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임천서 (林天瑞)
1864~1894. 12. 27. 조양(兆陽) 임씨. 보명(譜名) 종문(鍾文). 어릴 때 전봉준과 동문수학한 임천서는 고창의 접주로서 활약하였고, 농민전쟁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어 지한리에서 말 네 마리에 팔다리가 묶여 찢겨서 죽었음.
임판기
1938~ . 보명 경환, 정부양곡을 관리하다가 크게 손해를 보고 그 이후로 노동일을 하면서 살아감.
우윤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
고창군 고수면 인성리에서 태어난 임천서는 어릴 때 전봉준과 동문수학을 하였단다. 전봉준이라면 농민전쟁에서 큰 지도자로 활약한 인물이다. 그런 인연에서인지 전봉준이 농민전쟁 전에 자주 임천서의 집에 왔다고 하는데 사실 임천서는 동학교단 쪽의 기록(『천도교서』와 『천도교회사』초고 등)에 실릴 정도로 농민전쟁이 일어날 무렵 교단에서는 꽤 비중있는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전봉준이 기병에 관해 상의하러 들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증손 임판기의 증언을 들어보자.
그 양반이 동학 이전에는 그러니까 증조할아버지하고 전 장군하고 동문수학을 했는디 어떻게 저 양반이 정읍사람이라고 행세를 하는가 그런 얘기를 몇 번 들었어요. 동문수학을 하면서 전장군이 우리집에 와서 혁명 전에 살다시피 했대요.
그런 전봉준 장군인데 어찌 정읍에서 농민전쟁 기념행사를 할 때 전봉준을 정읍사람 취급하는지 약간은 불만이 있단다. 그러나 이는 전봉준이 정읍 출신이라기보다는 농민전쟁이 본격적으로 출발한 곳이 백산(1894년 3월 25일 백산기포)이며 전봉준이 농민전쟁 직전에 살았던 곳이 정읍군 이평면 조소마을이었음을 기리는 뜻이 아니겠는가.
제가 아버지하고 할머니한테 들은 얘긴데요. 해마다 사월 초파일날 정읍농고에서 녹두장군 기념행사를 했거든요. 근디 어떻게 해서 정읍사람이라고 정한 거냐. 우리 증조할아버지하고 전 장군하고 동문수학을 했는디 어떻게 저 양반을 정읍사람이라고 하는가 그런 얘기를 몇 번 들었어요.
오지영의 『동학사』에 보면 고창의 대접주로 활약한 임천서는 손화중 대접주의 포에 속해 있었고, 고창에서 상당수의 인원을 거느리고 백산으로 달려간 것으로 적혀있다. 그때 백산 주변은 농민군의 통문을 보고 몰려오는 행렬로 장관을 이루었다고 하며, 이리하여 집결된 농민군의 수는 약 8천여 명. 『동학사』에 실린 그 부분을 옮겨보자. IMGSOURCE="prw_067"/IMGSOURCE
임천서는 전쟁에 참가하면서 가족들을 사돈이 사는 동네에 옮겨놓고 떠났던 것 같다. 그런데 이 부분은 증손 임판기의 증언이 맞는지 아니면 농민전쟁에서 밀릴 무렵 피신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하여튼 가족이 피신해 있는 곳을 임천서가 가끔 들렀다고 한다.
그때는 피신한 우리 가족이 전부 사돈의 동네, 긍게 할머니 친정 뒷집에 살았어요. 바로 뒷집에 사니까 증조부가 오며는 대원들이 2, 300명씩 같이 온대요. 와 가지고 거기서 쉬었다가도 가고 하루 저녁씩 자고도 가고 그렇게 하고 다녔다고 얘기해요.
임천서는 전봉준과 동문수학한 특별한 관계일 뿐만 아니라 전봉준 노선을 지지한 고창접주로서 전봉준과 공주 전투에까지 참가했다가 후퇴하였음을 증손 임판기는 들은 대로 옮겨준다.
이런 얘기도 하대요. 전준가 어디까지 가다가 밀려왔다고 그런 얘기를 들었어요. 전주까지라고 한 것은 할머니가 한 얘기가 아니고 문중 어른들이 시제 지낼 때 동학란에 대해서 가끔 얘기하면서 전주 어디까지 올라가다가 거기서 일본 사람들한테 다시 밀려서 내려왔다는 얘기를 자주 하대요.
증손 임판기가 말하는 전주는 전주가 아니라 공주일 것이다. 농민군은 오히려 전주를 점령했지 전주에서 패하여 후퇴하지 않았고, 또 그 때는 농민군과 일본군이 서로 싸울 때도 아니었다. 농민군은 11월 9일(양력 12월 5일)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에 밀려 공주를 눈앞에 두고 퇴각하여야 했다. 논산 황화대에서 정부·일본 연합군의 추격을 저지하려고 전투 대형을 가다듬었으나 황산벌의 매서운 바람마저 농민군을 세차게 몰아붙였다. 전봉준 휘하의 농민군은 전주성으로 퇴각했다가 11월 23일 전주성을 나서 금구현 원평으로 내려갔다. 이후에도 원평과 태인에서 전투가 있었으나 농민군은 전세를 역전시킬 수 없었다. 그 후 피신에 오른 임천서의 행적을 증손 임판기의 증언 속에서 찾아보자.
나중에는 패하여 병사들이 다 분산되고 혼자 당신 사둔네 집으로 피난을 온 거지유. 거기서 잽혀 가지고. 이 양반이 붙들려 가실 때 목격하신 사둔들이 말하는디, 붙들려 가셔서 말 네 마리에다가 팔다리 하나씩 묶어가지고 찢어서 죽였데요. 그 양반이 어디서 돌아가셨냐 하면 우리 동네에서 한 24킬로 떨어진, 저 법성포 가는 데 지한리라고 있어요. 거기 지한리 다리에서 찢어서 죽였어요. 일본사람들이.
