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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록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불 속에서 살아난 김두민, 손자 제현
대상인물

김두민 (金斗玟)

1850~1930. 7. 3. 김해(金海) 김씨. 충청도 보은집회에 참가, 장흥 석대들 전투에 참가한 후 금당도에 피신하고 있다가 동학이 천도교로 공인받은 후 포교 활동을 벌였고, 항일독립자금까지 쾌척하였음.

증언인물

김제현(金濟炫)



1921~ . 젊어서는 양식과 어업에, 지금은 농업에 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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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도
가계도 이미지
정리자

우윤

출전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

내 용

장흥 회진면 신상리에서 태어난 김두민은 농사를 지으며 살기도 했지만 훈장생활도 하였다.

집안형편도 괜찮았지요. 적어도 한학을 전공했다니 가정이 괜찮은 편이지요. 이 지방에 소작지나 그런 것은 없습니다. 자작으로 먹고 지낼 정도는 됐죠.

그런 그의 눈에 비치는 당시 나라사정은 말이 아니었고, 그때 제세안민한다는 동학을 발견하였다. 손자 제현은 조부에 대한 기억을 더듬었다.

이 마을이 풍원리라고, 면장을 했어요. 시방은 내덕리가 되었는디 전반적으로 동학이 여기서 발산해가지고 퍼지다시피 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동학에 입도했어요. 한말 그 어지러운 정치 속에서 인생이 도탄에 빠져가지고 소생할 길이 없냐? 그란 때 동학의 제세안민이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편하게 한다고 보았고, 그래서 앞세상을 내다보고 널리 백성을 구한다는 그 일념에서 동학에 입도를 했지요.

김두민이 살던 풍원리는 마침 동학이 널리 전파되어 있던 곳이었고, 그리하여 동학에 입도하였는데 두민은 곧 장흥교구에서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김상준 씨라고 그가 어르신하고 숙질간이요. 두 분이 중심이 되었지요. 충청도 보은에까지 이 마을의 대표자로 참가했지요.

그리하여 1893년 3월 보은에서 대대적으로 교도들이 모여 교조신원과 척왜양을 외칠 때 마을을 대표하여 참가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김두민이 살던 마을은 적은 마을이 아니었다. “그때 이 마을에 100호쯤 있었습니다. 지금은 인자 1군, 2군에도 한 200호 되지요.” 이런 마을에서 훈장 선생이 동학에 들면 동학의 교세확장에 유리했을 것이고 또한 자연스럽게 대표적 인물로 추대되었을 것이다. 그 후 이렇다할 행적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1894년 12월 장흥 석대들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때 참가했다는 손자의 말을 옮기면 이렇다.

지금 확실한 것은 없는디 그래도 우리 장흥 석대전이 있었어요. 최후의 석대전에 참전했었더란 말이 있어요. 싸우시고 전리에 그냥 사태가 불리하니까 그 당시 참 우리 동학군은 뭐 무기란 게 뭐 있습니까? 그란디 일본 수비대가 총으로 거시기하기 때문에 사태가 불리한께 할 수 없이 패전하고. 그래서 피해 와가지고 저 무인도(당시는 금당도, 지금은 완도군 금일면)로 배타고 도망가셨지요.

석대들 전투에서 밀리자 두민은 금당도로 몸을 숨겨 육지로 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보낸 횟수가 “한 5, 6년 걸렸지. 그렇게 조금 사태가 어느 정도 잠잠하게 되니까 여기 와서 노병으로 훈장직을 조금 했습니다. 그러다가 동학이 손병희 선생께서 포덕천하를 했어요. 동학은 천도교로 개칭이 되었기 때문에 다시 오셔서 천도교를 신앙하고 또 여러분한테 포교하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여기서는 후면이 내덕면이라 하는디 명덕 관내 5개 부락 있는디 여기는 한 300호 이상이 전부 천도교이었어요.” 마을이 거의 대부분 교인이 될 정도로 이곳에서는 교세가 대단하였다. 이런 교세 확장에는 김두민의 정열적인 포교활동이 있었을 테지만 손자의 입으로 자세히 들을 수 없어 다만 추측할 뿐이다.

