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박현성(朴顯聲)
1861 ~l929. 창호(漲浩)로 개명.
오래 대립해오던 예천의 농민군과 민보군이 1894년 8월 28일 결전. 민보군 1천 5백여 명과 농민군 4만 5천 명이 동원된 대규모 공방전이 벌어진 것임. 민보군은 치열한 반격 끝에 읍내 공격에 나선 동학농민군을 격퇴. 싸움이 벌어지기 전 농민군 사절로 읍내에 들어갔다 사로잡힌 인물이 있는데 그가 토치 접주 박현성. 계속되는 공방전을 틈타 달아났음.
박흥택(朴興澤)
1920~ . 박현성의 방손으로 예천군 유천면에서 농사를 짓고 있음.
1927~ . 박현성의 손자.
신영우
다시피는 녹두꽃
박흥택은 현재 예천군 유천면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그동안 인근에 커다란 비행장이 들어서는 변화가 있어 지금은 옛 마을인 토치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교동마을에 살고 있는데, 1986년 2월 21일 수소문해 찾아가서 증언을 들었다.
박현성이요? 아, 그 이름은 개명해서 창호[漲浩]라고 했어요. 족보에 그렇게 실려 있지. 내가 아니면 바꾼 이름을 모를 거요. 동학 접주한 얘기는 자세히는 모르고, 들은 게 뒤에 인제 관군하고 동학군하고 함창 태봉이라는 데 전쟁하러 갔거든요. 갈 때는 팔백 명이 나팔 불고 무기도 없이 농기구하고 가지고 가서 일본군이 모이고 관군도 모이고 동학군도 모이고 한목에 잡자 하고 했지요. 그렇지만 조총을 들이대서 쏘니 갑자기 막 쓰러지지요, 뭐.
증언자 박흥택은 예천 공방전을 모르고 있었다. 토치마을에선 그보다 함창·태봉의 일본군 병참부 소식을 더 잘 전해듣고 있었던 듯하다. 당시 농민군은 문경 산양에 집결해서 태봉 병참부 공격을 준비하던 중 일본군 정탐으로 나온 다케노우치(竹內) 대위를 붙잡아 처형했다. 이 사건은 일본공사관을 놀라게 했고, 이 지역에 관군을 서둘러 파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 충주에 주둔한 일본군 공병대 병력이 밀려와 예천 공방전 다음날인 8월 29일 석문리에서 6백여 농민군을 공격했다. 이 싸움에서 패한 농민군은 대일 전쟁을 위해 11칸에 쌓아둔 각종 무기와 군량 그리고 돈을 빼앗겼다.
그래 들구 내빼니 [박현성은] 고향에 못 오고 문경 가은면에 들어갔지요. 거기서 교를 했어요. 이름이 경천교래요. 경천교는 결국 내용으로는 배일이고 겉으로 봐서는 나라를 일으킨다고 하룻밤 치성을 드리고 그랬지요. 위치요? 원북리라고 충청도하고 경상도하고 접경이래요. 패전하고 거기 한배미라는 곳에 들어가서 못 나오고 있었지. 수백 명이 다니고 예천 문경과 경북 일대에서 제일 났었지요. 경천교 교인들은 전부 예전에 동학하던 사람이지요. 동학하던 머리 있는 사람들이 거기 모였지요. 그리구 [박현성 교주가] 돌아가신 뒤에 깨져버렸어요. 이 지방 사람들은 박천자라고 했지요. 전라도에서 차천로매로 말이지요. 가만히 옥새까지 새겨놨다고 소문이 났어요. 교인은 동학하던 사람이 다른데 의지할 게 없으니 거기에 모였지요.
1894년 이후 각지에는 동학 계통의 새 종교가 생겨난다. 농민군의 앞장에 서서 예천·상주 일대에서 활약하던 젊은 접주 박현성은 문경 가은면 원북리 한배미[閑夜洞]에 경천교(敬天敎)를 열었다. 그 위세는 대단했다. 지금도 경북 일대에서 나이 많은 이들에게 박창호 아니 박천자를 물으면 그 세력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갑오년에 말하자면 남의 재물을 그냥 탈취했단 말이지. 부잣집에 가서 군자금이 모자라니 도와달라고 했지만 줘야지. 그러니 자꾸 이런 사단으로 탈취할 밖에 도리가 있어야지요. 그런데 우리 증조부하곤 사촌간인데 그때로 봐서는 고만 불명예스럽단 말이지. 그래 직계손 손자도 백지 말을 못 내게 하고. 우리 증조부는 사촌간이라도 되게 나무라고 여기에 발걸음을 못하게 했어요. 요전에 손자에게 그러지 말고 광복회에 가서 신고하면 되는 일이 있으니께, 표창이 있을 것이니, 해라고 해도 안해요. 몇 번 권했지만 할배가 동학을 했다는 걸 자꾸 불명예스럽게 생각한단 말이지요. 이 사람은 자기 할배같이 공부만 해요. 함창 전쟁, 태봉 전쟁에 나간 것도 우리 조모한테 듣고 내가 얘기했지요.
