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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록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부안 접주로 활동한 송성구, 증손 영태
대상인물

송성구(宋聖九)

1853~1895. 족보명은 원환(元煥), 자가 성구. 전북 부안 일대에서 동학농민군 접주로 활동. 토굴 속에 피신해 있다가 체포, 1895년 1월 11일 총살당함.

증언인물

송영태(宋永泰)



1943~ . 족보명은 영수(永洙). 마포구 상암동에 거주.



가계도
가계도 이미지
정리자

우윤

출전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

내 용

전북 부안 일대에서 동학농민군 접주로 활동한 송성구에 대해서는 현재 남아 있는 기록이 없어 자세한 것을 알 수 없다. 송성구 역시 이름없이 죽어간 수많은 농민군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그의 후손이 살아있어 송성구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성(聖)자 구(九)자 그 양반이 내게 증조할아버지이신데, 전북 고창군 흥덕면에서 태어나신 거예요. 그 양반이 독자이신데, 흑사병이 번지고 그라니까 독자를 살리기 위해서 고조할머니(경주 이씨)께서 친정이 있는 부안군 주산면 흥해 부근으로 봄에 피난왔다가 부안군 백산면 공작리에 터를 잡으신 거예요. 공작리에서 성장을 하셨지요. 그러니까 제게로 고조할머니는 옛날 말로 홀어머니제. 그 양반이 고창에서 부안으로 와가지고 고조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아들 하나 키우면서 살으셨을 걸로 짐작을 허지요. 할아버지[基準] 때는 떵떵거리며 살았어요. 옛날에는 잘 모르겠어요. 잘 살았다 뭐 했다 그런 소리만 들었지. 지금 제가 사는 곳이 597번진데 그 집이 참 크고 좋습니다. 그 집이 우리 본적이에요. 그러고 보면 잘 살았다는 것은 확실한데, 어떻게 돈을 벌었다 하는 것은 잘 모르겠어요.

송성구는 “동네에서 골목대장을 하며 개구장이로 성장하셨지만 영리하고 똑똑하였다 체격이 좋고 힘이 장사였다”고 한다. 그는 비록 고창에서 어머니의 고향인 부안으로 이사를 했지만, 경제형편도 넉넉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했던 그가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한 동기는 무엇일까?

제가 알기로는 그 양반이 그리 많이 배운 것 같진 않아요. 많이 배우진 않았지만 기운도 있어 갖고 일도 하시고 그랬는데, 누가 잘못 한 거 있으면 참지 못해요. 그래서 많이 배우진 못했더라도, 농사를 지으면서 나라가 잘못 되가니까 인자 참을 수 없다 하고 참여한 것으로 생각돼요.

송성구는 비록 배우진 못했어도 농사를 지으면서 몸소 체험한 사회의 잘잘못과 농민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이를 조금이라도 해결하고자 의리로써 떨쳐 일어났던 것이다. 여기에는 정의를 위해서는 물불을 안 가리는 그의 성격이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동학농민전쟁에 가담하여 부안, 백산, 고창, 흥덕, 고부 일대에서 백마를 타고 총을 메고 동지들을 거느리고 활동하였다고 한다. 그러다 일본군과 정부군이 부안 일대로 들어온 1894년 11월 어느 무렵 그도 최후를 맞이하고 있었다.

일본놈의 총칼에 패전을 하니 친구 곽모 씨와 함께 토굴 속에 은신하셨어요. 공작리 앞 들에 있는 작은 산(개암산) 밑에. 증조할머니께서 밤에 아무도 모르게 토굴을 파면서 흙을 함지에 담아 머리에 나르시며 고생을 하여 토굴을 완성하셨어요.

두 분이 은신하실 때, 일본군은 숨어있는 동학군을 찾는 데 혈안이 되어 밤낮으로 증조할머니를 괴롭혔는데, 한번은 식칼로 자신의 왼팔을 찌르면서까지 은신처를 불지 않았지만, 친구 곽씨의 부인은 고문 끝에 숨어있는 곳을 밝혀 두 분이 부안 관아로 끌려가 곽씨는 석방되고 증조할아버지께서는 부안 동구밖(현재 부안 동국민학교로 추정)에서 일본군이 총을 쏘자 힘을 불끈 쥐며 방어하니 총알이 몸에 박히지 않을 정도로 힘이 장사였지만 연속되는 총탄 3발에 원통하게도 작고하셨습니다.

족보에 송성구의 기일은 1895년 1월 11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가 총살당한 시기도 같은 날이거나 이 무렵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총살된 그의 시체는 수습되어, 현재 부안 변산에 안장되어 있다. 그러나 그 뒤 그의 부인은 홀로 가세를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원자 환자 양반이 돈도 있었고 동학에 가담도 했고, 그러면서 일찍 돌아가셨거든요. 그러니 내게는 증조할머님이지요. 그 양반이 밀양 박씨 참봉 따님이에요 그 양반이 살림을 많이 해서 그 후에는 그렇게 살았어요. 그래서 할아버지 때 가서는 떵떵거리고 잘 살았어요.

이 정도나마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하다 처형된 송성구의 존재가 밝혀진 것은 그의 증손인 송영태가 나름대로 노력한 덕택이다.

이런 게 한 1, 20년 전에만 있었어도 증인이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 와서 내가 고향에 가서 알아볼라 해도 알아볼 길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경찰관한테 물어봤어요. 100년 전 기록이 있느냐고. 없다고 그래요. 나도 내 나름대로 찾아볼려고 족보도 보고 그랬는데, 배움이 부족해서 그런지 어디서 찾을 길이 막막해요. 총살당한 것은 분명한 사실인데 그래서 내가 동학농민혁명 후손유족회가 발족하기 전부터 혼자 겁나게 나름대로 애를 써 봤어요. 사실 그 뒤로 모두 조실부모 했지요. 나도 역시 조실부모하고 먹고 살기 바쁘고 이런데 신경 쓸 여유도 없었고. 우리 아버지부터도 신경을 못썼어요. 벌써 난리를 몇 번 치르고 일제 36년은 있어도 치워버려야 할 형편이니까.

그러면서 송영태는 지금에 와서라도 증조부에 대한 정리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 흐뭇해하면서도, 더 일찍 자료를 수집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한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23년 정도 되나 봐요. 그 당시에 아버님이 찾아봤으면 쉬웠을 텐데, 내가 그것이 원망이랄 수도 있고 후회스럽기도 하고. 당시에는 전체적으로 먹고 살기 바쁘고 찾는 사람도 없었지요.

이는 비단 한 후손만의 문제가 아니다. 작게는 후손, 크게는 지난날 어려웠고 굴절되었던 100여 년의 우리 근현대 역사가 자초한 무관심 내지 왜곡의 산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증언 작업을 통해 올바른 사회와 건강한 민족을 위해 이름 없이 죽어간 수많은 동학농민 군이 복원되는 것, 이것이 진정 역사 바로 세우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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