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황화성(黃化性)
?~1894. 5. 3. 고창군의 농민군으로서 전주성 전투에 참가하였다가 5월 3일 관군의 총탄에 맞아 절명함.
황일제(黃-第)
1935. 10. 9~ . 보명은 선일. 농사일에 종사.
1955. 2. 1~ . 보명은 순창. 상당히 넓은 개간지에 특용작물 농사함. 작물연구에 열심이고 부지런하다는 평이 동네에 자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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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윤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
황화성은 고창군 상하면 갈산리에서 살았는데, 그 윗대에는 상당한 지주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농민전쟁 이후에는 구걸까지 해야 했다는 집안의 역사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을 오간 듯하다. 그때를 회상하느라 손자 황일제 노인은 건너 산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다음과 같이 들려준다.
고창군 상하면서 요리 온 지는 불과 30년 못 됐어요. 조부님은 농사를 지으셨대요. 힘이 다 좋았다고 하대요.
옆에서 증손자 황동우가 거든다. “고조부께서 십리 안통에서 남의 땅을 안 딛고 살았대요. 그리고 농사를 직접 지으셨대요. 그때까지는 살림이 괜찮았겠지요. 그러고나서 동학에서 돌아가시고 난 뒤에 증조할머니가 할아버지 기르실 때는 구걸까지 하고 살았답디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손자 황일제 노인은 “관(官)에서 뺏어갔다는 말은 못 들었고 어떻게 된 줄은 모른대요”하며 난리통에 그 많던 재산이 어디로 간지도 모르게 잃었다는 것이다. 난리통에 잃은 것은 재산만이 아니었다. 관의 수색과 주변의 눈총으로 잠시 몸을 피했던 황일제의 작은할아버지가 위도(부안군 변산반도 건너편 섬)에서 한번 소식이 있고나서는 여태 소식이 없단다.
우리 작은할아버지가 같이 살다가 사시지도 못하고 얘들 데리고 나가셨는디 어디 가서 사신중도 모르고 지금까지 그 손까장도 일절 찾덜 못허고 있습니다. 위도에서 한번쯤 소식이 왔었어요.
할아버지가 농민전쟁에 참가하여 돌아가시자 할머니는 오직 유복자만을 데리고 그 험난한 세월을 헤쳐 나갔단다.
저희 할머니(24살에 홀로 되심)는 아무도 없고, 유복자로 태어난 아버지(황치진·1895~1963)를 데리고 사시면서 푸댓자루 가게까지 하시고…
다행히 황화성의 아들(황일제의 부친)이 건장하고 힘이 세어 집안일을 충분히 이끌어나갈 만했고, 또 소금을 불에 굽는 직장(죽염제조인듯)에 다녀 차츰 집안형편이 나아졌다고 한다. 그리고 일찍 혼자되어 자식만 바라보고 살았던 할머니의 열녀비를 진외가댁에서 세워줬단다.
아버지의 건강으로 인해 가지고 밥은 먹고 살만치 살았어요. 상하 갈산 마을 앞에 염전이 있었대요. 소금을 불로 굽는데 거그 다니면서 벌고 어찌고 해서 살기는 괜찮았어요. 할머니 열녀비를 아버지 16살 때 진외가에서 세워주셨지요. 할머니는 밀양 박씨시고 영광군 홍농면(弘農面)에서 시집오셨대요.
뿐만 아니라 아들 손자들이 모두 윗대 어른들의 체격을 그대로 물려받아 몇 사람 몫을 거뜬히 해내어 이제 생활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고 옆에서 전해주는 황일제 노인의 내외종 사촌이다.
지금은 이 동네에서는 잘 살지요. 동생, 조카 신체가 문제가 아니예요. 아조 거대했습니다. 골격이 제대로 생기고 힘도 뭐 굉장히 세시고. 그때 가뭄 들어가지고 논에서 벼를 비었는데 알만 싣고가서 다섯 가마니 나왔다는데 그 무거운 짐을 저 어르신이 혼자 지신 분이예요. 또 저 조카애(황동우)가 근실하고 현실적인 두뇌를 가지고 있어서 순전히 농사지어서 살림을 많이 일으켰어. 개간지 땅이지만 몇만 평 가지고 있어요. 대표적인 시골 부잡니다. 약초 같은 것을 심지요. 콩이나 깨는 안하고.
그러면 황화성은 어느 전투에 참가하여 전사한 것일까. 마침 황화성과 같이 참가했던 집안의 어른이 있어 그때의 사정을 소상히 알고 있다는 황일제 노인의 말을 들어보자.
