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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록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동학교단의 3대 지도자 김연국, 증손 명기
대상인물

김연국(金演局)

1857. 2. 13~?. 강릉 김씨, 자는 치구(致九), 호는 구암(龜菴). 동학교단 3대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농민전쟁에 참여하였고 상제교를 창시.

증언인물

김명기(金明起)



1950. 10. l1~ . 치과의사.


가계도
가계도 이미지
정리자

배항섭

출전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

내 용

김연국은 최시형의 핵심적인 제자 중의 하나로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 송암(松菴) 손천민(孫天民)과 함께 이른바 3암으로 불리기도 했다. 김연국은 1871년에 이필제란(李弼濟亂)을 겪은 최시형이 경상도와 강원도 등지의 산골로 숨어 다니며 포교하던 무렵 동학에 입도한 인물이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숙부댁에서 자랐으나, 숙부댁의 생활형편도 그리 넉넉하지는 못했다.

증조부님의 고향은 강원도 인제군 달리촌이지요 그 당시 조실부모(두 분 모두 1870년 2월 사망)를 하셨기 때문에 숙부님(秉乃) 댁에서 사셨어요. 거기가 강원도 영월군 정선 쪽이라고 그러신 것 같죠, 아마 생활정도는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숙부댁에 의탁할 정도니까 형편없었겠지요. 동학이 전파되는 걸 보면 양반들은 (동학을) 전혀 믿지 않았어요. 힘없는 사람들 지금 같으면 민초들이 입도를 많이 했으니까 그 양반도 농사나 지으셨겠지요. 그리고 병내(秉乃) 씨의 살림살이에 대해서도 들어보지를 못했어요.

또 동학에 입도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최시형이 영월·정선 쪽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1870년대에 이미 동학에 입도하여 있던 숙부의 영향으로 입도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김연국의 나이는 대체로 16,7세였던 듯하며, 이때부터 김연국은 “해월 선생님을 평생 동안 모시고 다녔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그때 동학에 입도돼 있는 상황이었던가 봐요. 해월 선생님이 영월 쪽에 오신 길에 댁에 들리시니까 16,7살 잡순 구암 선생님(김명기 씨는 증조부를 꼬박꼬박 이렇게 불렀다)이 그날 가서 뵙고서 해월 선생님이 가시는데 한 10리를 따라가는 거여 그래서 [해월 선생님이] 왜 따라오느냐 그러니까 제가 오늘부터는 선생님을 모시겠다고 하니까, 옛날이나 지금이나 미성년자는 부모님한데 허락을 받아야 데리고 갈 수 있으니까 [해월 선생님이] 다시 10리 길을 되돌아 구암 선생님 댁으로 가서 병내 할아버지에게 말씀을 하셨다는 거지. 용진[김연국의 유명(幼名)]이를 데리고 다니겠노라고. 사부님이 그러시는데 제자들이야 데리고 다니지 않으셔서 걱정이지, 그래서 그때부터 완전히 그림자처럼 모시고 다녔지요.

최시형을 그림자처럼 모시고 다니던 김연국이 최시형의 중요한 측근 가운데 하나로 등장하는 것은 1883년 무렵이다. 이후 김연국은 동학교단의 핵심적인 인물로 성장하게 된다. 농민전쟁 한 해 전인 1893년 1월의 광화문 복합상소(伏閤上疏) 때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동학혁명 전에는 광화문 복합상소운동에서 교조신원운동을 했어요. 그때 역사책을 보면 소수(疏首)가 박광호(朴光浩), 소수가 본래 증조부가 되셨는데 그때는 상소에서 소수를 잘못하면 죽는가벼. 그래서 박광호 그 양반이 대신한 거여. 그래서 증조부는 봉소자(奉疏者)가 되고 손천민 씨는 제소(製疏)를 해서 글씨를 쓰고 한 일이 있고….

