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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록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해남의 동학농민군 지도자 백장안, 증손 종남
대상인물

백장안(白帳安)

1852~1894. 1888년(광서 14)에 무과 병과에 급제. 족보명은 영표(永表), 자는 학표(鶴表).

증언인물

백종남(白鍾南)



1952. 7. 1~ . 증손. 전남 도청 세정과에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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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도
가계도 이미지
정리자

신영우

출전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

내 용

최근까지 학계에서는 동학농민군에 관해 좁은 시각을 가지고 이해하고 있었다. 마치 농민군을 오늘날의 직업 혁명가처럼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몰락한 양반만이 동학농민군의 지도자로 나섰고, 가난한 농민들만 동학농민군에 가담하여 용감하게 싸웠다고 하였다. 심지어 동학이 이 사건에 미친 영향까지 그 의미가 크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그런 까닭에 동학과는 전혀 관련이 없고 개혁의식이 투철한 지도자의 활동 방침에 따라 농민군이 일사불란하게 투쟁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견해는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고 이를 분석, 실증한 글들이 발표되어 점차 고쳐지기에 이르렀다. 전라도 해남에서 활약한 백장안의 개인 내력은 동학농민군에 관한 기존의 잘못된 생각을 수정하는 자료가 된다. 백장안은 순장 벼슬을 지낸 백용담의 3남 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생가는 전남 해남군 삼산면 평안리이다. 이 마을은 수원 백씨의 집성촌이었다. 그의 증손 백종남은 집안에 전해져온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증조할아버지 때는 비교적 부유한 살림살이로 하인도 두고 큰 집과 말도 소유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얼마나 되었는지 그 정확한 규모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초상이 날 때면 백말로 바리바리 해서 인근에서는 권세나 살림이 빠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한 인물이 인근에 권세나 살림이 빠지지 않았다면 잔반이나 가난한 농민이 아니다. 더구나 무과에 급제한 인물이었다. 아무리 문과보다 무과 급제자의 사회적 지위가 낮다고 해도 향촌사회에서 양반을 칭하는 것에는 무리가 없었을 것이다. 세력이 큰 명문 양반이 있는 고을에서는 이들 토호와 맞서 대등하게 지냈다는 일화가 선조들을 기리는 무용담으로 전해져 내려 온다. 해남의 수원 백씨가에도 그런 말이 있다. 이웃 마을이 연성리인데, 그 마을에 조선시기 명문가로 이름 높은 고산 윤선도의 본가가 있다. 당시 해남 윤씨가 권세를 부릴 때 백장안은 그에 굽히지 않았다. 그리해서 ‘백선달 지가 지말 타고 간다’는 말이 생겼다. 그의 집안사람들은 무관형으로 체격이 크고 힘이 세었으며, 지금도 대체로 골격이 크다. 아쉽게도 백장안이 어디서 살았는지 정확한 생가터의 위치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백씨촌인 삼산면 평안리의 어느 곳인 것은 분명하다.

증조할아버지가 갑오년에 동학군 간부로 활약하다가 완도군 구내면 불목리에서 체포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곤 해남현으로 압송되었지요. 증조부는 의리가 있고 통솔력이 있었습니다. 처형되기 전날 부하들이 눈물을 흘리며 상관을 걱정하자 ‘사람은 어차피 한 번 죽는 거’라며 오히려 위로했다고 합니다. 이렇듯 대담하게 죽음을 맞이하였지요. 부대원들은 흙구덩이에 몰아넣고 매장을 한 반면 증조부는 삼산천에서 총살을 당했습니다.

관군과 일본군은 공주공방전에서 패배한 동학농민군을 전라도 남단으로 몰아넣었다. 전주, 원평, 태인으로 밀려내리던 농민군 주력은 흩어져서 산악지대와 섬으로 숨어들었다. 공주까지 가지 않았던 각 군현의 동학 교인들도 같이 피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장안은 그 무력과 능력에 비추어 비교적 큰 동학농민군 조직을 이끌고 참전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완도까지 피신하였으나 마침내 붙잡혀 해남으로 압송된 뒤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백종남의 아버지인 백복만 씨에 의하면 삼산천에서 10km 떨어진 지금의 해남읍에서 장작 10단으로 화형을 당했다고 한다. 시신은 증조모가 수습하여 해남군 삼산면 상가리에 있는 선산에 모셨다. 당시 종증조부 두 분이 같이 동학농민군에 참여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얘기가 없었다. 증조부의 제사를 음력 12월 27일에 지내는데 한 마을에 같은 날 제사가 든 집이 여럿이라고 한다. 유품으로는 서지들이 많았으나 어머니가 동정을 만드는 등 소홀히 다루다가 거의 유실되었고 지금은 교지와 내용을 알 수 없는 서지들만 보관하고 있다.

증조부가 돌아가시자 그 마을에서 더 이상 살지 못하고 증조모(문화 유씨)는 할아버지를 데리고 대흥사 법당으로 숨어들어가 어렵게 사셨습니다. 할아버지 화자 인자(1891년생) 쓰시는 분은 네 살밖에 안되었지요. 선대부터 불교 집안이었던 연유로 절에 숨어들었던 것 같아요. 대흥사 주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불교신자였고 지금 저도 불교를 믿고 있지요. 증조부의 형님과 동생분 식구들도 흩어져 살았는데 후손이 끊기거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난이 완전히 평정된 후에는 구림리 용전마을에서 살았지요. 할아버지는 사람이 좋아서 청주 한씨 집안으로 장가를 들어 처가의 도움을 받고 농사를 지으면서 살림을 일구었습니다. 저는 어려서 아버지와 숙부에게서 증조부에 관한 얘기를 별 관심없이 들었지요. 그런데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친목회에 있는 종씨 되는 이와 집안 얘기를 나누다가 저의 증조부가 해남 지역에서 중요한 인물인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래서 제적 등본을 떼어보고 족보도 살펴보고 해서 증조부의 또다른 이름이 백장안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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