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최경선 (崔景善)
1859. 11. 8~1895. 3. 2.9 족보명 병석(炳碩), 초명 만석(萬碩), 자 낙필(洛弼) 또는 경선[景(卿)善]. 본관 전주 도사공과. 태인현 서촌면 월천동(지금의 전북 정읍군 북면)에서 출생해 태인 주산마을에서 성장. 1893년 11월 사발통문에 서명, 동학농민전쟁 전시기에 걸쳐 전봉준의 팔다리가 되어 활동. 1895년 3월 29일 전봉준 등과 함께 교수형 당함.
최명언 (崔明彦)
1943. 11. 22~ . 족보명은 용언(鎔彦). 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한 부친에 이어 2대째 교직에 있음, 현재 호남고등학교 교사로 재직중.
김양식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
최경선은 김덕명 등과 더불어, 전봉준·손화중·김개남 다음으로 가는 동학농민전쟁의 최고 지도자였다. 그는 전봉준과 각별한 사이였을 뿐 아니라 농민전쟁 전시기에 걸쳐 운명을 함께 한 동지였다 그는 농민전쟁이 일어나기 5, 6년 전부터 전봉준과 서로 마음을 터놓고 지낼 정도였다. 이러한 최경선에 대해서는 그의 손자 최명언을 통해 더 자세한 것을 들어볼 수 있다. 최명언은 뼈대 있는 노인들이 그렇듯이 먼저 전주 최씨 도사공파 족보를 꺼내놓고 가계부터 정리해준다.
이 보책이 1900년에 작성된 거죠. 여기 보면 초명이 만석, 자가 낙필로 돼 있고, 기미(1859년) 11월 8일생, 을미(1895년) 3월 29일 돌아가셨고요. 1988년 최근에 작성된 보첩에는 지금 병석으로 되어 있는데, 보첩 만들 때 병자 항렬 순으로 다시 정리를 한 것이죠. 1900년대 보첩에서는 저렇게 만자 석자로 올라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큰 분인 만자 주자 양반이 병자 대자로 되시고요. 이 병석 할아버님은 아드님이 계셨어요. 인자 식자. 이 양반이 저희 큰아버님 되시는데, 갑오년 9월 29일날 출생하셨어요. 그렇지만 이 양반은 일찍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시니까 1900년대까지는 보첩에 올라 있었는데, 나중 보첩에는 빠지고 대신 저희 아버님인 헌자 규자가 양자로 입적되거든요. 그것이 어떻게 된 것이냐 하면, 병자 대자 할아버님이 1932년까지 살으셨어요. 저희집 보첩이 25년 만에 만들어졌더만요. 1900년부터 만들었으니까 25년이면 1925년쯤에 만들어졌는데, 그 이후부터 저희 아버님이 병자 석자 할아버님 밑으로 양자로 입적하셨어요.
최경선의 이름은 족보를 다시 만들 때마다 수시로 바뀌었다. 1895년 재판 판결문에는 원래의 이름인 영창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1900년 족보에는 만석, 최근 족보에는 병석으로 되어 있다. 자 또한 경석에서 낙필로 바뀌었다. 혹 최경선이 역적의 누명을 쓰고 처형당했기 때문에, 이름을 고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경우는 흔히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최경선 슬하에는 아들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였으나, 옛 족보에는 분명히 농민전쟁의 와중인 9월 29일 출생한 아들이 인식(寅植)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최경선은 2차 농민전쟁이 막 타오르던 9월에 아들을 보았고, 아들의 돌도 보지 못한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셈이 된다. 참으로 한 개인의 입장에서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그 아들도 어린 나이에 죽어 족보에서 제명되고 큰집 조카가 대신 아들로 입적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것을 보면 족보 관리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던 것 같다. 그것은 역으로 그만큼 최경선 집안이 이른바 매우 뼈대 있는 후손이었고, 경제 형편도 넉넉한 편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저희 증조, 고조 전주 최씨 도사공파들이 전라북도 부안 근방 김제, 정읍 이쪽으로 많이 살고 있거든요. 처음에는 태인에 있었는데, 만자 석자 할아버님의 출생지는 월촌리라고, 거기서 출생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거기가 처음 저희 고조, 증조 이 양반들의 근거지였던 것 같아요. 그러다 증조 때부터 북면 월촌동에서 현재 태인 주산으로 옮기셨다고. 거리가 얼마 안돼요. 옛날에는 태인현이었어요. 거리는 한 5km 정도밖에 안되는 같은 현이었어요. 태인 소재지에 있는 주산으로 옮기셔 가지고, 거기서 주로 생활하신 것 같아요. 동학혁명사를 쭉 읽어보면, 전봉준 장군하고 처음 봉기하신 곳이 태인 주산이란 곳인 것 같아요. 여기 보면 정2품, 정3품 정도의 벼슬을 하셨을 정도면 꽤 재산이 많았을 것 같아요. 그래서 태인 향교에 상당히 많이 관여하시고 했대요. 재산 규모도 제가 봤을 때는 한 천석은 넘었던 것 같아요. 교육도 제대로 받으신 것 같고요.
