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최강여(崔姜汝)
1874~1926. 본관은 경주. 족보명은 영석. 목수였던 아버지가 홍성군 결성읍의 관아를 짓기 위해 서울에서 내려온 이후 결성에 정착. 결성으로 옮긴 직후(1894년 무렵) 농민군에 가담하여 홍주성 전투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됨.
최풍식(崔豊植)
1946~ . 족보명은 호진(鎬珍). 최강여의 손자로 대학을 졸업한 후 교직에 종사. 현재 한신대학교 학적과장으로 재직중이며 동학농민혁명유족회 감사로 활동중.
배항섭
다시피는 녹두꽃
홍주목(현재의 홍성)은 충청도 서북지역의 중심지로 대체로 동학교단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동학교단측이 남접에 호응하여 봉기하는 행위를 엄격히 금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늦어도 7월 초반이 되면 곳곳에서 농민군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7월 초반이 되면 동학의 주문소리가 사방에서 점치(漸熾)하였고, 난도(亂徒)가 사방에서 일어나 “종이 주인을 범하고 구실아치가 관장을 핍박하고 천민이 귀인을 능멸했다”(『홍양기사』 7월 9일조)하는 일이 잦아졌다. 최강여가 농민군에 가담한 것도 이때쯤인 것으로 보인다.
증조할아버지깨서는 원래 서울서 사셨대요. 고향이 서울이셨는데, 관에서 인정하는 대 목수였고, 홍성군 결성 읍내를 세울 때 관청을 짓고자 서울서 내려오신 거지요. [할아버지는] 결성읍 세울 때인 청년시절에, 아마 스무 살이셨는데, 그때 봉기에 참여하시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아버지 따라서 결성 지역에 와서 청년시절에 동학운동에 주축이 된 거겠지요. 그때 스무 살 무렵에 홍주 전투에 참여했을 거라는 생각은 들어요. 그때가 가장 활발할 나이니까.
10월 28일부터 10월 29일에 걸쳐 계속된 홍주성 전투는 이 일대에서는 가장 큰 싸움이었다. 전투가 끝나고 농민군들이 해미 쪽으로 퇴각한 다음 시체는 동문거리를 메웠다. 선봉장 이두황은 “군사를 이끌고 동문을 나와보니 좌우의 민가는 깡그리 타버려 참혹하여 볼 수가 없었는데 길가는 사람에게 물으니 동도가 성을 에워싸고 접전할 적에 그네들이 불을 질러 이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백여 보를 걸어나오니 적의 시체가 도로가에 가로세로로 산이나 숲처럼 쌓여 있었다”고 하였고(『양호우선봉일기』), 『홍양기사』에는 이날 죽은 농민군의 수가 6, 7백 명이나 되었다 했다. 농민전쟁이 일어나던 당시 최강여의 집은 그런대로 살 만하였다 한다.
그때는 [증조부가] 관청에서 인정하는 대목이었다니까, 살기는 괜찮을 정도였겠지요. 그 당시 할아버지께서 씻은 배추줄거리 같이 희었다라든가, 키도 크고 한량이고, 술 잘하시고, 춤 잘 추시고 그랬다는대요. 집안일은 돌아보지 않고, 할머니께서 살림을 하셨다고 하더라구요. 지금 말하자면 운동권처럼 막 돌아다니시고.
그러나 농민전쟁이 끝나자 다른 농민군 후손들이 대부분 그러한 것처럼 최강여의 후손에게도 역시 숱한 애환의 날들이 뒤를 이었다.
할아버지에 대해서는 어머니한테 듣고, 어머니는 우리 아버지의 이모부하고 동서되시는 분의 증언으로 알고. 동학운동하다가 공주 형무소에서 돌아가셨다, 그 얘기만 전해들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혁명운동을 했는지 추적할 수가 없드라구요. 돌아가신 연도는 우리 어머니로부터는 아버지가 조실부모 하셨다고 해서 어렸을 때 돌아가신 걸로 기억을 했는데, 호적을 보니까 1926년에 돌아가신 걸로 되어 있드라구요. 당시 역적 어쩌고 하고 아예 감옥에 갔으니까, 숫제 돌아가신 걸로 여기고 내색을 안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친정으로 들어가시면서 아예 돌아가신 걸로 치부해버리고, 인제 늬아버지 돌아가셨다. 그러니까 친정 살면서도 남편은 감옥에서 옥살이 하고 있고 속상하니까 오래 못 사시고 친정에서 돌아가신 것 같다. 그 후에 우리 아버지께서는 살아계실 때도 할아버지 묘소가 어디 있다는 걸 몰라요. 결성 읍내라고만 돼 있는데, 최근에 와서야 아버지께서 그런 말씀을 안하셨구나 하는 사실을 알고. 할아버지께서 의로운 일을 하시다 돌아가셨구나 하는 걸 알지요. 이런 사실을 조금만 일찍 알았어도, 아버지께서 이십 년 전에 돌아가셨으니까, 아버지 살아계실 때 얘기를 들었으면….