김연국이 농민전쟁에 가담하는 것은 1894년 9월의 2차 봉기 때였다. 이때 김연국은 황하일, 권병덕 등과 함께 보은에서 기병하였으며, 농민전쟁이 실패로 끝난 다음에도 최시형이 체포될 때까지(1898년) 최시형을 최측근에서 보필하였다.

그전에 구전으로 듣기에는 해월 선생님 보호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는 거예요. 밤중에 업구서 피난도 가구, 관원들이 오면 해월 선생 대신에 방에 들어가 앉아 있던 사람도 있고. 연자 국자 할아버지가 했다는 게 아니고 제자들이 그런 식으로 보호를 했으니까, 그분이 시간을 지체해서 피하기도 하고, 일본군 왜놈들이 해월 선생을 포위해서 집중적으로 총알을 쏘아 보냈는데도 제자들이 다 호위를 해서 피난시킨 것이거든요. 피난하시는 데 주력을 기울여서 밥도 짚신을 신은 채 잡수시고 이랬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김연국은 피신중이던 1896년 1월 최시형으로부터 구암(龜菴)이라는 도호(道號)를 하사받기도 하였으나(「천도교회사초고」), 그의 종교활동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제자 중에서 첫째 제자인데, 저희 증조부가 동학혁명과 관련해서 지시를 내리고 한 것은 도망다니면서 다 태웠으니까 우리집에도 없어요. 천도교 쪽에서 남아있는 것은 훼손시킨 것, 역사를 오도시킨 것이 남아있지만, 오히려 안 보는 것만도 못해요. 거짓말이 많이 쓰여 있어요.

천도교측의 기록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것은 농민전쟁 이후 동학교단이 겪게 되는 내분과 갈등 때문이다. 최시형은 피신중이던 1897년 12월 삼암(三菴) 가운데 손병희에게 도통(道統)을 전수하였다. 이후 1901년에 손병희는 일본으로 망명을 떠났으나, 이를 반대하고 남았던 김연국은 관에 체포되어 3년 7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게 된다.

동학혁명 뒤 동기 78년(서기 1901년)에는 하두 관원들의 지목이 심하고 특히 일본놈들이 동학을 말살하려고 체포령이 내려있고 하니까, 의암이 와서 우리 할아버지한테 여기 있다가는 도저히 못사니까 함께 망명을 하십시다, 이렇게 권했어요. 그랬을 때 우리 구암 할아버지께서 “나는 대도의 명을 받은 몸이기 때문에 책임이 막중하니까 일신상의 편안함이나 그런 걸 찾아서 동포와 내 땅을 버리고 망명할 수가 없으니 갈려면 의암이나 혼자 가시오” 이렇게 해서 1901년에 의암 선생은 일본으로 망명을 갔어요. 그해 음력 6월 2일이 해월 선생님 제삿날이에요. 그래가지고 5월 29일날 공주 무성산에서 제사준비를 하시다가 공주감영 대장 이민직에게 잡혔어요. 이민직이 몰래 교인으로 위장하고 가짜로 입교를 해가지구서 쫓아다녔는데, 그 사람들은 더 열심히 일하니까 측근이 됐겠지, 그래가지고 붙들리셨다구. 그때부터 3년 7개월 동안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르셨어요. 동학의 괴수라고 해가지구 처음에는 사형이라고도 하고 무기라고도 하는데 [김명기씨는 증언 도중에 최근 발견된 정부기록보존소의 (동학관련판결문집)을 꼭 한 번 보고 싶다고 부탁하였으나, 거기에는 김연국에 대한 판결문이 실려 있지 않아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돈으로 안되는 게 없어서 증조할머니가 큰 콩나물 광주리에다 돈을 가득 넣고 위에다 콩나물을 살살 뿌려가지고 대감네 집에 갖다 줬데요. 그러나 나중에 순종황제 황세자 시절에 탄생기념일을 기해서 감형이 되셔서 3년 7개월 만에 나오셨어요. 석방 이유는 나이도 많고 동학은 말살돼서 다 없어졌으니까 사형수 내놓아도 얼마 못산다 해서 나오신 거예요. 사면을 받은 것은 6개월 전인데 탐관오리가 돈을 더 울궈먹을려고 6개월을 더 가둬놓고서 돈을 더 받아들인 거여요. 나오는 날 서대문교도소 앞에 있는 독립문 앞으로 교인이 빽빽하게 들어섰는데 최수운 선생 문집, 최보따리라는 걸 강원도 교인이 갖다드린 거예요. 해월 선생님께서 생전에 잘 보관하고 있다가 구암선생님한테 전하라구 했다면서. 그래서 (그 문집이) 우리집에 와 있는 거여.

