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전기항(全基恒)
1827~1900. 경상도 예천의 금당실에서 활약한 동학농민군이 1894년 8월 28일 화지 농민군과 함께 읍내를 공격하나 민보군의 반격으로 실패하고, 민보군은 금당실 일대의 동학농민군 근거지를 불태우는 등 혹심한 보복에 나섬. 이때 동학 수괴로 알려진 모량도감(募糧都監) 전도야지 전기항을 추적했으나 잡지 못함. 전기항은 가족과 함께 오랫동안 피신생활을 하여 금당실로 돌아갈 수 없었고, 손자 일호 대에 다시 돌아옴.
나주 정씨(羅州 丁氏)
1901~ . 일호의 부인이며 기항의 손자며느리.
1943~ . 기항의 고손자로 예천농협 전무로 있음. 동학농민혁명유족회 부회장으로 활동중.
1915~ . 기항의 방손으로 금당실에서 농사를 짓고 있음.
신영우
다시피는 녹두꽃
전도야지 전기항에 관한 일화를 듣기 위해 1986년 2월 23일 전기항의 손자며느리 나주 정씨를 전장홍·전상춘과 함께 한자리에서 만났다. 증언을 채록하는 데는 나주 정씨를 모시고 사는 손자 전장홍의 도움을 받았다.
[[손자/IMGSOURCE 할머니. 나한테 고조부가 되시는 어른이 관청 벼슬은 안해도 옛날에 이 지방에서 명망 높았던 어른이 있다고 하는데 그걸 알려고 지금 오셨거든. 그 얘기 좀 해주세요. [[할머니/IMGSOURCE 그래. [[손자/IMGSOURCE 할머니가 언제 돼지, 돼지 하던 어른이 계셨지 왜. [[할머니/IMGSOURCE 그래. 나한테는 시조부가 돼. 옴봉산에 계시는 어른이지 너한테는 고조부가 되지.
예천의 농민전쟁 기본 자료인 『갑오척사록』에 전도야지가 나온다. 읍내의 민보군이 금당실에서 붙잡아온 농민군을 취조하여 금당실의 ‘동학수괴’가 모량도감인 전도야지인 것을 알아내어 기록하였다. 이 자료를 근거로 해서 금당실에 사는 전씨를 모두 찾아 물어보고 1894년에 활동하던 한문 표기 도야지(刀也只)즉 돼지라고 불린 인물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손자/IMGSOURCE 별명은 왜 그렇게 불렀다고 하는지 그 얘기는 들었어요. [[할머니/IMGSOURCE 별명은 좀 꾿다고[뚱뚱하다고] 그리고 무섭다고. 별명이 꾿고 무섭다고, 우리가 선을 보고 할 때도 [사람들이] 돼지라카던데 돼지라카던데 그랬어. 전에 가만히 시어머님한테 들어보면은 그렇게 무섭지도 아니했는데 허명만 그렇게 찼지 무섭지 않았다고 그래. 그런데 집에서 가정에 무섭게 했다고 그래. 자제나 며느리한테나 그렇게 무서웠다고 그래. 우리 전씨는 양반이었어, 박씨들보다 우리가 더 양반이라고 어른들이 그랬지. 학문도 높았다고 그래.
꾿다는 말은 살이 쪄서 몸이 두껍고 크다는 말이다 공식 기록에 도야지라고 쓴 것은, 호적 단자에 간혹 천민 이름이 망아지나 송아지로 씌어 있는 것처럼, 신분이 천해서 온전한 제 이름이 없이 살았던 것이 아니고 별명을 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다.
[[손자/IMGSOURCE 할머니. 유천 할매 산소는 왜 거기 가서 있는가? 그때 여기 금당실에 살았는데 산소를 왜 유천에 모시게 되었는지, 거기에 땅이 넓은 게 있었다든지 무슨 까닭이 있겠지요? 다른 산소는 다 여기 있는데 왜 그 할매만 거기 계시는지 궁금해요. [[할머니/IMGSOURCE 그건 용궁도 가서 살다가 유천도 가서 살다가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살았지. 열세 군덴가 열네 군덴가를 돌아다니며 농막을 짓고 사셨지. 그 농막을 왜 그렇게 여러 군데 만들었는지 그 내용은 할매도 몰라.
예천의 민보군은 농민군 가담자에게 호된 보복을 가했다. 예천의 농민군 진압을 관할한 상주 소모사가 도리어 호통을 쳐서 말릴 만큼 혹심했다. 전기항과 그의 가족들은 민보군에게 집요하게 추적당했다. 그것은 많은 재산을 가진 지주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기항 일가는 여러 지역을 전전하면서 숨어살았다. 번듯한 집이 아닌 농막을 사방에 짓고 그때 그때 피신한 모습이 증언에서 드러난다.