박현성이 고향을 떠난 것은 동학 접주로서 부자들의 재물을 털었던 전력 때문만이 아니었다. 양반 가문을 먹칠했다는 집안 내부의 비난이 더욱 아팠다. 지금은 오히려 일본군과 싸웠으니 공로가 있다고 생각하고 광복회 등에 알리라고 직계 후손에게 권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농민군의 명예는 전혀 회복되지 않고 있다. 정부 어느 기관도 나서서 바로잡을 생각이 없다.
가동에 가면 권부자가 살았어요. 옛날에 그 집에 동학군이 밤중에 가서 재물을 빼앗았어요. 달리 보복할 수도 없고 예천 관가에 가서 고자질해서 관군이 쳐왔단 말예요. 동학 때문에 무안 박씨는 몰락됐지요. 요새말로 하면 기운도 못 쓰고 몰락이지요. 부잣집 털다보니께 그 부잣집이 만만치 않은 집이래요. 권부자가 관군을 몰고와서 그랬지요. 그 부자 이름은 압니까 뭐. 우리 조모님이 그랬으니까요. 그 [박현성] 집도 기와집이고 우리 증조부도 기와집인데 [관군이] 온다니께 이 양반은 들고 뛰어뿌리고 하마 두 집에 불을 놔뿌리니께 그만 폭싹 망해뿌릿지 뭐. 우리 증조부는 모르고 잡혀갔지요.
농민전쟁에 앞장을 선 후유증은 당사자뿐 아니라 일가 모두에게 미쳤다. 동학의 근거지라 해서 민보군이 가리지 않고 불을 질러버린 것이다. 토치의 무안 박씨는 양반이다. 그러나 접주 박현성 아니 박천자 창호는 집안에서 귀하게 자란 사람은 아니다. 뛰어난 능력은 역경 속에서 키워 가는 것인가?
토치의 무안 박씨는 양반이었지요. 십대 웃대에서 사대가 연달아 문과 급제를 했어요. 그래서 경내에선 우리는 양반 대접을 받았지요. 유림들 도회를 하면 지금도 연락이 옵니다. 옛날엔 선비들끼리 통했지요. 혼로를 따져보면 알지요. 양반과 혼인했어요. 족보에 다 있어요. 여기 보세요. 우리 종조모는 안동 김씨였지요. 우리 증조부는 그때 예천에서 일등가는 학자였어요. 이 양반이래요. 문집이 있지요. 치암집[痴庵集]이래요. 이 문집은 내 손으로 정리해서 초해놨어요. 아직 활판은 못했어요. 그 당시 토치의 무안 박씨들은 잘살았지요, 기와집에 살았으니까. 추수는 약 백 석 정도 했대요. 무안 박씨가 돈 좀 있으니까 새로 터를 잡으려고 낙동강 따라오니 토치가 좋거든요. 강원도 풍수를 데리고 터를 잡았는데 발복할 장소라고 그랬대요. 이대 칠대가 그렇다는 게지요. 칠대에서 바로 이 양반 창자 호자에 난 것이지요. 창자 호자는 조선 말에 났으니까 이래 됐지만 정상적으로 좋은 때 났으면 참 인물인데, 망국지세에 나라가 망할 때 났으니 원. 동학 때도 그렇고 경천교할 때도 자기 앞에 몇천 명 한 오천은 넘었을 거요. 와글와글 모여서 거느렸으니 인물은 인물이지요. 논두렁 정기라도 타고 나야 하는 거지. 그런데 그 형제분으로 청주 한씨에게 나신 분이 한 분이고, 다른 세 형제는 정상적으로 오지 못한 백천 조씨, 그러니까 내종 온 분에게 났지요. 솔직히 서자래요. 그리해서 미운 중에 동학에 들어 가지고 집안을 망해놨으니 얼마나 미워요. 그래. 오지 못하게 한 거라요.
