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김낙철(金洛喆)
1858~1917. 본관 부안. 자는 여중(汝中), 동학 도호(道號)는 용암[龍(溶)菴). 전북 부안군 부안읍 봉덕리 쟁갈마을에서 출생. 1890년 동학에 입교, 1894년 2차 동학농민전쟁에 참여, 12월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뒤 다음해 3월 석방. 이후 전라도 일대에서 동학조직을 재건하는 일에 전력.
김영웅(金英雄)
1941~ . 논산에서 출생. 족보명은 형태(炯台). 채운국교 장학회장, 논산군정 자문위원, 농협조합장 역임. 현재는 대전시 유성구 갑동에서 약수산장가든을 운영.
김양식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
김낙철에 관해서는 최근 그의 친필 수기인 『용암성도사역사약초(龍菴誠道師歷史略抄)』가 발굴되어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자세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그동안 농민전쟁에 참여한 농민군 지도자가 그 이후에도 살아남아 자신이 체험했던 갑오년 당시의 역사적 사실들을 생생하게 증언해주는 책이 거의 없는 실정에서 매우 값진 것이다. 여기에는 김낙철이 1890년 6월에 동생(김낙봉)과 함께 동학에 입교한 이래 1917년 죽기 직전까지 자신이 직접 체험하고 목격한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게다가 충남 논산에 사는 그의 손자는 김낙철에 관한 더 많은 증언을 들려주고 있다.
아버지는 제가 3살 때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지금 생존(서울 형님댁, 91세)해 계시지요.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할아버지는 학자이시고 동학의 두목격으로 가담을 하셨답니다. 대개 강경한 분들의 경우 못된 사람들을 제거하는 성품인데, 저희 할아버지는 다른 분보다 온건해서 그렇지는 않고 어디까지나 인도적이었고, 사진도 있지만 풍채가 굉장히 좋으셨다고 해요. 재력도 만석이라고 그러는데, 근래 들은 얘기로는 만석까지는 아니라도 옛날에는 백석이라도 하면 만석꾼이라고 하잖아요? 어머님 말씀에, 부안을 다니면서 보니까 할아버지와 아버님 이름으로 되어 있던 재산이 많더라구요.
김낙철은 체격이 크고 온순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만석꾼으로 얘기될 정도로 큰 부자였다. 그의 수제자의 수제자인 박기중(朴奇重, 1899년생) 옹도 김낙철이 부안 쟁갈리 일대에서 7백 석 이상을 거두던 지주집안이라는 증언을 한 바 있다고 한다. 그의 성격과 재력, 동학농민전쟁에서의 활동 등을 보여주는 중요한 한 일화가 있다.
어머님 말씀에 의하면, 제주도에서 흉년 들어 부안으로 쌀을 가지러 왔을 때 할아버지가 쌀을 주었다고 그러시데요. 제가 나중에 군지라든가 책자를 보니까, 할아버지가 쌀을 주었다는 기록은 없어요. 사실은 제주도 사람들이 가져가는 쌀을 동학군들이 뺏어서, 할아버지께서 그런 것을 그럭허면 안된다고 해서 쌀을 한 톨도 손상이 없게 가져가게 했답니다. 그 뒤 할아버지 형제분(낙철·낙봉)이 나주형무소로 겨울에 끌려가 거기서 처형당하게 되었을 때, 어머니 말씀에 제주도에서 대표되는 분들이 수백 명이 와서 연좌데모를 했대요. 소문을 듣고 온 제주도민들은 낙철씨 형제분이 훌륭한 분인데, 그때 그 식량으로 살게 되었는데 그런 분을 처형하려면 차라리 우리들을 죽여라 이렇게 해서 할아버지는 구명이 되었대요. 많은 사람들이 체포돼 나주로 끌려갔는데 거의 다 사형시켰대요. 할아버지는 다행히 제주도민들의 구명운동으로 거기서 처형을 안 당하시고, 서울형무소로 이송되었다고 그러더라구요. 어머니 말씀은 그때 이름까지는 모르시고 그냥 부안 군수라고 하셨는데, 그 분이 폭정을 허고 그러니까 동학군들이 그를 죽일라고 산으로 끌고갔다든가 이렇게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그 뒤 할아버지가 이 사실을 늦게 아시고 우리 동학정신이 인도주의니까 최대한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고 타일러, 그 사람 처형을 면하게 해주셨다고 해요. 그래서 할아버지가 서울형무소에 계실 때 부안 군수였던 이철화(李哲化)라는 분이 뒤늦게 아시고서 할아버지 구명운동을 해서 살으셨답니다.
