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유재희(劉載熙)
1858. 4. 15~1894. 12. 11. 본관은 강릉, 자는 광화(光華), 호는 죽산(竹山). 전라남도 나주 일대에서 농민군의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등 지도자급으로 활동하다가, 1894년 12월 화순 도곡에서 36세의 나이로 전사함.
유길홍(劉吉洪)
1924. 12. 4~ . 족보명은 영홍(永洪). 젊어서 공무원(4급) 생활을 하였고, 충장 새마을금고 이사장을 지냈음. 현재 광주광역시 동구 충장로에 거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
동학농민전쟁은 1894년 전시기에 걸쳐 거의 전국적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어떤 지역은 동학농민군이 완전히 장악하기도 하고, 어떤 지역은 동학농민군 대 반농민군의 치열한 접전이 있었다. 이같은 지역은 전국에 걸쳐 있었으며, 그 중 나주 지방은 성밖 대다수의 농민들이 동학농민군에 가담한 상황에서 목사와 영장·향리·유생층이 중심이 된 반농민군 즉 수성군(守城軍)의 활동이 두드러졌던 곳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나주는 동학농민군과 수성군 사이에 여러 차례에 걸친 충돌이 있었다. 1894년 4월 전봉준의 협력 요구를 완강히 거부한 나주는 7월에 들어와 최경선과 나주 접주 오권선(吳權繕)이 이끄는 동학농민군 수천 명의 공격을 받은 바 있다. 또 8월 13일에는 전봉준이 나주목사 민종렬(閔種烈)을 찾아가 서로 화해, 협력하기로 담판을 짓기도 하였다. 그리고 10월부터는 손화중·오권선이 이끄는 농민군부대와 나주 수성군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을 뿐 아니라, 수성군은 농민군을 체포하는 대로 처형하는 등 무자비한 소탕을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지역적 특성 때문에 나주 출신으로 활동하다 죽어간 농민군이 매우 많았는데, 그 중의 하나가 유재희였다. 특히 최근 그가 동생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편지가 공개되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광주일보』·『무등일보』1995년 6월 2, 3일자).
제번하고 동생 광팔 받아보게. 나라의 환란은 백성이 근심할 바이므로, 내가 집을 나와 수년을 돌아다니며 가사를 돌보지 못하였네. 이는 자고로 자식된 도리가 아니지만, 자네 광팔이 형을 대신해 집안을 돌보고 있으니 다행이네. 여러 날 왜군과 싸우는 것은 나라 은혜를 갚는 의로움이나, 형세가 극히 어렵기 때문에 하늘을 이불삼고 땅을 자리삼는 고초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지경이네. 전에 보내준 재물이 다소 있어 그것을 썼으나, 사정이 어려워져 다시 돈과 비단을 청하는 바일세. 이 점 살피어 급히 보내주기 바라네. 바라건대 죽고 사는 것은 국운과 함께 하는 것일세. 뒷일은 형제들에게 부탁하고 이만 줄이겠네. 갑오년 늦가을 형 광화
한지에 한문으로 작성된 이 편지는 유재희가 동생 재광에게 보낸 것인데, 동학농민군의 사정이 어려워 다시 돈과 비단과 같은 군수물자를 청한다는 내용과 죽고 사는 것은 국운과 함께 한다는 비장한 각오가 담겨 있다. 당시 수많은 농민군들이 왜 농민전쟁에 참여했고 무엇을 위해 고귀한 생명을 버렸는가를 짐작케 한다. 그것은 바로 침략자 일본을 물리치기 위한 구국투쟁이었다. 또 이 편지를 보낸 시기가 갑오년 늦가을로 되어있는데, 일본군은 음력 11월 24일 전주, 12월 3일 남원, 12월 8일 광주를 거쳐 12월 10일 나주에 이르렀다. 편지 내용에 여러 날 왜군과 싸웠다고 한 점으로 보아, 이 편지는 11월 하순에서 12월 초순 어느 시점에 보낸 것 같다. 그에 대해 그의 후손은 다음과 같은 증언을 하고 있다.
