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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록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징을 치며 선두에서 농민군을 독려한 백좌인, 손자 임선
대상인물

백좌인(白佐寅)

1863~1895. 12. 30. 별명은 응환(應煥). 장인을 통해 동학에 입도하였고, 장흥 전투 때 징을 치며 독려하였고, 전투에서 밀리자 처가 쪽으로 피신했다가 체포되어 처형됨.

증언인물

백임선



1936. 12. 16~ . 금융업과 목수일을 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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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도
가계도 이미지
정리자

우윤

출전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

내 용

장흥 용산면(옛날에 남면) 상금리에서 태어난 백좌인의 집안은 그런 대로 살만했다. 손자 임선의 증언을 들어보자.

옛날에는 용산면이 남면이었습니다. 남면 상금리에서 출생하셨습니다. 쭉 거기서 살아왔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대대로 우리가 벼슬아치 집안이기 때매 큰집들은 굉장히 잘 사는데 식구들이 많다보니까 시골 농민 해봐야 얼마나 특별히 잘 사는 사람이 없었고, 그래도 역시 벼슬아치들이 꾸준하니 공부도 하셨고 그런대로 살기는 굉장히 편했어요. 여기가 인자 그렇게 되왔지만은 그 중간쯤은 됐지요.

그러나 윗대는 제법 벼슬했다는 첩지들이 있어 꽤 살림살이가 넉넉했음을 알 수 있는데 증조부대부터는 벼슬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자세히 말씀 드리지요. 우리 조부님께서는 유학이라고 하시지만 증조부님께서도 역시 벼슬을 못하셨습니다. 큰 벼슬을 못하시고 그 양반도 역시 유학인데 증조부님 동생, 증조부님 동생의 형제가 5형젠데 5형제 중에서 셋째아드님은 벼슬을 하셨어요. 통헌대부 사헌부 감찰을. 어제께 교지를 부쳐 왔습니다. 나는 그 양반 직손이 아닙니다. 방조지요. 그러니까 거기서 우리 고조부님 교지하고, 종증조부님 교지가 부쳐왔지요. 좀 보십시요. 고조부님은 먼저 용양위 호군을 하시고 종증조부님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우리 조부님으로서는 작은아버지가 중추부사 아닙니까. 형은 사헌부 감찰이고. 그러다보니 벼슬아치 집안이기 때문에 우리는 대대로 참 잘 살았어요. 그런데 내려와서 증조부님께서는 벼슬을 안 하셨기 때문에 재물이 좀 덜 했는지도 모르겠지만은 그러나 증조부님한테서 물려받은 재산 가지고 그렇게 가난하게는 안 살았다고는 그래요.

그런데 시골 농사꾼답지 않게 백좌인은 풍채도 크고 의협심이 강하여 주위에서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단다. 그리고 주경야독하던 학구파이기도 하였다는데…

제가 집안의 어르신들한테 들은 얘깁니다만은 어른신들 하시는 얘기가 아주 기골이 장장했답니다. 풍채가 크시고 기골이 장장하시고. 주경야독을 주로 하셨다고 그러는데 시골사람들은 대충 주경야독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풍채도 크고 의협심이 강하셨기 때문에 주위에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답니다. 주위에 따르는 사람들이 수하 수삼, 고삼건간에 많았다고 그래요. 공부도 남보다도 많이 한 편이랍니다.

이런 풍모 때문에 백좌인은 인근에서 사위감으로 찍어논 사람이 많았을 법한데, 어쨌든 백좌인은 결혼하고 처가를 오가면서 동학이라는 것을 알았고, 동학에 입도하여 새로운 운명을 맞게 되었다.

괜찮게 살다가 우리 조부님이 장가를 막 가셔 가지고 제금을 나기 전이라고 그래요. 세간나기 전에 큰집에서 같이 계시다가 애들을 3남매를 낳았다고 들었습니다. 세간나기 전에 한 집에서 그렇게 살았던가 봐요. 그런데 우리 아버지가 첫째, 둘째와 셋째 분이 고모님이신데 그 양반들이 아주 어렸을 때, 그러니까 아버지가 다섯 살 때 할아버님께서 돌아가셨으니까. 조부님 처가집이 용개면에 있었지요. 지금은 장흥군 장동면 만수리란 곳이 우리 진외가집이지요. 할머니 택호가 용개댁입니다. 그 할머니(인천 이씨) 댁도 아주 잘 살았대요. 그 처가집을 자주 왔다갔다 하시더래요. 왜 처가집을 자꾸 왔다갔다 하냐면은 그때 바로 동학을 하시기 시작하느라 왔다갔다 하셨던 거지요. 우리 동네에는 동학에 가담한 분이 별로 없었고. 우리 동네에서는 하도 엄하다보니까 관에 협조했지 동학에는 협조 안하고. 다른 교가 우리 동네에는 들어올 수가 없었어요. 순 한문만 하도 엄하게 읽는 곳이기 때문에… 우리 동네 동쪽 서쪽 서재가 둘 있습니다. 우리 고장은 한문으로 아주 유명한 부락입니다. 진수재라고 하는 서재가 있었고요, 나아갈 進, 닦을 修, 집 齋. 지금도 예수교가 우리 동네 안 들어왔어. 가장 완고한 곳입니다. 아주 양반냄새가 날 정도여. 그 때문에 지금 우리 마을이 아주 구식이 되어부렀어.

