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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록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부농으로 서석 전투에서 싸운 최도열, 증손 낙인
대상인물

최도열(崔道烈)

1860~1894. 본관은 전주. 자는 성화(聖化). 강원도 홍천에서 농민군에 참가했다가 10월 23일 홍천 서석 전투에서 희생됨.

증언인물

최주호(崔州鎬)




1920~1993. 최도열의 손자로 고향 마을에 살며 없어진 가산을 일구어냄.


1960~ . 최도열의 증손으로 강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홍천우체국에 근무.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이사.



가계도
가계도 이미지
정리자

박준성

출전

다시피는 녹두꽃

내 용

전국에서 아직 2차 농민전쟁에 들어가기 전, 1894년 9월 4일 강원도 농민군은 대관령을 넘어 강릉부 관아를 점령하였다. 삼정의 폐단을 뜯어 고치고 보국안민의 개혁을 수행하려던 농민군은 보수 민보군의 반격으로 다시 대관령을 넘어 퇴각하였다. 곳곳에서 해산하지 않고 투쟁을 전개하던 농민군들 가운데 한 세력이 10월 13일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동창을 들이쳐서 건물을 불태웠다. 보수 지배세력은 농민군에 대해 적극 반격을 개시하였는데, 경기도 가까이 있는 경기도 지평의 감역 맹영재(孟英在)는 포군을 이끌고 홍천의 농민군을 향해 진격해왔다. 이에 맞서 농민군은 10월 21일 맹영재 부대와 장야평[장평]에서 전투를 벌이고 서석으로 후퇴하였다. 서석에서 후퇴한 농민군은 풍암리 구릉 위에다 진을 쳤다. 다음날 10월 22일 서석에 집결한 농민군은 횡성 현감 유동근이 이끌고 온 관군과 맹영재가 이끌고 온 민보군에 맞서 800여 명이 넘는 희생자를 내는 처절한 싸움을 전개하였다. 최도열은 이 서석 전투에 참가했다가 희생되었다. 그가 왜 언제부터 농민군에 참가했는지 자세하지 않다. 손자 최주호가 그날의 서석 전투 이야기를 전해주곤 했으나, 지난해(1992년) 돌아갔다. 그는 홍천 일대, 특히 서석 전투를 상세하게 이야기해줄 수 있던 마지막 분이었다. 이제 역사를 전공했던 그 아들 낙인(최도열의 증손)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를 듣고 정리해둘 걸 하면서 안타까움을 이야기한다.

집안어른들로부터 동학에 관해 직접 들은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아버지가 농민전쟁 이야기를 꽤 알고 계셨다는 것도 지지난해 타계하시고 나서야 뒤늦게 전해들었거든요. 생전 말씀이 없으셨지요.

정리자도 마찬가지이다. 살아계실 때 몇 번이나 찾아뵙고 이야기를 듣고 녹음까지 했었는데, 실수로 녹음한 위에 또 다른 녹음을 해버려 목소리를 그대로 들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주호의 증조할아버지(병두)와 할아버지(도열) 모두 동학을 믿었다고 하며, 천석꾼이라고 할 정도로 살 만했다고 한다. 최도열은 수백 석의 군량미를 농민군에게 제공하였고, 전투에도 직접 가담하여 전사하였다는 사실 때문에 그의 집안은 어린 아이 셋만 남기고 남자는 거의 다 희생당했다. 다행히 그의 아버지와 부인이 아들(규백)을 데리고 몸을 피할 수 있어 대는 끊기질 않았다. 낙인은 이렇게 전한다.

그날 이후 증조할머니께서 두 살배기 아이를 안고 피신해 오랫동안 산 생활을 했답니다. 그 아이가 할아버지[규백], 또 유복자였다고 하지요. 아버님이 한 푼의 유산도 물려받지 못할 만큼 가산이 몰락한 것은 물론이고요. 증조부께서는 천석꾼이셨답니다. 양반은 아닌 것 같고, 신흥 부농이셨을 겁니다. 동학군에 군량미를 댔다는 설도 있지만 왜 그러셨는지는 모르겠고… 확실치 않지요. 면장격의 일을 하셨답니다. 사발통문을 돌리셨다고도 하고요.