천도교가 뿌리가 깊습니다. 그래가지고 그 당시 자금모금 명단을 기미년 경술년 합방으로 기미년 당시에 우리 조부님께서 여기 230몇 명을 지금 그 당시에는 은·동(銀·銅)장으로만 기입을 했어요. 그란디 이것은 인자 기미년 3·1운동 당시 자금으로 논 밭을 팔아서 성금한 분들이란 말이야. 이것이 전부가 그런디 지금 은·동으로 기입했는디 은은 그 대가가 금전으로 기입하면 탈로 될까 그래가지고 요것을 은·동으로 기입해가지고 자금을 동료들과 같이 내고….

그러나 은·동장이란 3·1운동 때 항일자금과 관련 있다는 김제현 옹의 증언과는 달리 장흥교구 관내의 교도들이 1906년(포덕 47년)에 기금을 모아 올리자 중앙교단에서 은장과 동장으로 포상한 것을 말한다. 천도교는 1905년 12월 1일을 기하여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였고, 이어 손병희가 1906년 초에 일본에서 귀국하여 교단조직을 정비하였다. 이때 천도교는 일진회와 갈등 상태에 있었고 끝내 천도교는 1906년 9월 이용구의 일진회와 완전히 갈라서고 말았다. 그런데 대부분의 재산을 일진회 쪽에서 차지하여 천도교는 재정적으로 큰 어려움에 빠졌다. 아마 이런 상황에서 전국의 교도들에게 조직 정비 자금을 상납토록 지시한 것 같다. 어쨌든 더 자세한 내용은 살펴봐야 하겠으나 은·동장을 기록한 책자에는 정확한 액수를 적지 않고 다만 아무개 이름 밑에 은과 동으로만 표시하였다. 은·동은 대개 주택지 부근의 논 한 마지기 가격에 해당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최근 『천도교장흥군교구역사』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때 모은 기금은 영산포까지 걸어가서 거기서 기차로 상경하여 천도교 중앙총부에 상납하였다고 한다. 그때 김두민도 참가하였다는 증거로서 은·동장 기록부에 실려 있는 것이다. 김제현 노인은 그래도 조부의 이름이 그곳에 실려있으니 기쁠 수밖에…

인자 여그 교무관장전으로 일편단심의 애국충절 비슷한 성금명단 보호권이라 해가지고 이 자료가 있길래 중앙정부에서 독립자금모금명단 인정을 해 달라고 천도교로 했는데 이것이 회신이 와서 교관이 거시기 하고 이 명단은 그 당시에 독립자금을 허리띠에 간직하여 영산포까지 보행하여 기차로 갖고 거시기 했다는 것이 있고, 마침 증거가 없었는디 이 은·동장이 나와서 요건 은이고 요건 동장인디 안팎으로 거시기 한건데. 옛날에 할아버지께서 받으셨는데 잃어버렸다가 다른 데서 나왔어요.

손자 제현은 그 은·동장을 손에 든 채 한편으로 장흥 전투에 참가한 조부의 행적을 이렇게 일러준다.

이것이 시방 절함 윤시영 종복사님의 종선 근하 씨가 쓴 거 같습니다. “신복을 받아 귀중한 역사자료와 은·동장이 보존되다.” 특이한 점은 석대전 후 일본의 수비대가 가정에 남아 있는 조부님을 기둥에 억매고 불을 질렀는디 사방의 불길에 싸여 사경에 이를 때 천우신조로 속박이 풀려 망명하여 살았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일본사람이 끌러 줬어요. 사람이 막 불 쐬여가지고 그 불이 타서 금방 거시기 할라한께 싸게 일본사람이 속박을 끌러 주고 하여 “칠천백 제조원 영령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감 계시에 따라 다행히도 강진군 대구면 영동리에 거주한 유족 윤시영 종복사님의 종선 근하 씨가 신복을 받아 귀중한 역사자료와 은·동장이 보존되므로 그날 진상이 명시되었다.” 은·동장이 너저분 하지만 다행히 찾았습니다. 홍학도 성암 독립투사 김재계 선생이라고 홍학을 받았는디 여그 명덕 향토사 편찬위원장으로서 책에 전부 나와 있습니다.