부안 대접주로 활약한 김낙철 형제가 사형을 면하게 된 이같은 두 일화는 구전되어온 증언내용보다 김낙철의 친필 수기인 『용암성도사역사약초』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김낙철 형제는 1893년 3월 동학교주에 대한 신원 목적으로 부안 동학도 수백 명을 이끌고 서울 광화문의 복합상소운동에 참여한 일이 있었다. 동학농민전쟁이 막 타오르던 4월 1일에는 부안 서도 소정리 신씨 제각에 도소(都所)를 설치하였고, 9월에는 남북접 연합을 통한 재기병이 있을 때 부안에서 기포한 일도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1894년 12월 21일 나주 수성군에 의해 체포되어 나주로 이감되었던 것이다. 나주에 수감된 김낙철 형제는 나주 수성군으로부터 몽둥이와 가죽채찍, 쇠몽둥이 등으로 무수히 난타당하여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때 김낙철 형제 외에 부안에서 함께 끌려간 30명은 더욱 비참한 고문을 당했고, 이 중 27명은 일본군 대장의 즉결재판을 받고 모두 총살되었다. 다행히 김낙철 형제는 제주도민의 청원에 힘입어 즉시 처형되지 않고 1895년 1월 12일 서울 진고개 일본 순사청으로 압송되었다. 그곳에서 김낙철은 다리가 부러진 상태로 수감되어 있던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 등을 목격할 수 있었다. 여기서 김낙철 형제는 너댓차례 재판을 받은 뒤, 농민군에 우호적이었던 보성 군수 박태노(朴泰魯), 장흥 농민군 지도자 이방언(李方彦) 등과 함께 3월 21일 석방되기에 이르렀다. 석방되기까지에는 부안군수 이철화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그 뒤 김낙철은 고향으로 내려가 한동안 토굴에 숨어지내다, 1896년 경부터 동학조직의 재건에 앞장 섰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증언이다.
최시형 씨가 천도교 2대 교주라고 그러는데, 할아버지가 선생을 피신시키고 대신 ‘내가 최시형이다’ 하고 체포되었대요. 할아버지가 풍채가 좋고 어디 모여도 두목허실 만큼 외풍이 훌륭하시고 그래서 체포 8개월인가 9개월인가를 갖은 고문을 당하셨대요. 그래도 할아버지는 내가 김낙철이라고 안하시고 최시형 행세를 해가지고, 나중에 최시형이 체포되니까 가짜 최시형이라고 해서 늘씬 두드려 맞고 출옥이 됐다는 거요. 제가 부안 군지라든가 지난번 전북일보[1994년 2월 15일자]에 보도된 내용을 보니까, 어머니 말씀이 다소 부분적으로 틀린 점이 있더라도 대략적으로는 알고 계시더라구요.
이때가 바로 1898년 1월 4일로써, 김낙철이 최시형 측근에서 동학 포교와 조직 재건에 힘쓰던 무렵이었다. 여기서도 의리에 넘친 김낙철의 인간 됨됨이를 알아볼 수 있는 것 같다. 석방된 뒤에도 김낙철은 1898~99년간 고창·흥덕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영학당 봉기에 참여하는 등 계속 동학 부흥에 힘썼으나, 반면에 그의 집안은 말이 아니었다.
동학군들 지도자로서 자금관계 조달로 해서 재산 다 없애고 그것이 실패되고 천도교에 가셔서 거기다가 재산 다 내고 뿔뿔이 흩어지고 할아버지는 집에 잘 오시지도 않으시고 옥살이 하시고 할머니도 늘 혼자 계셨다고 하세요. 사실 풍비박산된 거지요. 그래서 충청도에 자리잡게 된 것이지요. 부안에서 논산까지는 멀지요. 왜 논산으로 오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할아버지는 충북 보은에도 계셨답니다. 서울에도 좀 살으셨다고 하대요. 저의 외가가 익산군 황등면이고 제 아버님이 황등 바로 옆 함열에서 면장도 하시고. 왜 논산(은진면 남산리)으로 왔는지는 정확하게 모르겠네요. 저도 논산에서 태어났지요. 아버님이 천도교 일을 안 하신 것은 그 많은 재산을 동학이니 천도교니 이런 데다가 다 쓰시니까, 아버님은 약간 불만이 있으셨다고 그러십디다.