1904년에 환국한 손병희는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명(改名)하였다. 이 과정에서 친일(親日)을 하던 이용구, 송병준 등이 떨어져 나가 시천교(侍天敎)를 만들었다. 이러한 분란 속에서 김연국과 손병희 사이에도 갈등이 불거져 끝내 갈라서게 되었다. 손병희는 1907년 8월 천도교 대도주(六道主)자리를 김연국에게 물려주었으나, 김연국은 1908년 1월 천도교 대도주 자리를 내놓고 천도교에서 탈퇴하여 시천교(侍天敎)로 들어가 대례사(大禮師)가 되었다. 이 대목이 그에게 따르는 불명예의 씨앗이 되었다. 그러나 시천교에 들어가서도 김연국은 이용구 등과 갈등이 생겨 다시 계룡산 옆의 신도안으로 내려가 상제교(上帝敎)를 창도하여 교주(敎主)가 되었다.

1924년에 서울에서 신도안으로 이사를 하셨어요. 조부님 형제들은 같이 다니셨지요. 1944년 음력 8월 7일날 88세로 약이 없어서 돌아가셨어요. 전쟁 말기라 약이 없어서 1901년에 체포당하실 때 이민직이란 놈이 육혈포를 대고서 할아버지를 잡을라고 하니까 이렇게 손으로 치우시는데 방아쇠가 당겨져서 총알이 몸을 관통했어요. 감옥엘 들어가니까 요새처럼 인권이 있는 때가 아니니까 구데기가 나오는데도 치료를 안해준 거여. 보통사람은 머리에서 구데기가 나오면 죽는데요. 그런데도 살아나셔 가지고 도력(道力)이 아니냐. 수도한 정신력도 있으실테고(하는 말들이 있었다). 신도안으로 오셔서는 상제교를 만드셨어요. 돌아가실 때는 일본순사들이 집을 에워싼 상태에서 자손대표, 할아버지 한 분, 손자 하나 교인 대표 한 명만 불러 임종하시면서 말씀하신 것은 밖에 나가서 발설하시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교인들을 전부 격리시키고 그렇게 돌아가셨어요. 그 내용은 못 들었지요. 신도안에서 서울을 가려면 두계역으로 8km를 나가야 해요. 두계 파출소가 있는데 우리집을 지키기 위해서 신도안에다 지소를 하나 세워놓고 아침마다 출근해서 지키고 있다가 서울에 출타를 하면 두계역까지 따라 나온대요. 기차 타신 것을 보려고. 서울역에 딱 내리면 거기서 또 일본형사가 따라 붙는데요. 이렇게 요시찰 인물로 평생을 사신 거요.