할아버지는 전남 나주군 다도면 방산리에 사셨는데, 그 마을은 50여 호로 이루어져 있었어요. 증조부는 6형제 중에서 가장 출중한 증조부(재희)에게 외부 일을 맡기셨습니다. 한말 전후 인근 지역의 땅이 증조부 소유였습니다. 외작만 100여 석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집안에는 할아버지가 쓰시던 책들이 많이 있었어요.
농민군 유재희는 앞의 편지에서 볼 수 있듯이 군수물자를 제공할 정도로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었고 형제중 가장 출중하였다. 더욱이 족보에 의하면, 그의 부친 몽렬은 정3품인 돈녕부 도정(都政)을 지낸 통정대부(通政大夫)였다. 부유한 명문대가 집 자손이 농민전쟁에 참여한 것이다. 남 부러울 것이 없는 그가 농민전쟁에 참여한 것은 편지에서도 읽을 수 있듯이 국난, 즉 일본의 침략에 맞서 전민족적 항쟁을 벌이기 위함이었다.
화순군 포곡면 박씨 부락으로 후퇴하다가 관군과 일본군에 의해 돌아가셨어요. 닷새 뒤에 이 소식을 듣고 할머니가 찾아나섰다가 허리띠와 신을 보고 시신을 수습하였는데, 이후 10년이 지나서 선산이 있는 나주로 이장을 하였습니다. 현주소로 나주군 나주읍 청동리 산 107번지입니다.
결국 유재희는 밀려오는 일본군과 관군을 상대로 싸우다 화순 도곡으로 후퇴해 전사하였다. 위 증언 내용으로는 그가 전사한 구체적인 상황을 알 수 없으나, 당시 일본군 지대는 음력 12월 9일부터 12월 19일까지 능주에서 체재하며 인근 지역 잔존 농민군을 토벌하였다. 광주에 집결해 있던 손화중부대가 12월 1일 해산한 뒤 능주 쪽으로 후퇴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12월 7일부터 9일 동안 화순에서는 농민군 접주 8명이 정부군에 의해 체포되어 신문을 받다 고문에 못이겨 죽은 일도 있었다. 12윌 10일에는 화순과 인접한 남평의 농민군 10명이 체포되어 이중 5명이 총살을 당한 일도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손화종·최경선이 이끄는 농민군부대에 편입, 나주성 공격에 실패한 뒤 능주·동복 방면으로 후퇴한 잔여세력으로, 12월 10일을 전후해 일본군·정부군·민보군에 의해 체포되어 처형된 것으로 보인다. 유재희 역시 이들 농민군의 하나였던 것으로 보이며, 족보에 기일이 12월 11일로 되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유재희 역시 나주성 공격에 가담한 뒤 화순 방면으로 후퇴하며 소규모의 전투를 치르다 사망했거나, 아니면 체포되어 처형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동학농민군은 하나 둘 쓰러져 갔고, 전쟁은 막을 내렸다. 그 뒤 농민군 자신은 물론 그 후손이 받아야 할 고통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는 유재희가 죽은 지 10년이 지나서야 고향 선영으로 안장될 수 있었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민족을 위해 그 많던 재산은 물론 목숨까지 바친 것치고는 너무나 억울한 일이었다. 무엇으로 그 억울함을 풀어줄 것인가. 민족을 위한 고통은 비단 농민군 자신으로 끝나는 것만은 아니었다. 대대로 이어져온 이 시대의 아픔이기도 하다. “역적의 집안이라는 오명을 씻을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다”는 이 한 마디 말 속에 농민군 자손으로 살아온, 살아가고 있는 후손들의 염원이 무엇인지 짐작케 한다. 이는 우리 모두의 염원이며, 이것이 신원될 때 지금으로부터 1백여 년 전 떨쳐 일어난 농민군의 큰 뜻은 성취되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