그런데 서석 싸움은 10월 22일에 벌어졌고 족보에 도열이 죽은 날은 10월 23일로 되어 있으니 잡혀서 처형되었는지도 모른다. 최주호는 어렸을 적에 증조할아버지가 아버지와 동네 어른들에게 들려준 할아버지의 생활과 농민군의 활동 모습을 전해들었다. 농민군이 주둔하였고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던 구릉 산자락을 ‘진등’이라고 부르는 까닭이 “그때 의병[농민군]이 진을 친 곳이 저기 언덕이요. 그래서 저 언덕을 진등이라 부르지” 하였다. 농민군이 싸울 때, 이곳에서도 주문을 외웠고, 총이 모자라 버드나무로 총을 깎아 먹칠을 해서 무기가 많은 것처럼 위장도 했고, 주문을 외우면 저들의 총에서 총탄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대신 빨간 물이 흘러나온다고도 하였다. 다른 지역에서도 듣는 이야기지만, 서석에서도 농민들이 소를 잡아 껍질 네 귀퉁이를 말뚝에 묶어놓고 밥을 지어 먹었다고 한다. 동학군이 진을 치고 있는데 관군이 들이닥쳐 싸웠으나 조총이 신식 무기에 대항할 수 없어졌다고 말한다. 또 진등을 넘는 고개 이름이 자작고개인데, 이는 그날 쓰러져간 농민군들이 흘린 피가 고갯마루를 자작자작 적실 정도로 흥건했다고 하여 붙여졌다고도 하고, ‘동학난리’ 때 사람들이 고개를 자작자작 넘어가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고도 한다.

자작고개는 본디 서낭고개로 불렀지. 동학난리 때 사람들이 자작자작 넘어가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대서 자작고개로 바뀌었어.

어떻게나 희생자가 많았는지 “가을걷이 논바닥에 볏단 널려 있는 것 같았다고 해, 사람 죽어 넘어진 것이.” 부상을 당해 목숨이 붙어있는 농민군까지 골짜기에 쓸어 넣고 생매장하였는데, 사람을 덮은 흙이 숨을 쉬느라 움썩거릴 정도였다고 한다. 최주호는 가족이 살아남은 이야기도 담담히 전했다. 난리가 났을 적에 처음에는 장광이나 뒷간에 숨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동네 뒷산의 마을에 숨어지내다가 어느 때쯤 다시 고향 마을로 돌아왔다. 그러는 사이 친척의 재산은 몽땅 빼앗겼다. 그 뒤 그의 아버지 형제가 열심히 재산을 일궜고 자신도 열심히 일을 해서 먹고 살만한 재산을 모았고, 잃었던 토지도 거의 다 사들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마을은 그 후로도 동학도가 많아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라는 주문소리가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증조할아버지가 살던 그 마을에서 태어난 낙인은, 어렸을 때의 마을 분위기를 이렇게 말한다.

국민학교 시절 여름 장마철이면 마을 어귀 언덕바지는 온통 수렁으로 변했습니다. 귀퉁이가 무너져 여기저기 뼈다귀가 튀어나오고요. 지금 위령탑이 선 곳이죠. 밤이면 도깨비불이 번득여 나다니기 무서웠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그때는 마을 아이들 누구도 그 뼈가 누구의 것이며 왜 거기에 그리 많이 묻혔는지 아무에게서도 듣지 못하고 자라왔지요. 1970년대 초 새마을사업의 일환으로 고갯길 확장공사를 하던 중 인골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희생자가 800여 명이 넘었던 홍천 서석 전투인지라, 이때 희생된 일가친척이며 동네 사람의 수가 엄청나서 1970년대 중반까지도 마을에는 음력 10윌 22일 한날 제사를 지내는 집이 30여 호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최주호는 1992년 돌아가시기 전 정리자가 만났을 때, 농민전쟁에 참가했던 후손이나 일가친척들이 그후 탄압과 감시를 피해 고향을 떠나 만주로 이주한 집들도 적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증손 낙인은 1970년대에는 홍천 서석에 1894년 무렵에 태어났던 어른들도 살아있었는데 그분들께 좀 더 관심을 가지고 농민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알려하지 않았던 문제를 지적한다.

고등학교 때 지금같이 동학붐이 불었지요. 그때는 마을에 갑오생 어른도 살아계셨습니다. 하지만 답사 왔던 누구도 그분을 찾지 않았지요. 관청 주위만 맴돌고 돌아갔어요.

증언록을 정리하면서,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좀 더 풍부하게 100년 전의 역사를 말해줄 수 있는 분들이 살아계셨는데 하는 안타까움이 많이 들곤 한다. 지지난해만 해도 이야기를 들을 수 있던 최도열의 손자, 최주호의 죽음이 더욱 그런 생각을 들게 한다. 관심이 부족했던 것이 가장 문제지만, 가깝게는 올 이전까지만 해도 후손들이 마음 놓고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가 농민군에 참석했다는 사실을 떳떳하게 말하길 꺼렸다. 100년 전 농민전쟁 이후도 농민군을 탄압했던 자들과 같은 자들이 계속 지배세력으로 힘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 증언록이 늦었지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아울러 이를 바탕으로 자기가 태어나 자랐고, 또 지금 살고 있는 향토의 역사에 대해 관심의 폭을 넓힐 필요가 크다는 생각도 많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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