도 하고 언론계에 종사하기도 함. 현재 천도교 도정.



가계도
가계도 이미지
정리자

배항섭

출전

다시피는 녹두꽃

내 용

이신교는 일찍부터 동학에 관계하고 있었고, 집안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동학에 입도하였다 한다. 그의 손녀 가운데 하나는 상해임시정부의 요인이었던 신숙(申潚)의 며느리가 되기도 하였다.

내 외가도 전부 천도교인이지요, 내 집안에도 많이 참여했지요. 내 할아버지가 사형제였어요. 다 참가했는지는 모르지만, 다 동학교도였어요. 당숙들도 큰아버지가 열다섯 살이었는데, 전투는 안하셨지요. 그러니까 가족 내력을 본다면, 내 낳아준 할아버지가 신교고, 내 아버지가 내 넷째할아버지한티 양자를 갔어. 셋째할아버지는 이순교[李順敎]여. 첩지를 보니까 그분은 별집강으로 받았더라고. 그분은 생존해가지고서 여기에 큰 두목이었겠지. 근디 손이 없어, 그러니께 부모들끼리 합의해서 양자로 한다 해서 내 백부가 실에 있어서는 양아버지가 됐지. 그런데 신창에서 같이 기포한 정태영이가 내 양어머니의 친정아버지야. 그러니께 내 큰아버지가 이세헌[李世憲]인데, 족보로는 이종일[李鐘一 : 3·1 운동 때 독립선언서의 인쇄 책임자]이라고. 그런디 큰아버지의 부인이 정씨여. 정태영 씨의 딸이라는 거여. 그러고 양가로서 내 둘째누님은 상해임시정부 요인으로 있던 신숙 씨의 큰며느리가 됐지.

이신교는 원래 왕실의 온양 별장이라 할 수 있는 ‘온궁’의 관리자였던 까닭에 경제적인 형편은 부유한 편이었다.

구체적으로 재산이 얼마나 됐는지 모르지요. 좀 부유한 편이었지. 온양에 온궁이라는 데가 있었대요. 세종대왕이니 세조니 이런 귀족, 왕족들이 온천하러 오지 않습니까? 그러면 거기 임시 기거하는 온궁이란 게 있었대요. 그 온궁의 관리책임자랄까, 책임지는 사람이 내 조부가 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께 살만 했었지요. 방간[芳幹]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물론 그 당시에도 지역에서는 양반으로 대접 받았지요.

이신교는 홍주 전투에 참여하였다가 목숨을 잃었으나, 정확한 사망날짜조차 제대로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시신조차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갑오년에 시제가 있어요. 음력 10월 11일날, 10월 보름날 이렇게 두 차례 있는데, 10월 보름날 시제를 지내고 집을 나가셨단 말이야. 그러니까 기포해가지고 홍주 전투에 참가하기 위해서 나가셨겠지 그래서 결국은 돌아가셔가지고, 어디서 어떻게 어느 날 돌아가셨는지 몰라. 그래서 15일날 나가셨으니까 집나간 날을 제삿날로 했지. 그 당시 사신 데가 온양시 용화동[하와동]이고 거기서 신창이 이십 리. 신창에서 동학 접주, 집강이셨지요. 큰아버지 위에 고모가 두 분이 계셨고. 그러니 그 어른이 그때 당시 , 마흔 살이 넘었겠지요. 시신도 못 찾았고, 묘도 없지요. 그 뒤에 우리 천도교 역사를 더듬어 보니까 신창군에서 기포했다고 그러대요. 옛날에는 아산군, 신창군, 온양군 세 개군이 일제시대에 아산군이 돼버렸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께 그때 기록을 보면 신창군에서 기포를 했는데, 기포한 분이 내 조부하고 정태영 씨라는 분하고 곽원이라고 하는 분하고 세 분이 기포했다고. 그래가지고 그 기록에 보면은 결국 초토사 이승우에게 체포돼서 처형됐다, 요렇게만 나와요. 그리고 내 선친들이 말씀을 잘 해주질 않아. 왜냐면 당신네들의 고통을 자손들에게까지 주어서는 안되겠다. 또 알으면은 언젠가는 얘기하게 되면은 추적을 당한다 이거지. 이러니까 그 활동 상황이라든가 그 부근에 대해서는 일체 자손들에게 얘기하지 않고, 그저 신앙을 잘해야 된다는 얘기만 했지요.

