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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록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총살에다 화형까지 당한 이문교, 손자 기엽
대상인물

이문교(李文敎)

1858~1895. 자는 대성(大成). 고창군 해리에서 접주로 활약하다가 농민전쟁에 참가, 피신해 있다가 같은 마을 사람에게 밀고되어 무장현에서 총살당하고 다시 화형까지 당했음.

증언인물

이기엽 (李琦葉)



1932. 1. 15~ . 보명은 영신(?信). 면사무소와 수리조합에서 근무하다 1967년부터 행정서사로 일함. 7남매 둠.

1958. 8. 29~ . 전북대 공대를 마치고, 고창의료조합에 근무.




가계도
가계도 이미지
정리자

김양식

출전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

내 용

동학의 인연으로 부인을 얻게 된 이문교는 고창군 해리면 일대의 접주로 활약하였다. 그런 이야기를 어머니로부터 들었다는 손자 이기엽 노인이 들려주는 증언은 이렇다

어머니가 시어머니하고 길쌈을 하시다가 들으신 이야기를 저희들에게 전해주셨지요. 할아버지가 글을 많이 하시지는 않았지만 관청에 다니면서 마을 일은 볼 정도의 학식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저희 외가가 김녕 김씨(金寧 金氏) 집안으로 고창군 해리면 고성리 칠성동인데 동학 접주를 하신 분이 있었어요. 그래서 저희 할아버지도 접주시고 하니까 얽히고 설켜서 혼인이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영광군 노량에 살다가 고창군 해리로 옮겨산 것은 이문교의 아버지 대부터였다. 그러나 농민전쟁을 맞이했을 때는 지금의 왕거리, 왕촌에 살았고, 농민전쟁에서 밀리자 다시 마을로 들어와 피신해 있었는데 그 왕촌의 터주대감격인 청도 김씨와 경주 김씨들이 이문교를 밀고하여 체포되었단다. 손자 이기엽의 증언을 들어보자.

고조부님 이(以)자 호(浩)자 양반은 전남 영광군 노량면 당산리 거그서 살으셨는데, 증조부님께서 전북 고창군 해리면 안산리로 처음에 오셨어요. 다음에 그 마을에서 왕촌, 지금은 왕거리라고 그럽니다. 왕거리에 계실 때 갑오동학을 맞이해가지고, 그 마을에는 청도 김씨하고 경주 김씨의 양대 성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사이에서 전주 이씨인 저희 조부 한 분이 동학에 가담허셔 가지고 접주를 허셨는데 그 뒤에 관군한테 몰리게 되자 양 성씨가 밀고를 했어요.

그런데 양 김씨들이 이문교를 밀고한 것은 관군의 후환이 두려워서이기도 했겠지만 평소 이문교가 자기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던 앙갚음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집에 숨어있다가 잡으러 오면 숨고 가면 다시 들어오시고 했는데 양 김씨가 평소 술도 받어주라고 하면 그렇게 하고 돈도 좀 주라고 하면 해야 하는 데 저희 한아버지는 빳빳했다고 그래요. 그래서 미웁게 봤던 갑데요. 숨는 데를 봐뒀다가 관군이 오니까 밀고를 해서 붙들려 갔다고 그래요.

자기를 밀고한 이웃을 탓할 겨를도 없이 체포되어 무장현으로 끌려간 이문교는 총살형을 당하고, 그것도 모자라 죽었는지 확인하느라 기름을 뒤집어쓰고 화형까지 당했던 이문교는 두 번이나 죽어야 했다.

그때 원님이 있는 무장현으로 붙들려가 가지고 거기서 총살형을 당하셨어요. 그때 당시 사람을 총으로 쏘아서 죽이면 설맞어서 살아나가는 사람이 있었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다음에는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기름을 뿌리고 불을 질렀다고 합니다. 그래서 얼굴이 다 타버렸기 때문에 얼굴을 보고는 시체마저 찾을 길이 없었어요.

그래서 얼굴도 분간할 수 없게 타버린 이문교의 시신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마침 부인이 만들어준 버선을 신고 있었기 때문이라 하는데, 그때의 참혹한 광경을 손자는 다음과 같이 들려준다.

시신은 할머니가 마을 친척 몇 분과 같이 가서 모셔왔는데 저희 한아버지는 할머니께서 신고 다니던 버선을 당신 손으로 기워 드렸기 때문에 그놈을 신고가서 가셨어요. 얼굴을 봐가지고는 누군지를 모르니까 찾을 길이 없고 그 버선 기운 것을 봐가지고 당신 바느질 솜씨니까 알 수 있었다는 거지요. 그래서 할아버님의 시신을 모셔가지고 그 양반이 살으시던 마을 뒤 조시산(造矢山)에 모셔놓고 있습니다. 승방이라는 마을 뒤에 계시죠.

