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조석헌(曺錫憲)
1862~1931. 본관은 창녕. 1894년 3월 상암 박희인을 통해 동학에 입도. 5월에 태안 접주에 선임됨. 9월 들어 태안 군수 신백희와 안무사 김경세가 인근 두령들을 체포하려는 계획을 탐지하고 각지의 접주에게 연락하여 기포. 해미의 승전곡 전투(10월 24일), 신례원 전투(10월 26일), 홍성 전투(10월 28일) 등에 참가. 그 후 1931년 까지 동학에 관여하면서 겪은 일을 『역사』라는 회고록으로 남겨놓고 있음.
조병철(曺秉哲)
1916~ . 조석헌의 손자로 충남 예산에서 농사를 지음.
배항섭
다시피는 녹두꽃
이 지역에 동학을 포덕한 대표적인 인물은 박희인(박덕칠)이었다. 작은 키에 얼굴은 종두자국으로 얽었던 박덕칠은 떨어진 도포자락에 목에는 염주를 걸고 머리에는 패랭이를 쓰고 옹기장수로 가장하여, 꽹과리를 치면서 해미, 서산, 태안 일대를 쓸고다니며 포교를 하였다. 조석헌이 동학에 입도한 것도 바로 박덕칠을 통해서였다.
1894년 3월에 박희인 대접주에게 입도하였다고 역사에 나와 있지요. 태어나기는 서산에서 났지요. 서산에는 여러 집안이 살았는데 지금도 몇 집 남아있지요. 거기 삼종들 사종들도 살고 당질들은 음암이라는 데서 둘 살고, 재종질들은 부석면서 살고, 지금 서산 땅에서 한 십여 명 살아요. 입도 한 뒤로 예산으로 왔죠. 여기선 간양리라고 하는 데로 오셔가지구서 서산 들랑거리시구 두목으로 계셨으니까 전력하시구서 천도교에 투신하셨죠. 집안이 모두 동학에 입도하였다고 합디다. 셋째할아버지도 이 양반이 총 맞아 돌아가셨는데요. 우리는 들어서 알지, 보지 못했지만 그런[집안에 동학교도가 많았다는] 말씀을 들었어요.
상놈 소리는 안 들을 정도였지만 대단한 집안은 아니었다. 생활도 어려웠던 듯하나 그래도 조석헌은 글공부를 얼마간 한 듯하다.
웃대는 벼슬을 하셨는지 확실히 몰라요. 그래도 양반소리 들었죠. 창녕 조가니까 쌍놈 소리는 안 듣고 양반 소리 들었는데, 양반소리 듣는 것은 원치 않으시고 우리 할아버지께서는 그저 인내천[人乃天] 사상 가지구서 다 동기간처럼 동기일신[同氣一身]처럼 지낸 터이죠. 할아버지 대는 빠듯하게 살았다는 얘기를 들었지요. 역시 도에 열성하고 굶어가며 도를 하시니까, 결국은 배고푸니까 풀도 뜯어 연명하고 소나무 송기도 자시고, 초근목피로 연명하셨답디다. 왜냐면 교인들은 그때는 무엇보다 전부 굶어가면서도 교회에 열성으로 일하기 때문에 아주 가사는 전폐하고 다니셨으니까. 뭐 재산 남긴 것도 없고 고생들 많이들 하셨죠. 자손들까지. 글공부는 어쨌는가 확실한 것은 모르겠는데 역사를 만들어놓으시구 그런 것을 보면 학식이 많이 계셨던 것 같아요. 저 역사를 손수 쓰면서, 고모부라고 하는 분이 있어요. 변인식 씨라고 그분하고 합동으로 다 보시는 걸 우리 어려서 보았어요. 체격도 건장하셨어요. 내가 그 양반한테서 천자문을 배웠는데, 인격상으로는 아주 고지식하고 엄격하셨지요. 애들이 호랑이 할아버지라고 할 정도로 엄격하셨어요.
서산 지역에 농민군이 본격적으로 기포한 것은 9월 말경이었다. 『홍양기사』에는 이때의 사정을 “동도들이 최시형의 지휘라 칭하고 곳곳에서 봉기하였다. 서산 군수 박정기, 태안 군수 신백희, 별유관(別諭官) 김경제 등이 해를 입었으며, 해미, 예산, 덕산 등에서는 군기를 모두 탈취 당했다. 해미, 덕산, 대천, 예산, 목소 등지에서는 진세를 갖추고 그 무리를 나누어 보내어 노점(路店)을 지키고 지나는 사람을 붙잡아 그 무리에 몰아넣고 있으며, 서울로 보내는 추수곡을 실은 배를 모두 탈취하여 쌓아놓은 것이 산과 같다”라고 쓰고 있다. 9월 30일 태안 방어사 집에 모인 서산, 태안, 홍주 군수 등이 이미 체포 구속한 30여 명의 접주들을 처형할 것과 일반 동학도인들을 대량으로 검거하려는 모의를 진행하는 것을 엿들은 태안 이방 김넙춘이 이 사실을 동학 접주들에게 알렸다. 이에 따라 이날 밤 서산군 원북면 방갈리에 주요 간부들이 모였는데, 여기에는 접주 장성국·문장로·안재복·문장준·문장혁, 도집(都執) 문장권·문성석·문구석·문준용·안현묵, 중정(中正) 곽기풍·이치영·박정백 등이었다. 이들은 대오를 편성하고 10월 1일 태안읍과 서산읍을 공격한 것이다. 조석헌도 이때 참여하였다.