사돈 집에서 체포되어 끌려간 임천서는 법성포 가는 길에 있는 지한리 다리가에서 처참하게 죽었는데, 그때 임천서의 나이 서른한 살이었다. 임천서가 잡혀간 후 소식을 기다리던 가족들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눈앞이 캄캄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저앉아 있을 수 없어 시신이라도 수습하고자 지한리로 달려갔다.
일본사람들한테 붙들려 간 후에 아무런 소식이 없었는데 그 동네사람들이 그것을 목격하고 우리집에 연락을 해가지고 그 양반을 모셔왔지요. 지금 그 양반 산소는 여기 석우촌(石隅村)에 있지요.
임천서의 참혹한 죽음은 임씨 집안에 닥친 불행의 시작일 뿐이었다. 보복의 총구는 다시 임천서 형의 집으로 향했다. 때문에 할머니는 누구에게도 그런 사실을 입밖에 내지 말도록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는데…
동학란에 대해서 할머니가 몸서리를 치면서 절대 그런 얘기는 하지 말라고 그래요. 그리고 천자 서자 할아버지 형님댁이 다 몰살당했지요. 이 양반은 내빼버린 게 못 찾고 그냥 큰 집이 거가 있으니까 그 집 식구들을 데려다가 일본사람들이 총으로 쏴 버렸지.
그래서 가계도에서 종우 밑으로는 아무도 없다. 그런 참변을 당한 임씨 집안은 그 후 고창군 상하면 장호리로 이사하였다.
고창군 고수면 인성리서 살다가 왜정 때 고창군 상하면 장호리 510번지로 이사를 했지요. 저는 피난 와 가지고 장호리 510번지에서 태어났죠. 그리 이사한 동기는 조부님 처가(함평 노씨)가 진사댁이에요. 할아버지는 보지도 못했고 할머니는 제가 모시다가 이제 돌아가신 지가 한 20년 돼요. 할아버지는 일본사람들에게 쫓겨와가지고 진사댁(사돈집)에서 피신하다가 일본 사람들에게 붙들려 가지고 학살당했어요. 거기서 살다가 제가 1979년에 인천으로 이사를 왔지요.
장호리에 살 때 증손 임판기는 호구지책으로 정부양곡을 관리하면서 살았다. 그런데 그에게도 커다란 시련이 다가올 줄이야 그때의 기억을 되짚는 임판기의 얼굴은 순간 어두워진다.
장호리서는 정부양곡 관리를 했어요. 그때 사람을 잘못 둬가지고 벼 한 2천 가마를 물에 섞어버렸어요. 그래 가지고 그 벼를 어디로 출하를 했냐면은 도정 공장[고려대학 재단, 당시는 삼양사] 그리 출하를 하는디 그때 장마가 졌어요. 장마가 져갖고 물이 들어가서 섞이는 걸 그 사람이 몰랐어요. 그것이 출하 당시에 발견이 돼갖고 그 한 2천 가마 썩혀갖고 변상하는 디. 말도 못했어요. 전 재산 있는거 삼양사에다 다 털어 바쳐분지고 애들을 가르칠래야 가르칠 도리가 있어요? 그래서 제가 노동일도 별로 해보지 않았는데 여기에 와서 순 노동일로 해서 애들 교육을 시켰어요.
그리고 한국전쟁 때도 임씨 집안은 꽤 고생을 했다. 증손 임판기의 말을 빌면 “우리 집은 계속 전쟁만 겪은 집이라니께”라고 할 만큼 근현대사의 격변이 이 집안에 몰려온 것 같다.
6·25가 터져가지고는 아버지가 고생을 겁나게 했어요. 빨치산들한테. 옛날에 하인 그 자식들이 여지껏 못된 짓들을 했어요. 6·25 때는 제가 그 때 국민학교 2학년때이었나 그랬거든요. 빨갱이들 와 가지고 집을 완전히 불질러 버렸어요. 그래서 윗분들의 옷이고 뭐고 남아 있는 게 없죠. 그러니 우리집은 계속 전쟁만 겪은 집이라니께. 그런데 외가집 사람들이 똘똘했지요. 왜정 때 대학교도 나오고 그 양반들 힘으로 살았지.
그래도 증손 임판기의 머리에는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있단다.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다. 그 할아버지가 삼국지를 외울 정도로 머리가 좋았는데 뒷날 사람이 달에 간다고 예언까지 했단다. 물론 그 예언은 신통하게 들어맞은 것이다.
동네 사람들 말 들어보면 할아버지가 일본사람들을 굉장히 미워했대요. 지금도 동네에서 그런 소리를 해요.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은게 할아버지 얼굴도 모르는데 이 할아버지가 천재라 삼국지를 이 양반이 외왔다고. 또 그 양반 말씀이 뭐라고 하냐면 우리 생전에는 달나라를 가는 걸 못 보는디 우리 후손 때는 달나라 가는 사람 있을 거라고, 그러면 동네사람들이 저 노인양반 돌아가실려고 헛소리한다고 옆에서 그런 소리 했대요. 그러면 쓸데없는 말 말라고 두고 보라고 그런 소리를 했대요.
그러한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떠올라서일까 아니면 증조부 임천서에 대한 증언록을 만든다는 기대 때문에서 일까 오랫만에 증손 임판기의 얼굴이 밝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