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최장현(崔璋鉉)
자는 문빈(文彬), 호는 민재(敏齋).
자는 선영(善永), 호는 청파(淸波).
자는 병현(炳鉉) , 호는 춘암(春菴).
최석봉(崔石奉)
1922. 12. 27~ . 일제시기에는 평양에서 무연탄주식회사에 다녔으며, 지금은 고향에서 잡화점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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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항섭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
최장현, 선현, 기현은 종형제간으로 함께 농민전쟁에 가담하였다가 같은 날 체포되어 같은 날 유명을 달리 하였다. 최장현의 할아버지 때부터 지금의 전남 무안군 해제면 석용리 540번지에서 살았으며, 그 후손들도 대를 이어 같은 곳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석용리는 예나 지금이나 사는 가호가 얼마 되지 않으며, 현재 살고 있는 가호의 대부분은 최씨 집안 사람들이었다. 농민전쟁 당시 최장현 형제 집안의 경제규모는 대체로 중농 정도였으나, 최장현의 아버지는 유교적 소양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집안 살림은 괜찮았어요. 머슴도 데리고 살고 그때 당시에 전답을 쭉 우리 때까지 벌었습니다. 밭이라는 것은 말할 수 없이 많았는데 한 서른 마지기도 더 되얐을 것입니다. 그리고 논도 우리가 쭉 물려(받아)온 것이 열두 마지깁니다. (증조부는) 학자셨습니다. 이 한아버지들[최장현 형제]도 문장이 아주 좋았더랍니다. 세 분 다 문장이 좋았어요.
최장현 형제가 농민전쟁에 가담한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전라북도까지 갔다”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농민군들이 4월 중순경 함평, 영광 일대로 내려와 무안 지역에까지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을 때 참가하여 4월 말 전주에 입성할 때도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장현 형제는 동학교도였으며, 그 후손들은 김연국(金演局)의 시천교(侍天敎)와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그러니까[동학교도니까] 생명을 걸어놓고 나갔지요. 그리고 무슨 교가 있었더랍디다. 시천교란 말을 들었습니다. 시천교라고 우리 작은아버지들이 뭘 왭디다. 손을 이렇게 하면서 그렇게 허시더라고. 작은아버지들 말씀이 동학이 전술이 좋았었다고 그래요. 왜 그러냐허먼 허재비를 맨들아가지고 자꼬 총을 쏘며는 총을 맞어가지고 꺼꾸러지는 것같이 탁 엎어졌다가 다시 세워가지고 기어가면서 총을 쏘고 이렇게 해서 상당한 전과를 올렸더랍니다.
최장현 형제가 체포된 때는 농민전쟁 막바지인 동짓달이었다. 이들은 관군과 일본군이 압박해 오자 일단 몸을 피해 함평에서 은신하고 있었으나, 많은 농민군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밀고를 당해 체포되었다.
증조부가 그때 말렸는디 부모님 말씀도 거역허고 사촌간들이 국가를 위해서 나선다고 해가지고 아조 적극적으로 생명을 걸어놓고 싸우다가 완전히 해체가 되는 바람에 이 양반들이 피신을 해버렸답니다. 그때 우리는 생겨나지도(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어르신네들이 허시는 말씀을 들어보면 일본사람들한테 얼마나 곤욕을 치렀든고, 동지섣달에 눈이 그렇게 왔어도 우리 한아버지들을 잡을라고 우리집에 왔더라요. 우리집이 저 너멉니다. 양복입은 사람들을 수비대라고 했더랍디다. 얼마나 무섭게 했던지 일본사람들하고 그때 당시에 정부군허고 협작해서 거시기를 했답디다. 동학을 잡을라고. 그 눈길속을 뒤로 걸어가면서 발자국을 (거꾸로) 내고 저너머 마을로 피신을 했었더랍니다. 함평 어딘가에 은신해 있었는디, 홍씨 그분이 알고서 밀고를 해가지고 우리 한아버지들이 잽혀버렸던 것입니다.
이들을 밀고한 것은 같은 고을의 홍씨였는데 여기에는 당시 향권(鄕權)을 둘러싼 향촌사회 내부의 갈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최장현의 형제는) 함평향교까지 댕겼더랍니다. 임치에 성안이라고 있습니다. 그 성안은 서해지구 군인들이 있는 뎁니다. 그런디 거기 온 책임자가 참사여요. 참사도 큰 벼슬인디 우리 한아버지들이 탁 나섰다허먼 그 참사가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고 또 사람을 시켜가지고 ‘말 좀 보내라’ 그러면 말까지 보내줘서 참사 말까지 타고 출입을 허시고 그렇게 했답니다. 참사도 참사지만 (면에서도 영향력이 커서) 면에서 일을 다해놓고도 (증조부께서) 이러 이렇게 다시 하라고 지금 같으면 감사(監査)를 해줬던 가비. 근데 그때 당시 면행사를 홍씨들이 좌우했던 것입니다. 우리 한아버지들한테는 꼼짝달싹을 못허니까 한이 되었던 것이어. 그러니까 그분들이 우리가 듣기로는 할아버지들을 모략을 했어. 그래서 돌아가셨어요. 지금까지도 그분들하고 혼인을 하지 않습니다. 홍씨들 집안에서도 그것을 알고 있고, 그 쪽에서 근자에 와서 사과를 했습니다. 그때 당시 자손들은 현재 여기에 살지를 않아요. 다 떠나갔어. 그래도 우리 가슴에 못이 백혀서 현재까지 혼인을 않고 있어요.
잡혀간 최장현 형제들은 함평에서 나주로 이송되었고, 나주에서 정식 재판도 받지 못한 채 처형되고 말았다.