김낙철이 동학 관계로 가정을 돌보지 않게 되자, 그의 식솔들은 농민 전쟁 이후 단속을 피해 이곳저곳으로 거처를 옮겨가며 산 것으로 보인다. 부유했던 전북 부안의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들이 함열 면장까지 지낼 정도이면 집안의 중심은 잃지 않았던 것 같다. 여기에는 바로 김낙철 부인의 내조가 컸다.
어머니 말씀은 할머니가 할아버지보다 필체도 더 좋으시고 학자셨다는 거예요. 시어머니로 모시고 계셨으니까 잘 아시는데, 할머니 편지 한 장만 가지고 가면 안되는 일이 없었다는 거예요. 문장도 좋으시고 그때 잘 살고 그러니까 할머니 편지면 어지간하면 다 통과했는가 봐요. 지금도 높은 사람들 메모지 가지고 가면 어지간하면 다 통과되잖아요? 어머니가 그런 말씀을 분명히 하셨어요. 할머니가 그렇게 똑똑하셨기에 할아버지가 활동하시는 데 뒷받침이 된 걸로 알아요.
그렇지만 가난은 어쩔 수 없는 고통이었다. 김낙철의 아들이 함열 면장까지 지냈어도 기운 경제형편을 회복시킬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후손들에게 힘겨운 삶을 안겨다주었다.
누나들은 부잣집에 일[더부살이] 내보내시고, 식모라고 하지요 공부도 못하고. 저도 바로 위에 형님하고 1년 차이에요. 형님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셨는데, 형님이 학교가면 바로 이어서 학교갈 수 없으니까 저도 어머니 모시고 살림을 했어요. 통신강의록으로 공부하고 서당에 다니고, 논산 천도교당에 나아가 야학도 하고 저는 그런 데 가서 공부했지요. 서울 중구 다동에 있는 상공일보사에서 사진, 만화 등 인쇄하는 일을 2년간 했어요. 전주에서 버스업 하는 이종 형 밑에서 승무원도 하면서 지냈지요. 제가 교회 다닌 것도 무엇인가 배워 볼려고 그랬어요. 교회 다니면서 여러 분들과 접촉하면서 얻은 지식을 통해서 사회생활을 할 수 있었지요.
이처럼 가난 속에서도 배움에 대한 열정만은 버리지 않고 살아온 집안이었다. 피는 속이지 못하는 것 같다. 비록 역사의 풍랑 속에 물질적인 부는 사라졌으나, 선대부터 내려온 정신적인 기둥만큼은 의연해 보인다. “어머니는 내가 비록 자식들을 별로 가르치지 못했어도 할아버지, 할머니 뜻을 따라서 바르게 살아야 된다. 이런 말씀을 늘 하셨지요.”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김영웅을 있게 한 바탕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더 일찍 할아버지에 관심을 두지 않은 것을 아쉬워하면서 말을 맺고 있었다.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신 관계로 저에게 할아버지에 대한 일을 자세히 전해줄 사람도 없고, 또 부안에서 그냥 살았으면 당숙 분들도 사시고 부안 김씨 노인분들에게도 많이 들었겠지만, 이렇게 나와 있어 아무것도 모르지요. 장형도 일찍 돌아가시고. 저는 몰랐지만, 논산 저희 마을에 살던 손우진이란 분이 계셨어요. 이분은 저희 집안을 잘 알지요. 지금은 세상을 뜨셨어요. 그분이 네 할아버지가 얼마나 동학이나 천도교에 참 두목으로 활동하셨다는 말씀을 간혹 하셨어요. 저는 나이도 어리고 또 우선 생활이 어려우니까 할아버지에 대한 것을 알아볼 겨를이 없었어요. 근래에 할아버지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요.
끝으로 그는 “할아버지하고 아버지는 꼭 닮으셨다고 집안에서들 말씀하세요. 저도 그분들하고 닮지 않았는가, 할아버지의 동학정신이 저의 피속에 있지 않나 생각하고 있어요”라고 하였다. 이것은 비단 한 가족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지난 100여 년 전 동학농민전쟁을 되새기고 후손 증언을 들어보는 것도 바로 역사 속의 민족정신을 찾아내 우리의 정신적 자산으로 삼으려는 데 있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