이신교의 후손 역시 탄압을 피해 도망을 디녀야 했고, 그 과정에서 믿고 재산관리를 맡겼던 머슴에게 전재산을 뺏겨버리는 설움을 당하기도 하였다.

집도 머슴 사는 사람들한테 다 뺏겼지요. 뺏긴 게 아니라 재산권 행사를 못했지요. 지금 공산당 몰리드끼 몰려가지고서 전부 도망댕겼으니까. 머슴 살던 사람한테 [재산을] 다 관리하게 하고 그러고서는 도망댕긴 거죠. 나중에 일제 측량할 때, 일제시대에 전부 토지 관리 같은 거 뭐 해서 누구든지 요거 내 거다 하고 등록하면 그 사람 거 됐단 말이야. 그때도 우리 거라고 주장 못해서 머슴 이름으로 해놨다 이거야. 그러니께 산이고 논이고 밭이고 가대고 전부 머슴 것이 돼버렸지.

재산을 잃어버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후손들은 고생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었지만, 이신교의 뜻은 이후로도 계승되어 ‘혁명가 집안’이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고 한다.

할머니는 살아계셨었지. 그냥 말할 수 없이 고생하셨지요. 유복자까지 하나 데리고서. 아들 사형제 딸 둘. 들은 얘기로는 짐작할 수도 없지요. 다만 그 어렵게 고생했다는 것만 들어서 알지요. 뭐 상상하면 알 거 아니겠습니까. 지금 공산당처럼 몰려가지고 쫓겨댕기듯 했겠지요. 내가 어른들로부터 들은 것은 내 아버지가 셋짼데, 막내 작은아버지가 있어, 그분은 유복자지. 그런데 삼형제가 밥을 얻어먹으러 댕겼다는 얘기야. 그런데 나이가 많이 자신 분은 밥달라고 할 수가 없으니까, 내 아버지가 일곱 살 때라니까, 밥을 얻으러 들어갔다가 하도 배가 고프니까 개밥그릇에 쌀밥이 조금 있으니까, 일곱 살 먹은 그 당시에 개밥을 집었던 모양이야. 개가 꽉 물어가지고 세 분이 서로 부둥켜안고 울고 그랬대요. 그러다가 내 아버지하고 둘째아버지는 아까 얘기한 신숙 씨 따라서 만주로 갔어요. 큰아버지는 서울에 계셨고 소화 14년[1939년]에 돌아가셨어요. 만주 가서 신숙 씨 휘하에서 계셨다고 그러드라구요. 팔일오 해방 조금 전에 돌아와가지고 다 돌아가셨지. 그리고 생가로 내 맏형 이명구라고 하는데, 그 형도 만주 북지[北支] 가 계셨다구. 해방 한 달 전에 나와가지고서 육이오 때 좌익한테 총살당했어요. 내 큰아버지는 거지 생활하고 댕기는데, 최준모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어른의 알선으로 해가지고서 서울 천도교 중앙총부에 몸을 담게 되었지요. 그래서 내 큰아버지[양아버지]는 이종일이었는데, 세연으로 개명을 하고, 천도교 중앙총부에 경리관장했지. 그리고 경리관장하기 전에는 사세 교주 춘암[박인호] 선사의 봉도[비서]를 했지. 그분도 왜정 때 특정 요시찰인이야. 어디로 갈라면은 사전에 신고하고 가야 하고 무슨 일 있으면 예비검속 되고. 나는 여기서 태어나가지고 가족한테 다 떨어져 가지고, 그나마 공부를 해야 된다고 해서 남의 집에 얹혀서 했지, 그래서 그런지 모르지만 노래도 슬픈 노래가 좋고. 내가 지금 예순일곱 살인데[1927년생], 어렸을 때 부모는 안 계시고, 돌아가신 건 아니지만, 외롭게 친척집에서 얹혀서 살았지요. 그때는 일제시대라 다 어렵지 않았습니까? 또 일본 사람들의 감시 속에서, 은연중 감십니다. 고생이야 말할 수 없지. 나 농사일 못하는 게 없고. 공부는 거의 독학하다시피 했고 신앙 한 부분에 대해서는 독실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정신만은 잃지 않았지. 천도교에는 팔일오 해방 되면서 정식으로 입교를 했어요. 할아버지가 어떠헌 뜻이었든지간에 동학에 입도해가지고, 여기서 집강이 되고 신창에서 기포해가지고, 동학군 이끌고 홍주까지 가가지고 홍주 전투에서 초토사 이승우한테 붙잡혀서 처형을 당하고 그 때문에 가족들이 거지생활 했고. 그 여독이 나까지 삼대째 비참한 생활을 하는 거지요. 그러고 내 아버지들은 만주 절로 가서 신숙 씨의 휘하에서 일하면서 뜻을 버리지 않고 계셨고. 양아버지는 천도교 중앙총부에 올라가가지고 스승님 모시고 나름대로 고생하셨고, 또 큰딸은 동양화가인 노수현[盧壽鉉] 씨하고 결혼했고, 둘째딸은 신숙 씨 큰며느리였고. 그래서 우리 집안을 아는 사람들은 혁명가 집이라고 했지.

