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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록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지식과 힘을 겸비한 정읍 접주 김기태, 장손 현중
대상인물

김기태 (金基泰)

1859~1935. 본관은 광산. 족보명은 태석(泰錫). 정읍의 농민군 접주로 활약. 나주 전투에 참여한 뒤 함경도 갑산으로 피신, 1935년 9월 2일 사망.

증언인물

김현중(金鉉中)



1931~ 김기태의 손자로 족보명은 영중(永中). 무성화랑무공훈장을 받음.

시흥 5동에서 중식업에 종사.


가계도
가계도 이미지
정리자

김양식

출전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

내 용

전라북도 정읍군 소성면 애당리에서 출생한 농민군 김기태는 가난한 시골 선비였다. 그의 손자 김현중은 그동안 전해들은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맨 처음에는 뭣을 했냐면 학자생할을, 벼슬하러 다닌다고 문중 논을 팔았느니 어쨌느니 그런 소리를 해싸 사람들이. 문답도 있고 농사도 어떻게 지었다고 그래쌌는데, 어떻게 된 판인지는 모르겠어요. 좌우간에 우리집은 책이 굉장히 많이 있었는데 글을 배운 우리 당숙이 우리 책을 많이 가져가버렸어요. 우리집에 있는 책을 몽땅 가져갔는데, 당숙집에 불이 나가지고 많이 태워버리고 그랬대요. 그리고 그때 우리 고모 말을 들어보니까, 할머니가 문서를 많이 태워버리고 그랬대요.

집안에 책이 많았던 점만 보아도 김기태는 상당한 식견이 있던 지식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벼슬하기 위해 문중의 논마저 팔 정도였으니, 생활형편은 썩 좋지 않았던 것 같다. 가세가 기운 몰락양반의 처지였던 것이다. 당시 뜻이 있고 세상을 아는 몰락양반들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김기태 역시 부와 권세를 가진 사람들에게만 좋은 세상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사회를 꿈꾸었으리라. 이러한 그에게 동학농민전쟁은 비켜갈 수 없는 운명이었고, 자연 그로 하여금 접주로 활동하게 하였다.

내가 어렸을 적에 동네를 다니면 노인양반들이 하는 소리가, 너의 할아버지가 동학 접주를 해가지고 이 고장 것은 하나도 손을 안댔다. 너그 할아버지가 힘도 장사고 저기 있는 시방 들독도 너그 할아버지가 그걸 매고 몇 바퀴씩 돌고 후떡 던지기도 하고 너의 할아버지가 그렇게 힘이 좋았었는데 하고 얘기를 해싸요.

김기태는 허약한 선비만은 아니었다. 동네에서도 소문난 장사였다. 지식과 힘을 겸비한 동학 접주 김기태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우리 동네 가면은 큰 집이 있는디 사랑방이 무척 커요. 우리가 듣기로는 동학이 일어났을 적에 거기다 조총을 쌓아놓고 거기서 밥먹고 훈련하고, 우리 앞 잔등에다 기를 꽂고 거기서 접주 노릇을 했대요. 접주를 해가지고 그 때부터 어떻게 하셨나면 나주를 치러 가자 해갖고 우리 할아버지가 동원해 가지고 나주로 갔대요. 그래 가지고 한참 가는데, 방장산[나주 근처 노령산맥 소재] 밑에 가서 많은 사람들이 도망했다 이거야. 그래서 그 사람들이 도망해갖고 왔는데, 우리 할아버지도 살림이고 뭣이고 다 내다치고 인제 목숨 살라고 6·25 때처럼 막 어디 숨으러만 돌아다녔지요.

조총을 쌓아두고 훈련도 한 동네의 큰 집은 바로 동학농민군의 본부 역할을 하면서 폐정을 개혁하던 집강소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집강소를 운영하던 김기태 등이 나주를 공격하기 위해 떠난 것은 10월 이후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전봉준 장군이 이끄는 농민군부대가 서울 공격을 위해 떠난 이후, 정읍 일대의 농민군은 나주 공격을 위해 남하하였고 10월 하순에서 12월 초순 나주 근방에서는 대소 규모의 전투가 수십 차례나 벌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기태가 휘하 농민군을 이끌고 나주로 간 것은 10월 이후이며, 방장산 근처에서 패주한 시기는 11월 전후의 어느 시점일 것이다. 이렇게 나주 공격에 패한 농민군은 흩어진 뒤 체포돼 처형되거나. 알 수 없는 곳으로 피신하는 것이 상례였다. 김기태 역시 성포라는 같은 동네 사람과 멀리 도망하였다.

우리 할아버지가 어디에 가 계셨냐면 저 함경도 갑산까지 가셨대요. 거기서 피난을 했던 모양이지요. 뭣을 했는지는 몰라요. 거기서는 대우를 많이 받았다고 고모가 그런 이야기를 해싸. 이유는 모르겠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확실히 몰라요. 산소만큼은 우리 고향에 가 계세요 그래도 가묘는 아니여.

처자식을 버리고 정처없이 떠난 피난길. 결국 그가 머문 곳은 한반도 북쪽 끝인 함경도 갑산이었다. 그곳에서 김기태는 상당히 자리를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머나먼 타향에서 기반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원래 힘이 좋고 아는 것이 많은 지식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1935년 사망해 돌아오기까지 그의 처자식은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아버지 말을 들으니까,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30살 먹어서 돌아가셨대요. 그동안 순 남의 고용살이하고 그렇게 모자간에 살았던가 봐요. 그러니 살림살이는 아주 말할 수가 없지요. 그래서 그런지 우리 아버지는 일자무식이여.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오.

남의 고용살이하면서 생활한 모자의 형편이 오죽했으랴. 더욱이 그들에겐 역적의 누명이 삶을 억누르고 있었으니, 동학 접주로 활동한 남편과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집안에서 금기시되다시피 했다.

이 동학난에 대해서 아버지한테 물으면 통 일절 말을 못허게 해요. 아무게 할아버지가 이야기하는데 우리 할아버지가 동학 접주일을 하고 진을 치고 나주를 치러 갔다는데 그게 어떻게 된 거냐 하고 아버지한테 물으면, 그런 소리 일절 못허게 해요. 그런 소리 자꾸 해싸면 순사가 잡아간다고 하면서 일절 못허게 해. 고모가 그 일을 잘 안다고 하는데, 고모도 돌아가버렸어요. 때로는 아버지한테 할아버지 때 잘 먹고 잘 살았다는데 어찌 이렇게 되았어요 물으면, 쓸데없는 소리마라, 당체 무슨 소리 하지 마라고 통 그렇고롬 세상을 지냈지요.

더욱이 김기태 후손들은 집안에서도 소외되고 있었다.

할머니 고향이 고창군 성내면 고리실인데, 그집 살림살이는 괜찮아요. 우리 아버지가 6·25 난리 전에 폭동이 나가지고 그 진외가집에 피신하러 가니까, 그 진외가 형이 이장을 하는디 오지마라 막 가라고 하더래요. 여기 있다간 큰 일난다고. 그래서 진외가고 뭐고 다 소용 없다고 우리 아버지가 전에 그런 얘기까지 해요.

다른 많은 농민군들의 후손처럼 김기태 후손도 갖은 고생을 해야만 했고, 특히 무슨 큰 죄라도 지은 양 마음을 졸이면서 살아야 했다. 그래서 그런지 이런저런 전해들은 이야기를 털어놓는 김현중의 얼굴에는 그동안 가슴 속에 담아두었던 응어리를 풀어헤치듯 후련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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