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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록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함경도 농민군 박경순, 손자 승일
대상인물

박경순(朴京順)

1868~1907. 본관은 밀양. 함경도 단천군 수하면 하운승리에서 태어나 함경도 삼수에서 활동하다 의병항쟁 기간에 사망.

증언인물

박승일(朴昇一)




1919~ . 박경순의 손자로 단천군 수하면에서 태어나 중국 만주 목단강성 영안현 석두촌에서 학교를 다녔고, 1·4후퇴 때 월남하여 자동차서비스 공장을 하며 육해공군에 지프 뚜껑을 만들어 납품하며 지냄.



가계도
가계도 이미지
정리자

박준성

출전

다시피는 녹두꽃

내 용

증언자 박승일은 할아버지 경순이 함경도 삼수에서 농민전쟁을 일으켰다가 체포되기 직전 자결하였다는 이야기를 아버지 득남과 5촌숙으로부터 전해들었다. 구체적인 활동은 잘 모르지만 “거기서 동학쟁이 동학쟁이 해가지고서는, 동학 난을 일으켜서 단천 전군에서도 많은 희생자가 있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도 그 과정에서 희생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할아버지는 서른아홉 살에 돌아가셨습니다. 단천군 수하면 하운승리가 우리 본적이고 거기 우리 선조들이 다 묻혀 있는데, 고향에서 동학 난을 일으켜가지고서 삼수에 갔는지 아니면 거기 이사가서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할아버지가 함남 삼수군 신동면인가, 내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느틀골이라고 있어요. 거기 산중에 화전민이 살고 있는 감자굴[겨울에 감자를 저장하기 위해 굴을 파놓은 것]에 숨어계셨는데, 주변에 있는 친일파들이 헌병대에 알려가지고, 감자굴의 뚜껑[보리짚단으로 만든]을 열고서 두 놈이 와서 총을 겨누고 나오라고 하니까 우리 할아버지는 그 안에서 단도로 자결했습니다. 감자굴 안에서 배를 찔러서 자살했습니다.

이 과정을 박승일은 농민전쟁 때 활동한 것으로 증언하였으나, 경순이 사망한 때는 1907년 12월이었고 체포하러 온 자들이 일본 헌병이었으며 1894년 농민전쟁 때 함경도 쪽의 활동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으로 보아 농민군으로 활동한 것이 아니라 1907년 함경도에서 의병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동학교도로서 활동하다가 동학 중심의 후기 의병에 가담한 것으로 보인다. 한말 벼랑 끝에 선 민족의 위기를 구하려는 의병항쟁이 계속되었다. 특히 1907년 8월 일제가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조선 군대마저 해산시킨 뒤, 항쟁의 불길은 전국 340여 개 군 가운데 몇 개 군을 뺀 이 나라 곳곳에서 타올랐다. 함경도에서도 삼수, 갑산, 단천, 함흥, 장진, 영원, 정평, 문천 등지에서 의병항쟁이 있었다. 박경순은 신체가 건강하고, 18대조가 정승을 지냈다고 한다.

신체는 건장하고, 그때 제 키 정도 된 모양이예요. 제 키가 일 미터 칠십삼이니까, 지금은 별로 크지도 않지만은 그때 키로서는 큰 편이었지요. 벼슬한 분이 우리 십팔대조가 정승인가 뭔가 해가지고, 함경북도에 가가지고 원래는 밀양 박간데, 거기 가서 선산으로 고쳤어요. 그래가지고 죽 십팔대를 내려왔지요.

“그 전에는 그래도 좀 괜찮게 살아서 가담을 했을 겁니다”하는 것을 보면 재산도 좀 있었다. 그러나 농민전쟁에 참여했던 농민군의 그 후 집안 사정이 그러했듯이 의병활동을 했던 박경순 집안도 풍비박산이 났다. 호적의 이름마저도 그대로 올려둘 수가 없었다. “동학쟁이 집안이라고 찍혀가지고” 핍박을 당했고, 그때 자결하여 돌아가셨다는 것을 숨기려고 원 고향 면사무소 호적등본에는 이름마저 박만식으로 바꾸어 올렸다고 한다. 싸우다 쓰러져간 숱한 사람들이 무덤조차 남기지 못했는데, 박경순은 자결한 뒤 그래도 무덤을 남길 수 있었다. 그 이웃 동네에서 모여와 파묻어 묘를 해놓고, 주발(사기그릇)에 표시를 하여 묘 앞에 묻어 두었다. 사정을 아는 5촌숙의 이야기를 들어오다가 8·15가 되면서 박승일의 아버지가 삼수에 가서 옛날 할아버지들한테 물어 묘를 찾았고, 이장을 하여 지금도 함흥 공동묘지에 무덤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확실한 거는 춘천에 우리 오촌숙이 있습니다. 그분한테서 자세한 얘기를 들었지요. 팔일오 전에 우리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묘를 해놓고 주발에다가 써서 묘 앞에다 묻어놨는데, 우리 아버지가 그 이야기만 듣다가 팔일오가 되면서 이러다간 할아버지 아주 잃어버리겠다고 하면서 삼수에 가서 옛날 할아버지들한테 물어보니까 저기 어딘가 가보라고 해서는, 거기서 이삼 일 동안 찾았어. 찾으니까 나무가 크게 우거져 있드래, 파니까 있더래. 그래서 이장해서 고향에 가지고 있다가 지금은 함흥 공동묘지에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도 지금 함흥 공동묘지에 있고. 한 사년 전에 거기 있는 우리 동생이 함흥 공동묘지에 이장했다고 그렇게 연락 왔어. 동생이 거기 함흥에 있어요. 우리 남동생이 엘에이[LA]에 있는데, 90년도에 고향에 갔다 왔어. 갔다 와서 사진 다 찍어왔어요.