아버님이나 다른 분들이 말씀허시기를 전주싸움에서 돌아가셨다고 해서 돌아가신 날짜만 알고 제사만 지내고 있다고 합디다. 그런데 정읍문화원에 가서 5월 3일날 돌아가셨다고 허니까 대번에 알대요. 전주 덕천 싸움에서 돌아가셨구만 하대요. 그때 할아버지는 집안어른과 같이 참여를 했는데 그 양반이 형되던가 봐요. 전주에서 싸움이 흐트러가꼬 오는 도중에 길가에서 총맞아가지고 형님하고 부르는데 본께 동생이더라고. 그런데 당신이 데리고 올 수도 없는 문제고 그래서 한 발짝 길가에서 산으로 치워놓고 왔다고 그런 얘기를 해서 그 날짜가 돌아가신 날짠가 알았어요. 갑오년 5월 초사흘날이요.
황일제 노인의 부인(김화순 씨)이 옆에서 거든다. 벌써 여러 차례 들은 내용이라 눈에 그리듯 자세하다.
그 노인양반이 옥동 양반인데, 오셔서 그런 말씀을 하시대요. 근디 총맞어가꼬 성님허는디 돌라본게 피흘려 죽게 됐는데 어쩌게 델꼬 오도 못 허고 돌아가셨다고 허대요. 시집 와서 여러 차례 들었지요. 그래서 그런지 어디서 들어보면[점을 쳤다는 뜻] 갑오동란 때 할아버지가 그 피를 흘리면서 죽어 제사날도 집에 못 들어오고 밖에서 돌아다닌다고. 그래서 집안이 되는 일도 없고 별로 안 좋다고 하대요. 지금으로 치면 장군이나 마찬가진 데 그런 분을 왜 안 찾느냐 무당들이 그런 말을 해요. 지금도 그 피묻은 옷을 입고 있으니까 옷 한 벌 해주라고 해서 옷도 두 벌이나 해드렸지요. 옷을 갈아입혀야 집에 들어온다고…
할아버지를 찾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이런저런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여야 했던 황씨 집안인데, 그때 황화성의 행적을 조금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그런 한이 풀릴 수 있을까. 어쨌든 그때 전주에서 벌어진 전투장면들을 기록에 근거하여 정리해보자. 양호초토사 홍계훈이 농민군을 추격한다면서 군사를 이끌고 전주성을 나갔다가 장성에서 한번 깨어지자 겁을 먹고 느릿느릿 농민군의 꽁무니를 따라오다가 원평에 이르렀을 무렵, 이미 농민군은 전주성 남문이 내려다보이는 용머리고개에 도착하여 하늘이 떠내려갈 듯한 함성을 지르며 전주성의 서문과 방문을 향해 돌격하고 있었다. 농민군의 가슴은 벅찬 감동으로 끓어올랐고 창을 꼬나쥔 주먹은 부르르 떨렸다. 이 때 황화성도 농민군 대열에 있었으리라. 이때가 4월 27일. 농민군은 성난 파도처럼 전주성을 덮쳤다. 전(前) 감사 김문현은 사대문을 닫고 서문 밖 민가 수천 구역을 불태워 적의 공격을 끊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한낮이 되자 서문이 저절로 열리면서 농민군은 물밀듯이 성안으로 몰려들어갔다. 이에 감영군은 포 1발만 응사하고 궤주(潰走)하였으며, 더이상 버틸 수 없음을 느낀 감사는 사인교를 타고 동문으로 달아났으나 문이 열리지 않아 교자를 버리고 떨어진 옷과 짚신을 신고 피난가는 난민 속에 끼어들어 이십 리를 도망갔다. 농민군은 전주성에 들이닥쳐 손쉽게 점령하고 전주성 위에 농민군의 깃발을 꽂았다. 28일에는 홍계훈의 경군이 접근해옴에 따라 삼천 주변에 남아서 후방을 경계하던 농민군이 모두 전주성으로 들어왔다 호남 제일성 전주성. 농민군은 드디어 전주성을 점령하고 호남 제일의 거점을 확보했다. 이때의 상황을 오지영의 『동학사』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 이때는 4월 27일 전주 서문 밖 장날이라. 무장, 영광 등지로부터 사잇길로 사방으로 흩어져 오던 동학군[농민군-인용자]들은 장꾼들과 함께 싸이어 미리 약속이 정하여 있던 이날에 수천 명의 사람들은 이미 다 시장 속에 들어왔다. 때는 오시(午時)쯤 되자 장터 건너편 용머리고개에서 일성의 대포소리가 터져나오며 수천 방의 총소리가 일시에 장판을 뒤엎었다. 별안간 난포(亂砲) 소리에 놀란 장꾼들은 정신을 잃어버리고 뒤죽박죽이 되어 헤어져 달아난다. 서문으로 남문으로 물밀듯이 들어가는 바람에 동학군들은 장꾼과 같이 섞여 문안으로 들어서며 한편 고함을 지르며 한편 총질을 하였다. 서문에서 파수 보는 병정들은 어찌된 까닭을 몰라 엎어지고 자빠지며 도망질을 치고 말았다. 삽시간에 성안에도 모두 동학군의 소리요 성밖에도 동학군의 소리다. 이 때 전대장(전봉준-인용자)은 천천히 대군을 거느리고 서문으로 들어와 좌(座)를 선화당에 정하니, 어시호 전주성은 함락이 되었다.…
