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김병렬(金秉烈)
1850~1894. 5. 4. 자는 경중(京中). 고창 출신으로 형(김병계)과 동네사람 5명과 함께 전투에 참가. 어느 전투에서 언제 전사했는지 알 수 없음. 집안에서는 전주 전투에 참가하기 위해 5월 4일에 집을 나갔다고 하여 그날 제사를 지냄.
김정수(金鼎洙)
1928~ . 농업에 종사. 향교 출입을 하면서 게이트볼 심판관으로 활동.
1956~ . 조선대학을 마치고, 전주에서 전북은행 차장으로 근무.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
할아버지가 키도 9척이나 되고 글도 잘하고 인물도 잘생기고 그래가지고 그 양반 앞에서 보통사람들은 벌벌 떨었고 그 양반 따라서 딴 사람들도 동학난리에 갔대.
키가 9척이나 되었던 김병렬. 거기에다 인물도 좋고 글까지 잘하였으니 동네에서 꽤나 유력인사였을 것이다. 그가 농민전쟁에 참가한다고 하니 이에 5명이 동조하여 따라나섰다. 당시 이런 식으로 농민전쟁에 참가한 농민들의 수는 적지 않았을 것이다.
두 양반이 같이 가셨다가 이 양반(김병계, 병오생 1846년)은 갔다오시고 이 양반(김병렬)은 돌아가셨는디 나간 날이 갑오년 오월 초나흘날이여. “어째 동생은 두고 혼자만 왔소” 할머니가 그러니까, (할아버지의 형님되는 분이) “동생은 갈려서 모른다”고 했대. 그러니까 “형제간이 같이 갔으니까 같이 올 일이지 당신만 왔냐”하며 싫어하셨어. 그 후로 할머니는 아버님(戊子生, 1888년), 고모님 두 분을 낳고 홀로 되았는데 할머니가 89살에 돌아가셨어요. 아버지가 효자상을 받았어. 원채 효자였다고. 효자비를 세울려고 하고 있어요. 나간 날을 제삿날로 하고 있지. 언제 죽은 줄을 모르니까. 우리 종조하나씨도 같이 나가기만 했지 언제 죽은 줄을 모르지. 동네에서 5명이 갔는데 다른 사람은 다 죽고 못오고 이 양반 혼자만 왔어.
그리하여 형과 함께 집을 나간 것이 5월 4일. 형은 돌아왔지만 김병렬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같이 떠났던 마을사람들도 돌아오지 않았다. 김병렬이 어느 전투에서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돌아온 형도 동생과 중간에 길이 갈려 알지 못했다.
전주 전투에 갔대. 아버지 9살(7살인 듯) 먹어 나갔으니까 아버지도 어린 참인데 아버지도 듣고만 알았제. 들은 이야기라 잘 모르지.
집에서는 전주 전투에 참가하기 위해 집을 나갔다는 것밖에는 아는 것이 없으니 더욱 답답했다. 하는 수 없이 울며 겨자먹기로 집 나간 날을 제사날로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지내는 제사도 가장의 시신이 어느 골짜기를 뒹굴며 눈이나 감았는지 알 수 없는 형편이었으니 제대로 지낼 수 있었으랴. 그런데 5월 4일에 집을 나간 것이 전주 전투에 참가하기 위한 것이라면 전주성을 점령하고 관군과 싸우고 있던 농민군을 지원하고자 떠난 것으로 보이는데, 그때의 상황을 살펴보자. 당시 농민군은 4월 23일(음력 : 이하 날짜는 음력) 장성에서 이학승이 이끄는 경군을 격퇴시키고 군사를 재촉하여 곧바로 갈재를 넘어 정읍을 향해 달려갔다. 농민군은 25일 정읍을 다시 한번 더 휘젓고 태인, 원평을 지나 금구에 도착하였고, 26일에는 전주 턱밑인 삼천(三川)에 이르렀다. 여기서 용머리고개까지 3km, 전주성까지 4km. 전봉준은 전주성 안에 있는 내응자들에게 알려 전주성 점령 준비를 물샐틈없이 마무리하게 하고 군대를 이곳에서 야영시켰다. 다음날 아침 햇살은 알맞게 따가왔다. 끝없는 깃발의 행렬이 용머리 고개를 구불구불 기어올랐고, 누런 흙먼지가 꼬리를 물고 하늘로 치솟았다. 농민군은 여기까지 올라오느라 몰아쉬었던 가쁜 숨을 잠시 가누었다가 성난 파도처럼 전주성을 덮칠 듯 쏟아져 내렸다. 