여기에서 태인 주산이 처음 봉기한 곳이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으나, 태인접이 가장 드셌다는 기록이 있고 고부 봉기 때는 주산에서 많은 사람들이 중심적 역할을 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고부와 주산은 불과 30여 리의 거리에 있다. 아무튼 이 정도이면 최경선 집안은 양반가문에다 재산도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아쉬워 농민전쟁에 참여해 목숨까지 버린 것일까.
제가 들은 바로는 병자 석자 할아버님[최경선]이 약방 할아버지라고 불리셨답니다. 옛날 집에는 집이 여러 채가 있잖아요. 한쪽에 약장이 진열돼 있었는데, 그것은 추측컨대 집안식구들을 위해서 약을 쓰는 정도가 아니었을 것 같아요. 동네사람들을 위해서 또 여러 농민들한테 약을 지어주는 그런 일을 하시지 않았나 생각이 들거든요.
이같은 증언에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최경선이 약방을 했다는 점이다. 그는 약방을 하면서 동네사람들이나 가난한 농민들에게 약을 지어주었는데, 전봉준도 한때 약장사를 했다는 말이 있다. 이것으로 보아 최경선 역시 약방을 운영하면서 농민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전봉준 등과 더불어 농민전쟁을 모의, 실천에 옮겼던 것이다.
태인 접주였다. 그런 식으로 얘기를 쭉 했지요. 공초 기록을 보면 전봉준 장군한테 제일 처음에 누구하고 모의했느냐고 물었을 때, 최경선 장군이라고 말했어요. 두 분이 각별했던 것 같아요. 시작은 제일 먼저 두 분이 했는데 인제 나이 차이가 있고 중간에 동학교도를 많이 거느리고 있는 손화중 장군이나 김개남 장군이나 이런 실력있는 장군들과 함께….