김연국이 천도교나 시천교측과 척이 져서 신도안으로 내려온 것은 그가 가진 종교지향적 성향과도 관련이 있었던 듯하다. 의암 선생이 1905년에 일본망명을 마치고 오셔서 동학을 세계만방에 떨치려면 교명을 천도교로 해서 포교를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상의를 하셔가지고 구암 할아버지하고 두 분이서 천도교를 설립했어요. 맨 처음에 내가 듣기에는 의암 선생님 말씀이 도덕은 구암 선생님이, 행정은 내가 두드러지니 둘이 힘을 합쳐서 발전을 시켜보자 해서 시작했는데, 의암 선생이 자꾸 딴짓을 하니까 갈라지게 된 거여. 그래서 시천교에서 모셔갔어요. 거기에서는 이용구, 송병준이 일진회 만들어서 난봉을 하니까 시끄럽고, 또 일본이 정치를 하니까 수도하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 1924년에 신도안으로 내려가 상제교로 하셨다가, 해방 이후에는 천진교로 바꾸었는데 지금은 동학 대종원이라는 명칭을 많이 쓰지요. 나중에 신도안(계룡산)에 내려오신 이유는 다른 분들하고 틀려 가지고 종교하고 정치를 분리시켜야 된다고 더구나 그 때는 일정시대에 일본놈들 밑에서 제대로 수련도 못하고 하니까 신도안으로 가셔서 도인을 양성하기 위해서 내려오셨던 거예요.

이 무렵 김연국의 생각도 천도교를 만든 손병희와 마찬가지로 동학 시절과는 달리 상당히 문명개화론 쪽으로 변해 있었던 듯하다.

조부님[김연국의 아들 김덕경]은 서울에서 태어났는데 일본에 유학을 하셨어요. 증조부님은 100년 전에 사셨지만 상당히 사상이 선진적이랄까, 자기 자식들뿐만 아니라 교인들의 자녀들도 유학을 시켰어요. 신학문을 배워오너라 해서. 쉬운 얘기로 지금의 상호신용금고 같은 것도 했는데 밑에 제자들이 운영을 잘못해서 없어지고, 또 국민학교(김명기가 나온 사립 신도유신학교)도 사립학교를 만들었어요, 일정시대에 우리나라 사람들을 가르쳐야 한다고요. 그런데 해방되고 의무교육이라 해서 나라에서 헌납하라 해서 헌납을 했지요.

김연국의 첫부인은 최시형의 서녀(庶女)였고, 그 뒤 두 명의 부인이 더 있었다.

증조모님은 해월 선생님의 서녀에요. 곡강 배씨 그분은 결혼하시고 몇 달 못 살고 후손 없이 돌아가셨어요. 동학에 대한 수도를 많이 하셨대요. 그 후 문화 유씨 할머니가 두 분을 두시고, 다른 분들은 김해 김씨 할머니가 낳으셨대요.

김연국의 집안이나 후손 역시 농민전쟁 이후에는 피신을 하며 다니느라 고생이 많았던 듯하다.

우리가 강릉 김가거든요. 매월당의 직계라구요. 제가 김시습 할아버지의 16대가 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가까운 친척이 거기에 많이 있는 건 아니예요. 동학운동하시면서 탄압을 받으시니까 피해다니시고 교세가 커졌을 때는 서울 사시다가 그 다음에는 신도안으로 이사를 하셨지요. 제일 큰할아버지[天卿]는 왜놈들 꼴 보기 싫다고 미국에 가서 돌아오시지 않았어요.

김연국의 종교적 신심을 이어받았음인지 지금도 후손들의 꿈은 김연국이 상제교를 만들었던 신도안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상제교가 있던 신도안에는 지금 육해공군의 최고사령부가 자리잡고 있다

저는 지금도 본적이 신도안으로 되어 있어요. 공부 때문에 일찍 나왔어요. 신도안은 정부에서 계룡산에 3군사령부를 만들었기 때문에 토지 수용 때문에 나온 거지요. 지금도 우리 어르신은 신도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최고의 꿈이지요. 증조부님 산소는 처음에는 신도안에 모셨는데, 1984년에 영동 심천에 모셨어요. 비석은 여러가지 문제로 청양 우리교(동학대동원) 본부에 있어요. 개척한 공로로 세운 공덕비니까 신도안에 모시려고 했는데 이주비에 눈이 어두운 몰지각한 교인들이 상의도 없이 홀랑 들고 가버렸어요. 그래서 지금은 우리 아버지가 살고 계시는 칠갑산 밑에 청양에 옮겨서 세워져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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