하늘이 떠내려갈 듯한 함성과 함께 포를 한 방 먹이니 전주성의 서문과 남문은 일시에 혼란에 빠져 사람들은 우왕좌왕, 성문을 지키던 군사들은 총을 버리고 난민 대열에 몸을 숨겼다. 감사 김문현은 서문이 저절로 열리면서 농민군이 물밀듯 성안으로 몰려 들어오자 덜컥 가슴이 내려앉고 눈앞이 캄캄해져 사인교를 타고 동문으로 달아났다. 한편 전주성의 수비병까지 쓸어서 끌고간 홍계훈의 경군은 농민군의 꽁무니를 따라오다가 다음날 용머리고개에 도착하였다. 경군은 완산, 다가산, 사직단, 유연대 등 주변 산과 골짜기를 연결하여 진을 치고 포열을 폈는데, 아영(牙營 : 지휘본부)은 완산칠봉 남쪽 구릉에 두었다. 이날 오후 농민군은 반격에 나섰다. 농민군은 하얀 포장(布帳)으로 앞을 가리고 전주천을 넘어 경군을 향해 뛰어올라갔다. 성안의 농민군은 성루 위에 올라 대포와 총을 일제히 쏘아 기세를 돋구었다 5월 1일에는 경군 쪽에서 “전봉준을 잡아다 바치는 자는 상을 내리고 모든 것을 용서해주겠노라”는 효유문을 성안에 뿌렸고, 농민군은 이에 답하기라도 하듯이 남문으로 나가 군대를 남·북 2대로 나누어 완산칠봉의 경군을 목표로 돌진하였다. 남쪽 1대는 남고천을 건너 곤지산 서쪽 벼랑의 골짜기에서 공격하였고, 북쪽 1대는 위봉에 올라가서 매곡(梅谷)을 사이에 두고 경군과 싸웠다. 싸움이 치열해질수록 전주천은 붉게 물들었다. 5월 2일 경군은 어제 당한 분을 풀듯 완산 위에서 야포와 기관총으로 무차별 쏘아댔다. 그러나 정작 포탄은 성안에 닿지 않고 서문과 남문 밖의 민가를 부수어 놓았다. 5월 3일 전봉준은 농민군을 직접 이끌고 오후에 북문과 서문을 나섰다. 이날의 전투는 선봉장으로 앞장 선 어린 장사 이복용이 전사하고 전봉준도 왼쪽 허벅지에 총상을 입을 정도로 격렬하였다. 경군의 타격도 막대하였다. 한편 전주성이 농민군에 의해 점령되자 조정은 정권유지를 위해 앞뒤를 가리지 않고 청나라 군사를 빌어 농민군을 진압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청군차병요청서」를 청나라에 보냈다. 이 국서는 청나라의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에게 접수되어 결국 청나라 군사가 5월 5일과 7일에 아산만에 도착하는 빌미가 되었다. 일본은 갑신정변 이후 열세였던 국면을 역전시킬 수 있는 더 없는 기회를 얻었다고 보고 5월 5일에 대본영을 편성하였다. 이 사이 5월 2일에는 휴가로 일본에 있던 공사 오오도리(大鳥圭介)로 하여금 선발대를 이끌고 귀경하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일본 선발대가 5월 6일 인천항에 도착하였고 오오도리는 다음날 저녁 440명의 일본군을 이끌고 서울에 들어갔다. 이같은 청과 일본군의 상륙은 전주성에 있는 농민군에게도 알려져 전봉준은 정국이 심상치 않게 돌변했음을 느꼈다. 이렇게 해서 폐정개혁을 실시한다는 조건을 달고 5월 7일 저 유명한 전주화약이 맺어졌던 것이다. 따라서 5월 4일에 집을 나갔다면 김병렬은 전주 전투에도 참가할 수 없었는데 어디서 어떻게 싸우다가 소식도 없이 전사하였을까. 전주화약이 맺어진 뒤에 농민군은 지방을 순회하면서 폐정개혁을 서둘렀고, 이때쯤에는 집에 연락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도 있었다. 그리고 2차 기병은 9월 말이었으니 넉 달 뒤의 일이고 그 사이 이렇다할 전투는 없었다. 그렇다면 김병렬의 행적은? 어쩌면 5월 4일 이전에 집을 나가 전주 전투에 참가하여 전사했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전사한 날짜는 5월 4일쯤일지도 모른다. 김병렬의 정확한 행적이 밝혀지지 않는 한 이 부분은 단언하기 힘든 여백으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글을 많이 읽으셨제. 학자였제. 큰하나씨는 덜 배왔고. 학교가 있으니께 마을서당에서 배웠지.