예천 일대에서 농사는 어떻게 지었을까? 토치 부근은 논보다 밭이 더 많다. 수확물을 시장에 내다팔기 위한 농업이 여기에서도 중요했다. 먹을 것이 있는 곳엔 양반 토호의 문제가 생겨나기 마련이다.
면화를 길러서 면포는 자급자족 다했고 우리 클 때도 그걸 시장에 팔아서 용돈을 다 댔어요. 누에도 먹이고 면화도 갈고. 닷새에 한 필 짠다, 두 필 짠다 그런 말을 조모님께 들었지요. 장사꾼이 들어와서 걷어가서 강원도에 가서 팔기도 하고 강원도에선 삼베를 걷어오기도 하고 그랬어요. 닷새 한 장 동안에 한 필 짜니께 그게 제일 빠른 거라요. 실을 잣는 건 하루 자면 그 다음날 뽑아요. 혼자 하면 더딘데 같이 하면 빠르지요. 사흘 만에 베 한 필 뽑아내요. 베짤 때 아홉 새 열 새를 짰지요. 제일 고운 건 열 새. 파는 건 여덟 새 일곱 새. 한 필은 마흔 잔데 서른네 자로 줄어서 고레밖에 안 끊었어요. 명주는 그래 많이는 안했어요. 땅 한 마지기를 사려면 베 몇 필을 짜야 하냐고요? 그건 모르지요. 양반이 토색한다는 건 들었지요. 어느 성씨인지는 말하면 그 집 후예들이 듣게 되어서 좋지 않지요. 홍씨가 한 분 그랬어요. 지주로는 여기 박기양[朴箕陽 : 뒤에 친일파] 땅이 있었어요. 양자는 반남 박씨 돌림자라요. 이 삼문 땅도 유천 여기에 많이 있었어요. 없는 데가 없었어요. 또 이규화 씨도 땅이 대단했어요. 여긴 거지반 그 사람들 땅을 부쳤지요. 수확한 것을 반만 가져가면 모르는데 더 훌터가니께 욕했지요.
박현성의 손자 박종해와 손부는 예천 전투에 관한 것보다 경천교를 할 때의 일을 잘 알았다. 이 경천교는 규모가 컸던 청림교(靑林敎) 문경지부의 격으로 총독부의 인가를 받고 포교활동을 했다고 한다. 청림교는 원래 동학의 지류로 1891년 정수기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계룡산, 속리산 그리고 문경의 청화 등지에 근거를 두었다(이능화의 『조선도교사』). 교주는 선생님 또는 본주(本主)라고 불렀고, 주문은 동학과 같았다. 도통은 두 형제 용익(龍翼)과 봉익(鳳翼)으로 이어졌는데, 1986년 3월 31일 녹음한 손부와 손자의 증언을 통해 여러 사실을 들어본다.
손부 작년에 세상을 아흔에 뜨신 우리 시어머니는 여덟 살 때부터 청수를 떠놓고 살았대요. 우리 시할아버지는요, 인물이 기골이 장대하시고 누가 봐도 뛰어나셨다고 해요. 저는 우리 시어머니한테 들은 말이지요. 말도 못했다고 해요. 수운교 하면서 사뭇 산으로 산으로 다니면서 호랭이하고 같이 다녔대요. 우리 시어머니에게 들은 것을 보면 도인들하고 왜병들하고 싸우는 사람들 전부가 한 뭉치가 되었는가 보지요. 왜병들 피하구 싸우는 일이 한 해 두 해로 끝나는 일이 아니었잖아요. 그래 한 마을을 이루고 살았는가보대요. 거기는 벼농사가 하나도 없는 데예요. 고구마하고 감자하고 하다가. 사람들이 많아서 밥을 솥에 하지 못하고 시루에 쪄냈다고 하대요. 죽을 해내도 하도 사람이 많아서 앉아있을 수가 없었대요. 겨울에 심심하면 시어머니에게 물어봐서 들은 거지요. 그런데 [일본 순사가] 일본사람하고 싸운 거를 말하라고 그래대요. 그리구 증인을 찾아내라구 그랬대요. 뭐라고 하더라, 우리 시아버님도 그때 갇혀서 고생하시구요. 시삼촌도 갇혀서 고생하시구요. 언제든지 돈벌면 할아버지 사당 하나를 지어놓고 죽어야겠다고 하시대요. 억울하다고요. 가은면 원북에서 박천자라구 했었대요. 산골물에 밤낮 사람들이 찾아들으니드르, 쌀을 씻고 하면 모래실이라하는 데까지 쌀뜨물이 십 리를 뻗쳤었대요. 밤낮 주문을 읽고 기도하느라고요. 읽는 소리가 비지를 않았다고 해요. 주문을 어떻게 외우는지 나는 모르지요. 