들었지요. 그런데 나도 나이먹으니께 자꾸 잊어버리구. 적극적으로 교회에 투신하셔서 그저 집에 안 계셨다고 해요. 어려서도 자꾸 어디 나가시면 순방하시는 편으로 그저 집에 안 계시고 교회에 전력하셨지요. 갑오년 때는 각 교인들과 연락해가지구서 거기 이렇게 있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서산, 태안 접주로 계셨으니까.
목소리에 대도소를 두고 있던 농민군들은 이후 앞서 언급한 대로 각지를 돌며 무기를 탈취하고 군량을 모아 목소리 전투(10월 11일), 해미 승전곡 전투(10월 15일), 신례원 전투(10월 26일) 등을 통해 관군과 유회군(儒會軍)을 패퇴시키고 승승장구하였으나, 10월 28일 일본군, 관군, 유회군의 연합 부대와 접전을 벌인 홍성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하여 이후 해미, 서산 등지로 퇴각의 길을 걷게 된다. 조석헌도 홍성 전투에 참여하였다가 패배한 후 각지로 피신을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이리저리 산으로 돌아다니시구 바위 틈에 끼워서, 역사에도 나와 있는데, 바위 속에 엎드려가서 이렇게 하고 숨어있는데, 결국 붙들리기만 하면 전부 다 총살이고 죽으니까, 관군들이 지나가면서 할아버지의 밥그릇을 발견하고는 어떤 중농이 바라를 버리고 그냥 갔다고 하더란 말이여. 그런 말씀을 내가 들었고. 역사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우리 어머니께서 길삼이라고 베짜는 것이 있잖아요. 다리를 이렇게 세워놓고선 베틀 그 뒤로 숨었는디 관군들이 그냥 문만 열어 보고선 돌아가서 모면한 경우도 있다는 말씀을 많이 들었어요.
다른 가족들이 받은 피해는 오히려 농민전쟁에 직접 참여했던 조석헌보다도 더 모질었다.
셋째할아버진가 그분이 서산서 총살당하셨어요. 그런 소리를 들었죠. 고생 무지하게 했대요. 일본놈들한테 전부 다 잽혀가고, 모다지[모두] 피해다니고 한곳에 살들 못하고 이 고장에서 살고, 이리저리 산골로 산골로 피해댕기면서 먹을 게 없어 풀도 뜯어먹고, 송기도 해서 훑어먹고 이래가면서, 도토리도 따서 먹어가면서. 어디 가서 안전하게 생활을 못해본 양반들이요. 지금인께 우리가 이렇게 농사짓고 한곳에 살았지. 그 전에 우리 할아버지께서는 그냥 일생 동안을 피해서 다니구. 그러면서 암암리에 얼마 전에 대전일보에도 나왔지만, 솔가지 울타리로 천도교인들은 암호했다요. 왜냐면 대개 밤나무나 아니면 옥수수대로 울타리를 하는데, 솔간지로 울타리를 하면 그것이 암호여. 교인댁이여. 그렇게 해서 암호를 만들어가지구서 솔가지 울타리 교인들을 찾아다니셨다는 그런 얘기가 있어요. 그래도 적극적으로 교회에 열심하시다 돌아가셨죠.
조석헌은 『역사』에도 기술되어 있듯이 그 후에도 꾸준히 포교 활동을 해나갔다.