[[손자/IMGSOURCE 이 어른이 재산을 어떻게 모아가지고 어떻게 썼다고 그래요. 우리가 지금 이렇게 못 살잖아요. 웃대 어른은 잘살았다고 그랬는데. 재산을 다 어떻게 했다고 그래요. [[할머니/IMGSOURCE 재산은 우예 모았는 둥 모르고 재산을 모다가지고 헛되이 안 썼다고 그래. 밥 한 그릇도 허비 안했다고 그래. 어른이 돌아가셨는데 안어른은 유천에 모시고 이 어른은 옴봉산에 모셨지. 그 어른이 나에게 시조부가 되시고 그래. 이 어른들이 양자를 할라고 보니 아직 자들 할배가 어려서 할 사람이 없으니 먼촌에서 하나를 데려다가 한문을 갈치고 글을 갈치고 장가를 보내서 삼남매가 났다고 그래. 그런데 외지로 갔지. [[손자/IMGSOURCE 길쌈은 많이 했어요? [[할머니/IMGSOURCE 무명 목화를 많이 심었지. 길쌈을[집집마다] 다 했지. 웃대 어른들이 길쌈을 많이 했다고 해. 나한테 시조모가 되시는 분이 그렇게 무섭게 길쌈을 했다고 해. [[전상철/IMGSOURCE 그 어른이 얼마나 무서웠는가 하면 농기구 같은 것도 말야. 두 가지 세 가지씩 해놓고 말야. 남이 이웃에서 빌리러 오면 사람 봐가지고 중질을 주거나 그렇지 않으면 하질을 주고 상질은 안 줬다고 그래. 대인관계도 그렇게 틀림없었다고 하지.
예천 일대는 목화 재배가 성했던 고장이다. 집에서 목화를 따 길쌈을 해서 무명을 짜면 살림을 늘릴 자원이 될 돈을 모을 수 있었다. 일단 재물을 모으면 땅을 사서 농사를 키우고, 쓰는 것은 아끼고 또 아꼈다. 부농은 그렇게 되는 것이었다.
[[손자/IMGSOURCE 그 많은 재산을 그렇게 엄하게 관리하면서도 하나도 지금까지 전수가 안되었던 내용들을 이상한 걸로 생각했지 자세히 몰라요? [[할머니/IMGSOURCE 그 재산이 그만 다 흩어지고 없어졌다고 그래. 우리 시아버님이 아랫대가 없다가보니까 사람을 하나 두니께 거기서 딸 하나 낳고 또 한 밑천씩 해서 살림을 내줬다고 해. [[손자/IMGSOURCE 웃대 어른들이 재산을 어떻게 썼는지 그것은 모르지요. 우리가 생각해보면 이 어른들이 학식도 훌륭하고 체격도 좋은데 감히 누구에게 빼앗기지도 않았고 또 경우에 따라 몰라가지고 누구에게 사기를 당한 것이 아닐텐데 그것이 어디에 썼느냐 궁금하고 납득이 안되지요. [[할머니/IMGSOURCE 어떻게 됐는지 나도 몰라.
도망만 다녔던 사람들이 뒤에 남겨진 재산의 처분 사정을 알 길이 없었을 것이다. 전기항은 여러 면에 걸쳐 많은 땅을 소유했다. 이 땅은 관에서 몰수했다. 그러니 뒤에 알았다고 해도 되찾을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본래 용궁 전씨는 의성의 신평면 쌍호리에 살았다. 그러다 살기 좋은 곳으로 옮겨가서 사는 분위기에 따라 전기항 형제는 십승지지인 금당실로 이주하게 되었다. 금당실에는 명문 함양 박씨가 370여 년 전부터 터를 다져온 곳이다. 따라서 양반 성씨간에 갈등도 생겼다.
[[전상춘/IMGSOURCE 용궁 전씨가 금당실로 이주한 것은 기자 항자, 기자 태자 때었단 말야. 기자 태자가 먼저 온 후에 형제분들이 뒤따라서 왔다고 그래. 의성 쌍호리에 가면 전씨들이 많이 살아. 거기 가서 전상철[全相徹] 씨 찾으면 자세하게 말할 거라고. 그러니까 이 어른들이 여기 올 때도 재산을 많이 가지고 왔다고 하거던. 용궁 전씨는 양반이야. 기자 항자 구대조가 참봉을 하신 뒤에 과거를 못하고 지내왔지만 양반이라고 그래. [[할머니/IMGSOURCE 어른들이 그러시는데 박씨가 양반이라고 하지만 전씨가 진짜 양반이었다고.
농민군 지도자는 어떤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었을까. 전상철과 전장홍의 말은 시사해주는 바가 많다. [[전상철/IMGSOURCE 전에 어른들한테 들은 얘기로는 용궁에 있는 일가들이 무슨 일이 있는 둥하면 이 어른이 안 가시면 무슨 일이건 못했다고 그래. 집안에서 중심이었지. [[손자/IMGSOURCE 제가 아버지만 못하고 아버지도 할아버지만큼 힘쓰는 거나 체격이 못하다고 그래요. 또 들은 얘기지만 할아버지도 그 웃대 어른만 못하다고 해요. 제 키가 일 미터 칠십오인데 지금도 곁으로 봐서는 약한 체격이 아닌데 그 어른들한테는 비교가 안된다고 그래요. 종조부님들도 풍채는 참 좋았다고 그래요. 그래도 우리 증조부님만 못했다고 그래요. 저의 아버지도 씨름 선수를 했어요. 할아버지가 살 길을 찾아 금당실에 돌아와서는 씨름꾼으로 나섰다고 그러지요. 우리 할아버지가 문경군 동로면과 예천군의 유천면 용문면 일대에서 씨름할 때 이길 만한 사람이 없었다고 그래요. 그만큼 힘을 썼지요. 그래도 웃대 어른보다 못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할머니 너의 아버지가 배우지를 못해서 그렇지 체격은 좋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