원래 최경선은 태인의 김덕명 포에 속해 있던 접주였다. 그는 전봉준·손화중 등과 교류하면서 현실을 변혁할 계획을 논의하였다. 이는 1893년 11월에 작성된 사발통문에 서명한 스무 명 중에 최경선이 끼어 있는 점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 뒤 최경선은 1894년 3월 농민전쟁이 발발하자 영솔장 직책을 맡아 황토현과 황룡강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7월 초에는 나주를 공격한 일도 있었다. 9월에는 광주에서 삼례로 올라와 전봉준과 함께 농민군의 재기병 문제를 숙의하였고, 그런 다음 다시 광주로 내려가 농민군 규합과 후방방어에 주력한 일도 있었다. 당시 동학농민전쟁의 와중에서 최경선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래서 이런저런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으나, 특별한 일화를 듣기 힘들었다. 다만 최경선이 12월 1일 광주에서 농민군을 해산한 뒤 동복으로 피신하였는데, 그가 동복으로 간 이유 중의 하나가 외가 친척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동복에는 외가든 친가든 특별한 친척이 없었다는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최경선이 동복에서 쉽게 체포되었는지도 모른다. 12월 7일 체포된 최경선은 서울로 압송되어 전봉준과 함께 재판을 받은 다음, 다음해 3월 29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사형을 시켜서 시체를 한 곳에 버리고 빙 둘러서 못가져가게 지켰다고 합니다. 병자 석자 할아버님과 형님 되시는 병자 대자 할아버님이 서로 약속하기를, 목이 잘려서 효수당했을 때를 대비해서 몰라볼 수 있으니까 저고리 속에 생년월일 쓰고 이름 쓰고 그랬던 거 같아요. 그래가지고 병자 대자 할아버님이 동생이 서울에서 사형당한 것을 알고 하인들을 데리고 서울 올라가서 돈으로 매수를 했든지 어쨌든지간에 시체를 싣고 산길로 밤에만 오셔서 10여 일 이상 걸렸다는 얘기를 제가 어렸을 때 들었어요. 그렇게 오셔가지고 1900년대까지 고부에 일단 모셨다가 다음에 이쪽으로 모시는 그런 경위를 거쳤어요.
당시 교수형에 처해지면 시체를 수습하기가 어려웠던 실정이었는데, 다행히 최경선의 시신은 장형에 의해서 수습될 수 있었다. 전봉준과는 달리 최경선의 시신이 수습될 수 있었던 것은 가정배경이 좋았기 때문이다.
병자 대자 할아버님이 갑오년에 성균관에 진사를 하셨어요. 여기는 잘못되어 생원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는 진사로 돼 있습니다. 저희 집에 과거에 합격한 명단이 있어서 명단을 제가 확인을 했는데, 생원 급제자들이 쭉 써 있더만요. 그 중간에 와서 진사 급제한 분들이 쭉 써 있는데, 그걸 누가 잘못 본 것 같아요. 저희 할아버지는 갑오년에 분명히 성균관에 진사를 하셨어요. 그래가지고 이 분이 집안을 마련하고 융성하게 하신 분이시죠. 나머지 동생 분들보다 제일 재력이 많고, 제가 지금 이 할아버님 손자입니다.
이렇게 거둔 최경선 시신은 일단 사람들의 눈을 피해 고부 장순면 시동 앞산 기슭 북동쪽에 매장되었는데, 그 뒤 1900년에서 1924년 사이 현재의 위치인 태인 칠보면 축현리로 이장하였다. 그렇지만 그 이후 그의 묘소에는 한동안 발길이 끊기고 말았다.
저희 할아버지는 오래 사셨지만 역적이라는 것 때문에 곧바로 태인에서 칠보로 이사를 가셨어요, 가셔가지고 집안 권솔들한테 전부 함구시켜버려서 전해들은 얘기가 극히 없어요. 그래가지고 어디다가 이 분을 모셨는지도 몰랐어요. 병자 석자 할아버님의 부인, 그러니까 할머님[최경선 부인]은 남편이 돌아가시자 우리집에서 할아버지하고 같이 사셨어요. 근데 이 약방할머니께서 1934년 78세에 돌아가셨는데, 남편이 사형당하고 나서 묘소도 안 가르쳐줬다는 거예요. 그리고 또 아들이 바로 죽었어요. 아들이 죽고 나니까 이 양반이 미쳐버렸다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실성한 생활을 몇십 년 동안 하셨다고 들었어요. 따님도 있었는데, 시집만 갔다고 그러지 아는 사람이 없어요.