최강여는 언제인지는 몰라도 체포가 되었으며, 오랜 감옥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관에서는 ‘역적’이라 하여 지목이 심하였고, 그래서 집에서는 아예 죽은 것으로 치부하고 지낸 탓으로 할아버지가 농민군에 가담하였다는 사실도 잘 모르고 살아왔다는 말이다. 그 뒤로도 최강여의 아들이 살아온 길은 말 그대로 가시밭길이었다.
그러시다가 저희 아버지께서 할머니하고 외갓댁으로 가신 거지요. 외갓댁에서 어떻게 생계는 유지 못하고, 아버지는 바깥일만 계속 보시고 그러니까 외갓댁을 가셔 가지고 거기서 사셨는데, 거기서 열몇 살 때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거지요. 큰외삼촌이 아주 싫어하고 구박하고 그러니까, 열너 댓 살에 도망쳐나와가지고, 머슴으로 사신 거지요. 그렇게 머슴을 십년 이상 하셨다가 주인집에서 착실하니까 데릴사위를 했지요. 그래서 머슴하면서 십여 년 이상 번 돈이 있었는데, 장인이 어디다 빚져가지고 다 넘어갔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 속상해서 막 우시고, 에라 하면서 그 장인집에서 나와가지고, 장항선에 철도선로반 노동자로 들어가신 거예요. 그 후로는 삼십 년 동안 일하시다가 정년퇴직하셨지요. 그러니까 고생 참 하신 거지요. 그 당시 삶이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요. 지금 같으면 노동자들이 공장 취직하지만, 그 당시 어쩔 수 없이 머슴으로 갈 수밖에 없단 말이예요.
오늘날의 운동권처럼 살다간 할아버지의 삶에 대해 최풍식씨의 감회를 들어보자.
저희 아버지 생애가 저는 관심이 있습니다. 어려서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머슴살이하고 그래서 데릴사위를 하였고, 그런데 그 장인 되시는 분이요, 제 아버지가 착실하시고, 농민군 아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는 얘기가 있어요. 니네하고 우리집하고는 가깝다 해가지고 서로 사돈간에 독립운동 했으니까,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들었는데. 결혼하시고 일년 남짓 있다가 처가집에서 나온 거지요. 아버지께서 설움 많이 받고 참 고생했지요. 그래서 우리 아버지 생각해보면, 가슴이 저며와요. 당시 고을 원님 따라서 했으면 꽤 괜찮았을텐데, 고생 많이 해서 그래서요. 전봉준 장군이나 유명하신 분들은 민족의 훌륭한 분인데, 이름없이 숱한 사람들이 죽어가고 아들들이 머슴살이 하고 구박받은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슬퍼요. 그러고보면 우리 할아버지의 모습이 그 당시 우리 민중들의 삶이 아니겠나, 그래서 짧지만 우리 민중은 이렇게 살아왔다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도 괜찮겠드라구요. 할아버지 이름 내겠다는 생각은 죽어도 없구요.
전봉준 장군처럼 유명하지는 못하였지만 한 시대를 온몸으로 부딪히며 살다간 할아버지를 ‘그 당시 우리 민중들의 삶’으로 이해하는 만큼 최풍식 씨의 삶도 예사롭지는 않았다. ‘운동권’ 아버지를 둔 탓으로 머슴과 노동자로 전전한 아버지의 아들, 최풍식 씨가 살아온 이야기는 농민군 할아버지가 ‘역사’ 속에 어떻게 살아숨쉬는지를 잘 보여준다.