호남 최대의 관문이자 호남의 심장부인 전주성을 점령하였다는 것은 농민군으로서는 빛나는 승리 - 병 및 농민전쟁 전과정 중 최대의 전투성과였다 - 였으며, 그 후의 집강소 설치, 폐정개혁안의 실시 등의 큰 성과를 약속해주는 확실한 담보였다. 그리고 농민군의 최종 목표인 서울 진격을 위한 가장 튼튼한 발판을 마련한 셈이었다. 전주성을 점령한 전봉준은 선화당에 지휘본부를 정하고 농민군을 성의 4대문에 분산배치시키고 홍계훈의 공격에 대비케 하였다. 군령을 엄하게 다시 확인시키고 농민군의 투지가 불타게 했다. 그리고 전봉준은 성안의 부녀자들을 비장청에 모이게 하여 징발한 포목을 나누어주고 농민군의 군복을 만들게 하였다. 그때 농민군이 입고 있던 옷은 무장기병 당시 입던 옷이어서 무더운 초여름 날씨에는 불편했기 때문이었다(김재홍의 『영상일기』). 홍계훈의 경군은 전주성이 함락된 하루 뒤에 용머리고개에 도착하였다. 경군은 완산, 다가산, 사직단, 유연대 등 주변 산과 골짜기를 연결하여 진을 치고 포열을 폈는데 아영(牙營)은 용머리고개 남쪽 산구릉에 두었다. 그리고 경군은 성안을 향해 대포 3발을 시험삼아 쏘아댔다. 이 때 경군의 병력은 1,500여 명 안팎이었다. 이날 오후 농민군은 선제공격을 날렸다 농민군은 남문을 나가 빙 돌아 도무봉의 경병을 공격하였다. 농민군은 하얀 포장(布帳)으로 앞을 가리고 뛰어올라갔다. 이어 서문에서도 농민군이 뛰쳐나와 경군을 공격했고, 성안의 농민군은 성루 위에 올라 대포와 총을 일제히 쏘았다. 이들 농민군은 빗발치는 탄환 숲을 뚫으며 장태를 밀고 돌진해갔다. 농민군은 경군과 한바탕 싸움을 벌이고 큰 전과 없이 성안으로 철수하였다. 29일 다시 농민군이 북문으로부터 나와 황학대를 공격하자 경군은 회전기관총으로 올라오는 농민군을 마구 쓰러뜨렸다. 농민군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성안에서는 철군의 신호를 보내어 농민군을 성안으로 불러들였다. 30일에는 성문을 굳게 닫고 출격하지 않았다. 5월 1일 날이 밝았다. 경군은 성안이 어제부터 조용하자 초조해졌다. 홍계훈은 성안 사정도 살필 겸 아침 일찍 효유문을 뿌렸다. “너희들은 나라의 적자로서 전봉준의 허황된 꼬임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빠져 여기에 이르렀으니 안타깝도다.… 전봉준을 잡아다바치는 자는 위에 보고를 올려 상을 내리고 모든 것을 용서해주겠노라.” 이런 효유문이 성안에 날아들자 전봉준은 단호한 결의를 보일 필요가 있었다. 오전 10시쯤 농민군은 남문을 나가 미전교(米廛橋)를 건너 군대를 남·북 2대로 나누어 완산주봉의 경군을 목표로 돌진하였다. 남쪽 1대는 남고천을 건너 곤지산 서쪽 벼랑의 골짜기에서 공격하였고 북쪽 1대는 전주천의 왼쪽 언덕에서 완산정을 지나 위봉에 올라가서 매곡(梅谷)을 사이에 두고 위봉 서쪽의 검두봉에 포진하고 있는 경군을 공격하였다. 농민군은 검두봉의 경군을 짓밟고 본영을 때려부술 계획이었다. 매곡을 경계로 위봉과 검두봉 사이에서 일대 접전이 벌어졌다. 농민군은 수십 명씩 무리를 지어 하얀 포장을 앞세우고 수백 개의 사다리를 옆에 끼고 등에는 탄환을 막아준다는 황색종이에 붉은 글을 쓴 부적을 붙이고 입으로는 연방 ‘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라는 동학주문을 소리 높여 외치면서 가파른 산정을 향해 올랐다. 경군은 농민군의 요란한 공격에 압도되어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싸움이 치열해질수록 양군의 시체는 매곡의 골짜기를 메웠고 전주천은 붉게 물들어갔다. 검두봉 위의 경군이 패퇴의 기색을 보이자 후방 완산에 있던 강화도군이 급히 산을 내려와 응원하였다. 경군은 겨우 패퇴를 면하고 농민군은 전세가 역전되자 성안으로 돌아갔다. 이때가 오후 4시경이었다. 5월 2일 경군은 어제의 전투를 보복이라도 하듯 완산 위에서 쿠르프야포, 회전기관총으로 성안을 계속 포격하였다 그러나 정작 포탄은 성 안에 닿지 않고 처음에는 서문 밖 민가를 때려 불태웠고, 다음에는 남문 밖 민가를 부수어 놓았다. 