참으로 기막힌 동학농민군 후손의 증언이 아닐 수 없다. 최경선 형은 역적의 누명을 쓰고 죽은 동생의 존재를 영원히 묻어버리고자 최경선의 시신을 매장한 뒤 곧바로 태인에서 칠보로 이사하였다. 그런 다음 모든 식구들에게 그에 관한 말을 일체 하지 못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그의 부인은 남편이 사형되고 뒤이어 하나밖에 없는 아들마저 어린 나이로 죽자 그 충격으로 정신이상 증세로 고생하다, 남편의 묘소도 모른 채 1934년 78세의 나이로 한 많은 인생을 마감하였다. 또한 큰딸은 전주인 이가춘(李可春)에게 출가하여 입암에서 살았고, 작은딸은 박창규(朴昌圭)에게 출가하였으나 행방이 묘연하다고 한다. 이러하니 최경선의 묘소에는 발길이 끊기고 잡초만 무성히 자랄 수밖에 없었다.
제가 이 보첩상으로 거기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1980년대입니다. 그때까지는 집안에서 이 양반 묘소가 어디 있는지 몰랐어요. 어떻게 해서 이 양반 묘소를 찾게 됐냐면 저희 큰아버님이 계시는데, 형제들 중에서 이 양반이 제일 오래 사셨어요. 1985년 초에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자 그 아들들이 저의 사촌형이죠, 문갑을 전부 정리하다 보니까 땅문서니 뭐니 나오는데, 그 중에 하나가 저희 아버님 이름으로 된 산이었어요. 그것이 언제거냐 하면 1930년대 거였어요. 그래서 그걸 절 주더라구요. 군청에 가서 등기를 찾아보니까 그대로 있어요. 임야가 한 3면 정도 되고 밭이 한 3천평 정도 되는 땅이었어요. 그래 그것을 특별조치법에 의해서 제 앞으로 돌리면서 거기 가보니까, 묘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병자 석자 할아버님 묘소가 있는 산소도 제 앞으로 돌렸어요. 그러면서 보첩을 찾아봤죠. 그때부터 저희가 찾아가고 제사도 지내고, 또 저희 아버지묘도 그 밑으로 이장했습니다. 그전까지는 어떻게 생각했냐 하면 그 양반[최경선]이 저희 할아버지의 동생분이다 그렇게만 알았어요. 더욱이 용달이라는 분이 병자 석자 할아버님의 제사를 모시도록 구두로 되어 있었어요. 구두로 되어 있어서 우리는 그렇게만 알고 있었죠. 양자 입적은 모르고. 그래가지고 박정희 때 갑오동학혁명에 관해서 처음으로 행사 같은 것이 있고 그랬잖습니까? 그때도 이 양반[용달]하고 이 양반 아들들이 유족으로 참여했어요. 그리고 동학혁명 모의탑도 이 양반이 주동이었습니다. 이 양반 아들로 제게는 조카되는 애들이 둘 있는데, 그 아들들하고 얘기를 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이다. 병자 대자 할아버님의 뜻으로 보첩상에 올라있는 것이고, 그러니까 내가 앞으로 손자로서의 행세를 해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가지고 1980년대 초부터 병자 석자 할아버님 묘소도 찾고 제가 손자로 확인이 된 거예요.
이런 과정을 거쳐 최경선의 묘소가 확인되고 후손을 잇게 되었으나, 그것은 굴절된 우리 근현대 역사만큼이나 지난하고 기나긴 세월이었다. 그동안 묻혀버렸던 최경선의 묘소와 왜곡되었던 농민전쟁의 진실은 서로 깊은 연관이 있어 보인다. 뒤늦게나마 최경선 묘소와 그 후손이 확인된 것은 지난날의 잘못된 근현대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의 결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시작인지도 모른다. 이는 2대째 교직생활을 해오고 있는 후손들의 말 속에서도 알 수 있다.
제가 가진 것은 없더라도 빚을 내서라도 제가 할 일이니까 뭔가를 좀 해야 할 입장입니다. 제가 동학혁명기념사업 관여를 하면서 보니까, 참여하시는 모든 분들이 생각하시는 것이 올바르고 또 뜻이 깊어요. 많은 것을 보고 후손으로서 부끄러운 점을 많이 느끼지요. 제 자신부터 정리를 좀 해야겠고 저로서도 뭔가 할 일을 찾아서 뭐든지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는 있는데 그 일이 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