큰할아버지와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라곤 별로 많지 않은 김정수 옹은 그래도 할아버지가 많이 배웠다는 것이 자랑스러운 모양이다 김정수 옹의 증언에 따르면 김병렬은 한학을 접했던 지식인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농민전쟁에 참가하였을까.
동학교도는 교도였제. 가서 죽었응께. 그 양반 가서 죽은 후로는 동네에서 막 그러니까 그 양반이 나서야 헌다 해갖고 성조에서 데리고 왔대. 성조에서 동네사람들을 하나씨가 데려왔대. 그런저런 이야기만 들었제 다른 것은 몰라.
동학교도였기 때문에 참가하였을까. 김정수 옹은 할아버지가 농민전쟁에 참가했으니 동학교도였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으나 할아버지가 동학교도였다면 교도로서의 행적이 어느 정도 남아있을 텐데 그런 것은 전혀 증언에서 들을 수 없다. 집안에서 쉬쉬해서 자세한 것이 전해지지 않은 탓도 있을 테지만 주변에서 으레 농민전쟁 참가자는 곧 동학교도라는 식으로 말해온 탓도 있을 것이다. 이 또한 의문사항이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다른 지면을 빌리기로 하고, 할아버지가 농민군이라는 이유 때문에 가족들은 겪어야 했던 이야기이다.
일본놈들이 오니까 광산 김가라면 죽응께 장불 노가라고 변성을 해가지고 살았어. 그 자손들이 왜 노씨라고 했냐면, 우리 고조 하나씨가 노씨한테 장개를 갔어. 동학꾼의 아들이라고 해서 죽여분징게. 노가라고 하면 안 죽였어. 노가는 아무 상관이 없은게. 피난은 안 갔지라도 조심조심 피해댕겼제. 근처가 전부 우리 일가제. 자자일촌허고, 지금도 50호 중에 타성은 몇 호가 안되지. 우리가 광산 김가 문정공파 녹사공 38대손이여. 아버지 때는 숨어살았어, 솔직히 우리 아버지가 동학에 가서 죽었다는 말도 못하고 감췄제. 동네어른들이 간 사람이고 안 간 사람이고 광산 김가는 모두 죽인게. 누가 지나가면 장불 노가라고 하면 가라고 한께 살았제.
농민군의 후손이라면 죽이거나 엄청난 탄압이 가해져 할 수 없이 광산 김씨가 장불 노씨로 변성명해야 했다는 기구한 사연이다. 지금이야 그런 이야기들이 술술 나오지만 어디 그때야 까딱 잘못 했다가는 목숨이 날아가는 살얼음판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불행중 다행인지 고향을 떠나 피난은 안 갔지만 노심초사하며 살아온 가족사를 말하는 김정수 옹. 그때의 기억을 애써 지우려는 모습이 역력하다. 그런데 변성명해서라도 떠나지 않았던 고향을 등져야 했는데, 그 사연이란….
본래 살던 곳은 고창군 상하면 하장리 오룡마을 3리 3. 일정 때 저수지 만들어서 잠겨갖고 나왔지. 지금 사는 곳으로 왔지. 번지는 똑같아.
일본인들의 수리조합에서 축조한 저수지 때문에 고향이 물에 잠겼단다. 그 일본인들이 할아버지도 앗아가더니 이제는 살던 터전까지도 깡그리 수몰시켜버렸다. 그래서 가족들은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는데 그래도 이를 악물고 살아온 덕분에 이제는 아이들도 다 키우고 논 스무 마지기도 장만하였다는 김정수 옹의 말은 오히려 담담하다.
그나저나 농사짓고 살지요. 내가 스무 마지기 있지, 할아버지하고 아버지 때는 하나도 없었고.
그리고 돌아오지 않는 할아버지를 기다리다 89살에 눈감은 할머니를 위하여 집안에서는…
삼색 실로 삼베를 지어서 할머니 돌아가신 데다 함께 했제. 시신을 찾들 못했제. 밤나무에다 패를 써서 같이 묻었제.
할아버지의 시신 대신 밤나무로 패를 만들어 할머니와 합장하였다. 100년 전 채 마무리하지 못하였던 가족사가 이제야 겨우 정리된 것일까, 조상의 시신을 찾지 못하여 이런 식으로 가묘를 만들거나 합장하였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얼마나 더 듣게 될까. 시간 저편으로 흘러간 지난 역사가 새삼 김정수 옹의 증언 속에 다시 다가옴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