실컷 분을 풀고 나서 홍계훈은 “평민들은 협박에 못이겨 따른 자들이니 각기 주소성명을 적은 책자를 바치고, 감영의 교리·노령도 역시 목숨을 구하려고 어쩔 수 없이 협력한 자들이니 각기 자신들의 직위를 표시해 본진에 와 대령하라”는 전령을 내걸었다. 그리고 농민군이 의외로 강하게 버티자 홍계훈은 순창과 담양에 전령을 보내 포군(砲軍) 300명을 3배도기(三倍道起 : 평일의 3배 속도)로 4일까지 유진소에 보낼 것을 명령하였고, 그밖에 각 읍에도 같은 전령을 보내어 금구에 20명, 태인에 20명, 김제에 30명, 고산에 30명, 익산에 30명, 임실에 30명을 배당하였다. 드디어 5월 3일 날이 밝았다. 황화성은 이날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알고 있었을까. 오히려 황화성은 가벼운 차림으로 출격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전봉준은 증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경군을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전봉준은 농민군을 직접 이끌고 오후에 북문과 서문을 나섰다. 어린 장사 이복용이 선봉장이 되어 출진한 농민군은 사마교와 그 밑의 장대보(將臺洑) 부근에 있는 비석전에서 멀리 서쪽 최고봉 유연대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인간사슬이 되어 완산의 경군을 에워싸듯 공격하였다. 이날 농민군의 군장과 위용은 1일의 공격 때와 다르지 않았고 이를 본 경군은 간담이 서늘해져 지레 겁을 먹어 남쪽으로 도망해 갔고 농민군은 이를 추격하여 쉽게 다가산을 점령하여 홍계훈의 본영으로 육박해갔다. 경군은 우수한 화력으로 필사의 반격을 펼쳤다. 농민군은 지휘관 김순명과 어린 장사 이복용 그리고 5백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전주성으로 퇴각하였다. 이때 황화성도 퇴각하는 농민군 무리에 끼었을 것이고 그러다 5백여 명의 사상자 중에 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전봉준 역시 왼쪽 허벅지에 총상을 입었다. 이번 싸움에서 경군이 입은 타격도 컸으나 농민군의 피해도 컸다. 이렇게 해서 전주 전투는 5월 3일에 가장 치열하게 벌어졌는데, 바로 그때 황화성이 총을 쥐고 내달렸을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다 끝내 관군의 총탄에 쓰러지고 말았던 것인데 앞서 가던 집안 형님에게 도와달라고 “형님…하고 부른 것이 황화성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될 줄이야. 뒷날 그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또 그곳에 반드시 황화성의 시신이 그대로 있으리란 법도 없어 집안식구들은 시신 찾는 것을 단념했단다. 그때의 안타까움은 가묘를 쓰면서 두고두고 가슴에 새겨두었을 것이다.
집안에 사람이 없고 전주가 그때는 걸어서 어디꺼진지도 모르는데 어쩌게 찾으러 갈 것이요. 여기서 전주가 이백 리요. 걸어서 이틀에도 못 가지요. 그 양반도 어디껜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시신은 못 찾았어요. 가묘는 상하 장운동에 있지요.
황일제의 부인은 지금도 집안식구들이 아플 때면 혹시 그렇게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원혼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농민전쟁과 할아버지에 대한 짐을 아직도 벗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데, 이렇게 산골짜기나 길가에 선조들의 백골을 뒹굴리며 살아가야 하는 농민군의 후손은 지금 얼마나 될까. 그들의 가슴 속에 응어리진 한이 이 땅에서 언제나 풀리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