우리 작은아버지가 따라다니셨는데 재판이 아무 상관이 없고 안하무인격으로 무조건 그렇게 학살을 해버리고. 우리 한아버지들이 싸우다가 생포로 잽혀가지고 처음에는 함평으로 갔는데 함평서 나주성으로 데려갔던 것입니다. 그런디 안자 식자라고 우리 작은아버지(최장현의 둘째아들)가 열다섯 살 때 우리 한아버지들이 함평에 잡혀 있단 말을 듣고 거그서 세분들을 구완했어요. 나주성으로 (잡혀) 간다고 허니까 열다섯 살 먹은 어린 양반이 할아버지들을 따라가서 돌아가시는 데를 봐야 쓰것는디 따라갈 길이 없어요. 어른들이 말씀하시기를 작은아버지가 대장을 잡고 몸부림했다는 거여. 우리 아버지, 우리 작은아버지 모두 이렇게 잡혀 나주성으로 간다는디 가셔서 돌아가실 때 내가 참여를 좀 해야쓰것소 허니까. (대장이) 절대 못헌다. 그 성[나주]에는 못 들어간다. 그러나 어린 사람이 성의가 참 지극허다. 니가 꼭 그 성을 들어갈라면 니그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자리에 참여할라면 내 말고삐를 잡고 나를 따라가자. 그래가지고 그 대장의 말고삐를 잡고 나주성을 갔더랍디다. 그때 (구덩이를) 뱅 돌려서 한 몇 질 되게 팠어요. 그런디 거그다가 장작을 내놓고 불을 지르고는 내려가서 장작 우에 가 섰거라 해가지고 총살을 해버리더랍니다. 그러니까 우리 작은아버지께서 어린 사람이 그 불 속에 뛰어들어갔어요. 들어가서 우리 한아버지 먼저 업어서 질로 내놓고 또 불속에 들어가서 당신 작은아버지를 업어서 내놓고 나니까, 이제는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더라여. 그때는 완전히 불덩어리가 되어서. 그래서 이 양반[미처 시신을 구해내지 못한 최기현]은 시체가 없이 겉묘만 써져 있습니다.
최장현 형제가 죽임을 당한 후 남은 사람들의 고초는 컸다. 관으로부터 가혹한 시달림을 받았다. 그 결과 똑똑하여 ‘국가’를 알면 화를 입는다는 이유로 후손들에게는 글조차 가르치지 않을 정도로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때 당시에 일꾼을 데리고 산에 가서 나무를 해서 집채같이 쌓아놓고 겨울에는 그놈을 때고 살았어요. 그런데 우리집에 이 놈들이 오면은 그 나무뼘에다 불을 놓아 집에다 불을 질러 부렀어요. 사람이 못살게끔. 이런 정도였으니 얼마나 놀랬겄습니까. 당시에 어떻게 놀래버렸든지 우리 집안에서 그 후로는 글을 안가르쳐 버렸습니다. 우리 한아버지들한테 놀래가지고. 그래 가지고 우리 후손들은 글이 없어져 버렸어요. 묵밭이 되어버렸어요. 글을 모르면 국가고 뭐고 모를 것이다하고. 우리 작은아버지, 우리 때까지도 전혀 안가르쳐 버렸어요. 족보도 전부 날짜를 틀리게 맨들아버리고. 그 후로 아마도 숨킬라고 그랬었던 모양이어. 어떻게 무섬을 타버렸던고 돌아가신 날짜가 한날 한시에 돌어가셨어도 각각이 틀리게 맨들었어. 우리 작은아버지가 다 보셨으니 까 작은아버지들한테 그 말을 들었습니다. 내가 그것을 역력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열다섯 살 때 시체를 업어내신 안자 식자 양반이 항시 저보고 하는 말이 “석봉아 그때 불속에 뛰어들어 화가 들어서 나는 얼마 못살것다” 하시더니 돌아가시기 전에 불러서 갔더니 “나는 화가 들어가지고 죽겄다”고 하셨습니다.
후손들은 비록 글은 배우지 못했지만, 이렇게 모진 고초 속에서 어느 누구 못지않은 강한 ‘민족의식’을 체득하였으며, 생활이 어려웠을 때도 일본인에게는 전답을 절대 팔지 않았고, 일제시기에는 마을에서 농악 놀이하는 것도 극력 반대하였다고 한다.
왜정시대에는 일본놈들한테 팔아먹었습니다마는 우리는 절대 팔지를 않았습니다. 그랬다가 내 때 와서 상업을 허다가 내가 완전히 전답에 집까지 팔아 먹어버렸습니다. 우리 한아버지들이 그렇게 돌아가시니까 우리 마을에서 명절에 금구[농악]를 못쳤더랩니다. 어디서 금구소리만 나면 우리 아버지가 그냥 몽둥이 갖고 가서, 네 이놈의 자식들 우리가 이렇게 일본사람들한테 참혹한 일을 당했는디[할아버지들이 돌아가셨는디] 무슨 낙으로 금구를 치냐. 그래가꼬 중간에까지도 어른들이 이런 말씀을 하십디다. 그마만큼 우리 아버지, 작은 아버지들이 가슴이 아펐더랍니다.
이제는 “갈쳐야 쓴다 해가지고 집안에서 면장도 생기고 고등학교 교장도 생기고” 했다. 그러나 아직도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할아버지들의 원혼이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데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우리 한아바지들이 국가를 위해서 이렇게 돌아가셨는디 어따가 대고 하소연할 데가 없어요. 참 그런 말을 허먼 자손으로서 비참허기가 짝이 없습니다. 그런디 못난 우리로서는 근거가 없고, 근거만 있으면 그것을 어디까지나 국가에 가서라도 항의를 허것는디 근거가 없단 말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