체포된 김두민은 마침내 기둥에 묶여 불 속에서 죽으려는 찰나 뜻밖에도 일본인이 구해주어 살아났단다. 불길 속의 형장에서 일본인의 손에 살아난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럼 그 일 때문에 그때 재산을 빼앗기거나 고초를 당한 일이 없었느냐는 질문에 손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 때문에 노상 여기 와서 진탕 치고 그랬지요. 잡아내라 하고 주인이 거시기 했으니까. 그라다가 지친께 가버리곤 했을 것입니다. 우리 장흥의 동학참전용사 명단이 있어요. 몇 분이 여기서 이 방에서 참전 했어도 인자 살았다는 생존자 명단으로써 들어갔지요.

그런데 정작 할아버지 이름은 그곳에서 발견되지 않는단다. 그때 전사하지 않고 생존하였기 때문이기도 한데(뒷날 생존자 명단에는 기입) 그게 손자로서는 못내 아쉬운 듯하였다. 하지만 제현은 조부가 명단에서 빠진 이유를 나름대로 찾았다.

그 당시에 이 장흥을 함락 시켰어요. 그 때문에 동학이라 하면 질색을 하고 다들 쉬쉬했지. 그래서 이름이 빠진 게 아닌가 하는디… 어쨌든 지금은 이번에 와서 교수들이 와서 세미나를 갖고 그러니까 그때 세상은 충신이고 또 이제 와서는 동학이 발전이 되니까 시대적 사명에서 동학을 하신 분들이 또 애국자가 되고 그랬다고 그런 얘기를 합디다. 그래서 그란디 우리 조부님은 사적이 없어요. 그러나 그분이 학자로서 동학의 정신을 많이 길렀다고. 우리 지방에서 그 분의 후배로서 독립투사 김재계 선생님이 그라니까.

이를테면 농민군이 장흥을 함락시켰기 때문에 더욱 농민군에 대한 박해가 심해져 “내가 전투에 참가했소” 하며 나설 수 없어 명단에 올려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그렇지만 주변의 모든 사람이 알아 주고 특히 김재계라는 독립투사까지 참전 사실을 확인 해주니 저으이 든든해진다는 말이었다. 그 후 생활에 대해 말하는 제현은 특히 이 고장의 인심과 정신 때문에 그래도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고, 나라의 어려운 일에 동참할 수 있을 정도로 바르게 살았다고 한다.

참말 지금이사 생활정도가 낫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참으로 어려웠지. 그래도 여기가 인심이 좋고 그라기 때문에 여럿이 먹을 수 있는 정도로 살았지. 여그 고장이 민족성이 강해 가지고, 여그 참, 아까 명단에 보십시오. 그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성금 했다는 것도 큰 것이 아닌가?

손자 제현은 조부가 참여했다는 동학 때문에 지금까지 바르게 살아 왔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말을 이었다.

그것은 동학의 정신에서 나오는 거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천도교로 거시기 해가지고 동학에 대한 얘기가 없고 바로 천도교로 됐기 때문에 천도교 신앙만 잘 하면 된다 하고 그렇게 되서. 그란데 지금은 기독교가 판치지요. 그전에는 기독교가 서양 종교라서 거시기 했는바….

천도교의 전신으로서 동학을 강조하는 손자 제현은 말 끝에 지금 천도교의 교세가 점점 약해져가고 있다는 아쉬움을 담았고, 그 때문에 내비치지는 않았지만 조부의 활약상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미약해지지 않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떠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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