이한구는 할아버지의 유업을 이어 지금도 천도교에 관계하고 있으며, 일제 때 친일을 한 천도교 신파들에 대해 지금도 분노하고 있었다.

선대들이 잘했든 못했든 우리 후손들이 그 유업을 이어받아야 되겠고. 나는 동학에 대한 신앙에 투철한 게 아니라 선대들의 업적의 은덕을 받아 가지고 지금 천도교 도정이라는 자리에 있고. 또 더 나아가서는 내가 정통계요. 천도교는 신파하고 구파가 있습니다. 신파는 여암 최린이 계통이고 친일파고, 구파는 정통 맥락을 이어오는 거고. 우리 계가 신파 구파라는 게 아니라, 최린계가 신파라고 하니까 자연히 구파가 되어 정통 맥락을 이어오지요. 나는 구파계의 사실상의 대표입니다. 나와 같이 도정을 하는 사람 열서너 사람 있는데, 그 중에 내가 대표 역할을 하고 있지요. 우리 세력이 전국적으로 삼분지 일 조금 넘을 수 있는 세력밖에 안돼요. 이렇게 정통계가 메말랐습니다. 왜 그러느냐, 내 처지와 같이 다른 처지들도 어려운 생활을 해왔어. 그 자식들이 공부도 못했어. 신파들은 뭐냐. 최린이가 삼일운동을 일으킬 때 지대한 역할을 한 건 사실이야. 그런데 이게 감옥에 가 있는 동안 일본 사람들한테 매수당해가지고서 일본 사람들의 주구 노릇을 했단 말이야. 그런데 이 신파들은 그 속성을 버리지를 못해요. 빨리 그걸 버려야 하는디. 여암 최린이한테 속았다는 것을 느껴야 되는디 그걸 느끼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어, 천도교가 결국은 부끄러운 전통도 없지 않아 있지요. 일제시대에는 친일집단 아닙니까, 여암이. 그런데 사세 교주 춘암선사[박인호]가 멸왜운동이라는 운동을 하지 않았다고 하면 천도교는 완전히 친일집단으로 몰락합니다. 팔일오 해방 후 신파들이 재빨리 신세력에, 정치세력에 종속되어가지고 내려온 거야. 나도 그런 것을 거울 삼을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한 가지 신앙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은 남북 통일이 기어코 될 것이다. 또 통일이 된다고 하면은 지금 양극사상의 대립 상태에 있는데, 이게 다 서구 사상이거든. 그래 우리나라의 사상, 그게 바로 동학사상이다. 그래서 통일될 때까지 죽지 말고 살자 이렇게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힘이 들어. 돈이 없어. 무얼 움직이자 해도 돈이 들어서 못 움직이겠다 이거야. 성금을 걷어왔지만, 기천만 원 걷는 디도 힘이 들어. 그래 나는 내 자식보고 “돈을 벌면 그 돈을 교회 활성화하는 데 쓰자”이렇게 했어요. 그런디 교회활동하는 데 쓰는디 일례로 들어서 국가보안법에 저촉이 되거나 뭐하면은 이 면허도 취소되는 거거든. 이렇습니다. 더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멸왜운동은 1938년 독립운동이 침체해 있을 적에 박인호 주도로 이루어진 ‘멸왜기도사건’을 말한다. 그의 이런 주장에 귀를 기울여봄 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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