그러나 있던 재산은 아주 없어졌고, 집이 파산된 상태에서 열두 살 된 딸은 곧 민며느리로 갔고 아들 득남(朴得南, 승일의 父)은 여섯 살, 네 살 된 남동생과 친척집으로 가서 얹혀살다가 처가에 데릴사위로 갔다.

그리고 나서 어린 동생들 데리고 친척집에 들어갔어요. 요새는 고아원이 아주 훌륭하지 않습니까? 그때는 일종의 농노로서 들어가는 거지요, 거기서 성장해서 열대여섯 살 나이 돼 가지고서 처가에 들어가서 살다가 장가가는 거지요. 데릴사위. 사오 년 있다가 화전민으로 전락했지요.

화전민으로 살면서 ‘동학’을 믿었다. “우리 아버지랑 어머니랑 동학하는 이들하고 물 떠놓고 요새 정한수 식으로 기도하시고, 시천주조화정 주문도 외우시면서” 지냈던 것이다. 증언한 박승일은 중국에서 괜찮게 살던 5촌 집에 가서 학교를 다녔다.

저는 원래 고향에서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중국에 만주 목단강에 우리 오촌이 있는데 거기 가서 학교를 댕겼습니다. 중국에 가서 활동했는데 오촌이 괜찮게 살았어요. 그러니까 먹여서 학교를 보내고 하니까 하등의 지장이 없었지요. 목단강성 영안현 석두촌에서 고등학교를 다녔어요.

학교를 다닐 때 담임선생을 통해 독립군 이야기를 듣고, 고향 단천의 ‘독립군’ 활동과 분위기를 접하면서 식민지시기를 살았다.

만주에 살며 학교 댕길 때, 담임선생이 독립군에 대해 얘기하더구만. 그런데 확실한 건 모르고 얘기만 듣고. 일본 경찰들이 공비 토벌하러 나간다고 하고. 그때 조금만 바람이 불었다면 나도 그쪽으로 갔을 거예요. 그런데 그때 나이 어리고 하니. 우리 고향 함경남도 단천군 꼭대기에 오봉산이라고 있습니다. 오봉산이 풍산군하고 경계면서 제일 고산에 속합니다. 고산지대지요. 근게 백두산하고 연결되지요. 그렇기 때문에 독립군이나 이러한 사람들이 많이 오봉산으로 해서 다녔지요. 독립군 이런 사람들이 많이 댕기고, 일본 헌병들도 많이 와서 주둔해 있었어요, 우리 고향에.

해방되고서 청진에서 살다가 1·4후퇴 때 월남한 뒤, 자동차 서비스 공장을 하며 육해공군 지프 뚜껑을 만들어 군에 납품하는 생활을 해왔다. 일본과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할아버지의 활동과 죽음, 만주에서 학교 다닐 때 담임선생이 들려준 독립군 이야기, 고향 단천군의 ‘독립군’ 활동이 떠오르며 일본과 친일파에 대한 적대감을 떨쳐버릴 수 없다고 한다.

지금도 여기서 일본애들 가끔 만나면, 너는 뭐할라고 여기 왔느냐 하구선 물어봅니다. 그럼 너 일본 천황 대신 니가 한국민에 대해서 뭐이라고 한번 말해보라고 짓궂은 얘기를 합니다. 이번에도 김영삼 대통령이 일본 천황한테 가서 폐하라고 한 것은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물론 나라와 나라 사이에 국교관계 예의가 있다고 하지만, 차라리 안 만나는 게 낫겠어요. 그거 뭐 훌륭한 존재라고, 만나서 뭐하는 거예요. 그리고 일본에 문화재가 잔뜩 총칼에 빼앗기고 가고 있는데 지금 달라는 사람도 없고, 주자는 사람도 없고 이게 도대체 돼먹지 않았어요. 뭔가 있어야 돼요. 우리 건 우리 것대로 달라고 하고 강탈해가지고 간 것 줘야지. 과거를 잊는다는 게 그래도 죄는 안 받드래도 훔쳐간 건 줘야 되지 않느냐. 이게 무슨 어떻게 법이 돌아가는지 모르지만은, 케케묵은 봉건적인 얘기인지는 모르지만은, 훔쳐간 건 훔쳐간 것대로 반환해야 되지 않느냐하는 거예요. 언젠가는 친일파 그건 없어져야 돼. 지금 만약에 일본 천황이 여기 왔다 하면 그건 일 나요.

그리고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는 남동생이 1990년에 고향에 갔다 오면서 찍은 함흥 공동묘지에 묻혀 있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무덤 사진을 보면서, 또 그곳에 살고 있는 동생을 그리면서 자연 통일을 염원하게 된다. 생각으로는 고구려 땅과 대마도도 찾았으면 싶다고 한다.

난 특별히 저거한 생각은 없고, 남북이 스무스하게 통일되고. 그리고 한 십년이나 이십년 정도 있다가 지금 중국에 속해 있는 옛날 고구려땅 있잖아요? 그걸 어떻게 하든지 되찾고. 그리고 대마도 저거 찾아야 돼요. 대마도 저거 일본놈들이 지금 깔고 뭉개고 있는데, 저거 옛날에 한국 땅인데, 어떻게 저거 찾아야 돼요. 내가 살아서 못 찾아도 언젠가 저거 찾아야 되지요.

할아버지의 활동에 대한 기억과 그 뒤 일가의 고통스런 삶의 역정이 통일의 바람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분단된 오늘의 현실이며, 역사의 방향이라는 것을 절감할 수 있다. 그리고 통일은 역사의 바람직한 복원과도 짝을 이루는 시대의 과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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