뭐뭐 봉명천하 이미지방 이렇게 나가대요. 용산복두 어떻게 하다가 대통남 대한민국 몽산복구 좌풍우월 현청목창하 만물 보국안민 지성감응하라. 이 나라를 안정시켜 달라구 그랬대요. 우리 아버님[龍翼]하고 시삼촌[鳳翼]하고 이어받아서 했지요. 아버지 따라다니던 사람들이 계속 왔었어요. 돌아가신 후 구일장을 치뤘대요. 그리고 차차 많이 줄었지요. 살미에선 암자를 하나 했지요. 경신년부터인가 태백산에 들어갔지요. 우린 오직 하늘을 위하는 거라. 절도 안 거치대요. 절은 절인데 절이라고 부르지 않고 만경대라고 부르지요. 창자 호자 하는 시할아버지는 글을 잘했다고 해요. 대학 책도 꾸며 내놓고 중용 소학도 꾸며냈다고 해요. 쓰신 책도 있겠지요. 경천교하는 때 불이 나고 또 육이오 때 다 불에 탔었어요. 그래 책 한 권만 남았다고 그러대요. 손자 원북 한배미에 와서 살던 교인은 사십 호는 되었지. 보통 모일 때는 삼백 명 가량 되고, 전부는 삼천 명 정도인데 남자가 많았지. 그런데 임오년[1942년] 전후해서 일본 순사들한테 시달렸어. 안동 교인의 일이 발단이 돼서 문경경찰서에 많은 사람이 붙들려가서 고문을 받았지. 상주까지 가서 재판을 받았어요. 그러다보니 위축이 되었지. 할아버지는 한학 역학 천문 지리 풍수에 해박했지. 열아홉 살 때 예천군 내에서 씨름판을 휩쓸었던 장사라 환갑이 지난 후에도 젊은 사람이 들지 못하는 돌들을 들어 던졌다고 해. 주문은 많지. 주문을 외우면서 동서남북으로 위하는 데가 있지. 한장인데 위하는 데가 중앙이요, 동쪽 서쪽 남쪽 북쪽이 있어요. 적저 붉은 돼지는 정해년이고, 청호라 푸른 호랭이는 정월달이라. 이때 상고하여 썼다는 것이라. 이것은 병인년에 청림교를 도창한 제목이라. 일본놈과 싸워보니 일은 되도 안하고 그러니께 사람을 모두자니 도를 빙자해야 마음대로 출입하고 이러커든. 그래노니 저 사람들은 들락거려도 도를 하는 모냥이다, 이래 하기 위해서 그랬지.
이 글을 쓴 사람은 김병연이고 호는 등암[燈巖]이라, 등불 등자. 책이란 게 있으면 말이라, 일정 때는 무수와. 늘 조사오고 하니 내비둘 수도 없으니 필요한 건 내가 다 보고 [불에] 줏어 넣어버렸어. 책이란 필요없는 거야. 지금 선비들이 말만 철학 철학 그렇지, 철학의 진리가 무언지 그걸 몰라요. 철학은 천문지리 주역을 본다 하는 것이지. 주장 철학을 본다 하는 것은 그건 주역 가지고 말하는 것인데 주역을 배웠다고 하면 지금 몇 해 수가 돌고 도수가 어떻게 되고 말이지, 앞으로 무슨 운수로 세상이 열린다는지 알아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없어. 나는 속리산 천왕봉 상원암에서 공부를 했는데 그때 이성관[李性觀] 스님이 있었는데 성품 성자 볼 관자지, 속리산 큰절에서 도력이 높다고 해서 재를 올리면 재를 해주고 그랬지. 그때 속리산에서 수도하는 스님보다도 박종해가 더 낫다 한 적도 있어. 거기서 백일 하다가 오고 그 후로도 명산을 찾아다니고 했지. 포덕천하 광제창생 보국안민[布德天下 廣濟蒼生 保國安民] 지성감응덕을 천하에 펴고 창생을 널리 건지고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해달라는 것이 기도라고. 불도에는 각세[覺世]라 세상을 깨달아라 그러고, 유도에는 치세[治世]라 세상을 다스리라 그러고, 선도에는 제세[濟世]라 세상을 건져줘라 그러는데 마음을 어질게 먹고서 모르고 약한 사람을 인도하고 건져줘야 사회가 문란하지 않고 편하지. 세상이 왜 이런지 모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