여기서 왔는데 동네 분들이 그래요. 우리 외할아버지가 문장준 씨라고 하는데 그 양반하고 두 분이 여기를 오셨거든요. 왔는데 다른 사람들은 전부 다 상투를 틀었고 우리 할아버지하고 외할아버지하고 서산, 태안서 와가지고 머리를 삭발하고 있으니까 무조건 조대갈, 문대갈이 별명이었어요. 그래가지구 천도교의 주문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를 외고 그러니까 조대갈, 문대갈이 머리 깎구선, 가사장삼이라는 것이 청색 아니오. 근께 색의장려라고 해서 횐옷 입는 사람은 전부 색의장려로 물들여 입으라고 하니께 우리 할아버지는 먼저 선봉적으로 나가가지구 물들여서 색의장려 했거든요. 머리깎고 우리들도 머리 깎이고 이렇게 하는데 근디 무조건 조대갈 문대갈 소리 듣고, “가사장삼 때려 입고 대전에 불공 드리러 간다”라고 동요가 그거였어요. 그러다가 십여 년 뒤에 삭발령이 내려가지구 냅다 머리 깎으라고 하니까 동네 한씨라고 하는 분이 있는데, 그분이 무조건 조대갈, 문대갈 하고 그랬어. 우리가 어려서 듣기 싫어했는데, 그런데 십여 년 뒤에 우리보고 놀리던 사람이 삭발해가지구서 아버지도 머리 깎고 아들도 머리 깎고 강제로 깎으라고 하니까 깎구. 색의장려하라니까 안하다가 장에 가서 막 물칠하고 그러니까 안할 재주가 있어야지. 결국 나중에 물칠하고 머리 깎고 그랬는데, 내가 그때는 반발심이 생겨가지구서, 너무나 놀려 대기 때문에 어린 속에 내가 그랬어, 한씨네였기 때문에 할아버지는 한대갈 두대갈하고 놀렸다고. 아주 복수했다고. 그러니까 옛기놈 하더라고 그래 왜 할아버지보고 조대갈 문대갈했느냐. 우리 할아버지가 얼마나 세상을 알으시고 한 분들인데 왜 놀려댔느냐. 왜 머리깎은 당신을 보고 한대갈 두대갈을 내가 안했느냐 했지, 한두 번 놀려댔으면 몰라도 너무 듣기 싫어서 내가 그런 거라고 나중에 그렇게 하니까 “야 야, 그만두자” 그러더라고. 그래 알았습니다 한 일이 있는데 그 양반들이 세상 일을 먼저 아는 분들 아니우. 그렇기 때문에 머리 깎구 색의장려 먼저하고 두루마기도 단추 달아 입고 그렇게 선도적으로 나서서 인생을 그렇게 하시다 돌아가셨어요.
동학 교인들이 머리를 빡빡 깎고 다녔다는 사실을 전해준다. 이것은 천도교로 개칭하고 문명개화론으로 방향을 전환한 이후의 이른바 ‘갑진개화운동’ 때의 사정을 말하는 듯하다.
그렇지. 교인들은 원래 그렇게 깎았어.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 나 3대가 그렇게 깎고 나중에는 얼마 안 있다 색의장려가 들어오고 삭발령이 내려지고 세상 사람들이 다 깎아버렸지. 그래서 우리 어린 사람들 소견이라도 이 할아버지 그분들이 선각자이시다. 먼저 세상을 아시는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우리 할아버지 자랑도 하고 이러한 양반인데 그렇게 욕하고 하면 쓰냐고 얘기하고 그렇게 하시다 돌아가셨어.
그 후 후손들의 생활과 지금의 생활에 대해 조병철 씨는 한숨과 함께 흘러나왔다.
교육 가르칠 형편도 없었죠. 그래가지구선 우리 아버지께서도 배우지 못하시구 우리들도 할아버지께서 천자문 정도만 배우고, 역시 어려우니까, 보통학교 사년밖에 못 나왔어. 그런 정도로 생활수준이 얕어가지고 그다음에 소작논 지으면 전부 다 오할 장리로 다 뺏어가고 쭈갱이 몇 알 남고 이런 정도 해가지구서 일생 동안 고생하셨어요. 그래도 동기간에 우애하고 사람을 하늘과 같이 섬기라는 말씀을 돌아가실 때까지 하시다 일생을 마치셨어요. 우리 아버지는 무식해 일생 노동만 하시다 돌아가셨어요. 나는 그래도 다행히 몸이 건강해 잔병없이 살았시우. 내가 내년이 팔십인디 여직 살으니까 건강한 편이지. 할아버지께서 그렇게 유고하셨는데 그 뒤를 이어 받지 못해갔고 그게 유감이요. 왜냐면 현실이 교인들이 고생을 너무 많이 해갔고 정신적으로 타격을 받아갔고 교를 싫어해요. 교해서 뭘하느냐 이런 생각이 들어간단 말이여. 역시 살 길이라고 말씀하셨지만 그것을 이어받지 못한 것이 유감이요. 지금 애들이 농사짓고 있어요. 나는 뭐 구경만 하는 정도고. 왜냐면 애들도 크고. 그래서 할아버지 입석이라도 하나 세워야 할 것 아니냐. 느그 아버지 죽기 전에 비석이라도 하나 만들어놓고 죽어야 여한이 없겠는데 너희 생각이 어떠냐 그러니까 좋다고 그러면서도 아직 형편이 못 되니까 그냥 입석 하나도 못하고 있시우. 아! 그렇게 고생한 양반들 입석이라도 해야 당연히 옳은데 그게 뜻대로 안되드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