우리 아버지께서 본래 십일남매를 두셨어요. 대천으로 이사와서 셋방을 사셨지요. 우리 어머니 모시고 단칸방에서 사시다가, 모두 해서 십일남매를 두었는데, 아들 넷을 잃었지요. 거기서 사시면서 큰아들은 죽고, 큰딸은 대천의 조흥은행 행원으로 일하고, 거기서 살다가 아버지께서는 정년퇴직을 하셨지요. 저는 국민학교 육학년 때 아버지가 정년퇴직하셨으니까, 가정살림은 누님이 군청에 급사로, 사환·교환으로 살림을 맡았고. 형들은 고학했고, 큰형님은 그 당시에 광주 조선대 약대를 갔지요. 그래서 저희 아버지는 선로반을 하셨으니까, 국유지를 불하받아가지고 네 마지긴가 농사를 지으셨어요. 저는 대천국민학교, 중학교, 대천실고 농과를 졸업해서 대전대학[지금은 한남대학] 화학과를 입학해가지고, 군대가서 월남으로 갔지요. 제대하고 나서 시골 중학교, 서천군 판교에서 교사를 하다가 고향 대천으로 와서 미션 스쿨에서 칠년간 근무를 했어요. 그러다가 지금은 한신대학 교직원으로 학생주임을 하고 있지요. 저는 민주화운동, 육십 때는 상당히 관심이 많았어요. 최루탄 냄새 참 많이 맡았어요. 세진이[86년에 분신 자살한 김세진을 말함] 아버지도 같은 교회에서 만났어요. 제일교회 다니면서, 오년 동안 박형규 목사님이 주재하시는 길거리 예배를 봤어요. 길거리에서도 막 최루탄 개스 마시고, 뭔가 피가 흐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요. 세진이 아버지도 그 할아버지가 효수당하셨으니까. 그래서 상당히 절친해졌지요. 역사의 고난에 참여하자, 동참하자는 데 상당히 공감을 하지요. 지금도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직도 민족자주화가 안됐고. 할아버지 때 고생을 하고, 어린 자식 남겨놓고, 아내 남겨놓고, 고생하시다 돌아가셨다는 생각을 하면 참 가슴이 저며오더라구요. 그리고 우리 아버지도 머슴살이하고 그 고생을 하고 얼마나 힘들었어요.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활달은 못하셨어요. 일에 찌드셨는지, 키는 작으셨고. 동네에서 제일 부지런하셨어요. 지금은 형제들은 잘 지내는 편이예요. 할아버지께서 그 당시에 하시려던 일을 이어서 요즘 저는 통일모임[홍동근 목사, 문기현 신부]을 세진이 아버지와 같이 하고 있어요. 그리고 또 참교육시민모임 서울후원회를 해체하고, 김찬국 교수하고 이상희 교수가 공동의장으로 있는 모임에도 참여하고 있지요. 할아버지 피가 흐르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이름 없이 돌아가셨을망정, 그것이 어떻게 보면 더 떳떳하고 긍지가 있지요. 이름없이 그 수많은 사람이 민주화운동에 참여했을 때, 이름없는 시민들 아닙니까? 박 목사님, 몇몇 사람들은 이름이 있었지만 그외에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했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이 쫓기고, 잡혀서 투옥되고 그런 것 보면 의욕이 생겨요. 76년에 삼일사건 명동사건이라고 명동에서 있었어요. 그때 참 서슬퍼런 땐데, 그때 아들이 태어났는데, 이름을 의건[義建]이라고 지었어요. 지금 중앙고등학교 삼학년인데 공부를 아주 잘해요. 하여튼 최루탄 숱하게 맞았어요. 우리 할아버지께서도 이런 고생을, 이런 생각을 하니까요. 아주 죽지 뭐. 할아버지는 더 하셨는데, 나도 죽으면 죽자하는 생각이 들드라구요. 사람이 한목숨 살다죽는 건데 죽자. 그리고 작지만 계속 여기저기에 기금을 보내주고, 한 달에 내가 온라인을 몇 개나… 그보다 더 내야지요. 이름 없이 묻혀가는 걸 밝히는 거니까, 증언록이 매우 중요하지요. 월남전 참전 당시에는 우리가 육이오 때 도움을 받았으니까, 우리도 다른 나라를 도와야겠다는 생각과 수당이 많았으니까 대학 등록금을 벌려는 생각을 가졌어요. 그런데 현재에는 그것이 잘못된 전쟁이었다는 생각이 들지요. 결국에는 외세의 개입이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