그런데 그때 이문교의 살림살이는 꽤 넉넉했던 모양이다. 그 재산이 탐나 양 김씨들이 못된 짓까지 했다고 말하는 손자 이기엽의 눈가에는 어느덧 잔주름이 잡힌다.

그때 당시 그 마을에서 상당히 재산을 가지고 계셨어요. 개똥논 엿 마지기와 전답 2, 30두락에다 소 몇십 두 정도로. 그런데 시골에서는 황소, 씨암소를 한 마리 사람에게 내주면 1년 부려먹고 그 대가로 송아지를 한 마리 내서 가져오게 되어 있습니다. 소 에미하고 송아지하고 가져오게 되어 있는데, 한아버님이 갑오동학에 돌아가시고 할머니가 계시지만 아들들은 어리고 허니까 그 양 김씨들이 소를 끌어다가 팔아먹었어요. 그러고 그 사람들한테 시달려 못사니까 그 마을에서 약 2km되는 지로리(芝老里)라는 마을로 오셨어요, 그때 당시 제일로 큰아들 용자 섭자(1878~1895) 양반이 16살, 춘자 섭자(1881~1932) 양반이 16살, 아버님(1889~?)이 5살 이렇게 어렸기 때문에 할머님이 겨우 가지고 있던 이부자리하고 그릇 조금허고 약간의 식량만 가지고 지로리란 마을로 피난나왔어요. 그래서 저는 항시 양 김씨에 대해서 우리 한아버지를 밀고 해서 죽였구나 하는 감정(적개심)을 지금도 가지고 있어요.

양 김씨의 행패와 등살에 못이겨 겨우 옷가지만 들고 지로리로 피신하였지만 왕촌에 두고 온 개똥논 엿 마지기와 지로리의 논 열 마지기를 바꾸어 농사짓고 살았단다. 그 덕분에 그렇게 궁하지는 않았다고 담담히 말하는 손자 이기엽이다.

지로리로 가서는 왕거리의 엿 마지기하고 가까운 지로리 열 마지기를 바꿔서 농사를 지었지요. 할머니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아주 궁하지는 않았지요.

그 난리통에 왕촌의 개똥논 엿 마지기를 챙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을텐데 어떻게 그렇게 했을까. 이는 손자 이기엽이 들려주는 할머니의 이야기에서 그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할머니가 순창 설씨(淳昌 薛氏: 1859~1937)인데 진외가의 할아버지가 저희 마을에 살고 독립유공자로 되신 김참봉이란 분과 의병운동을 하셨다고 합니다. 진외가는 고창군 대산면 발산마을이고 할머니가 남자 못지않은 처세를 했다고 합니다. 무장서 잡어다 죽일 때 돈을 갖다 바친 사람은 방면이 된 사람도 있다고 들어 그렇게도 할려 했든갑디다만, 저희 할아버지는 즉시 접주로 몰려가지고 저희 외가쪽 할아버지 되시는 분은 돌아가시고 그 집에 불까지 질러부럿다고 그래요.

이런 할머니에 어떻게 그런 손자가 태어났는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큰손자 성신에게는 노름벽이 있었단다. 그때부터 집안이 어려웠다는 대목에서 이기엽의 증언은 잠시 뜸을 들인다.

그런데 큰손주인 성신 씨가 노름을 해서 굉장히 어려워졌어요. 저희 아버님은 머슴살이를 해가지고 저희를 먹여살리고 그러셨어요. 그 양반은 아들 삼형제, 딸 둘 그렇게 두었는데 딸은 모두 양반집으로 혼인을 시켰어요.

집안사정이 어려워 6촌 항렬간에 혼자만 고등학교를 다녔다는 이기엽은 학교 다닐 때의 기억을 떠올리는 듯 지그시 눈을 감는다.

그때 당시 재산도 없어지고 허니까 저희 아버님은 서당도 한 철인가 다니고, 그 위 백부님들은 배우지를 못했어요. 그래서 제가 6촌 항렬간에 모처럼 고등핵교까지 나왔어요. 면사무소와 수리조합에서 근무하다 1967년부터 행정대서업을 허는데 조부님이 계셨다면 백부, 중부님, 아버님 모두 글을 배우셨을 테고, 이어서 우리들도 공부를 제대로 했을텐데 이 양반(아버지)이 못배워노니까 우선 재산도 없어서 제가 굉장히 고생을 하면서 학교를 다녔어요.

그래도 고등학교라도 다닌 덕분에 면사무소에도 다녔고 행정대서업을 할 수 있었다는 손자 이기엽은 이제 할아버지의 행적을 제대로 복원하고 집안에 별일 없기를 늘 기원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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