그런데 백좌인을 동학으로 인도한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장인이었다.

여기서 진외가댁은 거리가 상당히 멀지요. 한 60리쯤 되겠네요. 장흥읍에서 부산면을 지나 장동면을 가게 되지요. 보성으로 가는 길입니다. 내가 듣기에 장인양반도 역시 동학에 뜻을 뒀다고. 진외가집이 잘 사는데 진외가 할아버지가 동학에 적조했다는 얘기만 들었지, 그 후론 전부 이걸 감춰버리라고 아주 돈을 줘가면서 뺄려고 하고 감춰버릴려고 하다보니까 전혀 쉬쉬해부리고 하니까 발설이 안됐지요.

자신이 살던 마을이 워낙 유생들의 입김이 거세던 곳이라 처가집을 오가며 장인의 인도로 결국 입도하게 된 백좌인은 기골이 장대한 덕분에 전투에 참가했을 때 선두에 서서 징을 치며 농민군을 독려하였단다.

농민봉기가 되니까 이분이 기골이 장대하고 힘도 좋고 하시니까 그 동학군이 움직이고 할라면 징을 치고 그러면서 포섭을 하고 모임을 하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양반이 농악을 울리면 힘이 좋고 하니까 징쇠 역할을 많이 하셨다구요. 징을 치고 다녔다고, 그것을 누가 봤냐 그러면 저한테는 삼종조가 되지요. 그 양반이 어렸을 때 장흥장에 가니까 동학군들이 벌떼같이 장흥장을 시위하느라 나온다 이거지요. 그때 당시 보니까는 형님이 있거든. 형님한테 반갑게 얘기하니까는 뭘 보러 왔느냐, 빨리 가거라. 여기는 뭐하러 왔냐고 사정없이 호통을 치면서 여기 얼씬도 하지 마라. 빨리 가라고 한 갑디다. 동네와서 얘기하시는데 영개성님 돌아가실려는가 나를 그렇게 이뻐하신 양반이 나를 보고는 쫓아버렸다 이거지요. 마음이 변해서 죽는다고. 그 양반이 잘못 생각이지 내가 생각하기론 집안 동생 다칠까봐 너는 여기 올 데가 못된다 해서 호통쳐서 보낸 것이지 그 양반이 죽을려고 해서 마음이 변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저는 그렇게 봅니다.

동생이 다칠까봐 꾸짖으며 쫓았던 다정다감한 형이었지만 전투 때는 누구보다 용감하고 날랜 농민군 선봉장 백좌인이었다. 그때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이가 손자 임선이다.

제가 어렸을 때 우리 외삼촌 할아버지가 동학에 대한 얘기를 하시더라구요. 느그 할아버지가 징쇠를 하셨단다고. 느그 할아버지가 전투하실 땐 아주 용맹스럽고 날래고 기골이 장대하고 하니까 감히 옆에 범접을 못한다 이거지요. 그래갖고 그 양반이 지금 말하면 이 전투 저 전투에 가서 그 양반이 나타나면 사람들이 그 뒤를 따르고 이기니까. 아주 이 양반만 쫓아 뒤에 따라다닌다 이거지요. 여산리 할아버지가 이런 얘기를 말씀하시데요. 그래 다음날 집에 와가지고 아버지한테 물어봤어요. 할아버지가 이러이러한 일을 하셨다는데 알고 계십니까? 했더니 이게 무슨 소리냐? 쓸데없는 소리 어디서 들었냐? 그 양반 택호가 모래견입니다. 그래 모래견에서 들었는데 하니까 쓸데없는 소리 하질 말어. 니그들이 뭘 안다고 아니 입을 뻥긋도 못허게 아버지한테 혼나부렀습니다.

하지만 농민군에 가해졌던 핍박이 너무 심해 집안에서는 조부의 활약상을 절대 입에 올리지 못하게 했다. 조부의 늠름했던 모습을 떠올리며 자랑하고자 했던 어린 시절의 임선은 아버지로부터 크게 꾸중을 받아 못내 아쉬운 기억으로만 간직해야 했다. 그러나 시대는 바뀌어 떳떳이 그날의 일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 큰 형님도 역시 감추시더라고요. 우리 큰 형님하고 저하고는 연령차이가 참 많습니다. 그 형도 역시 감춰요. 알라고 하시지도 않고. 참 우리 동네는 일가들인 백가들 친척 아닌 사람들이 없지요. 그러다보니까 누가 하나 잘못해서 비밀이 있다 해도 완전히 감춰집니다. 비밀이 새나가질 않아요. 6·25사변이 났어도 우리 동네 사람들은 모두 살아난 것입니다. 고영환 씨라고 있는데 국회의원까지 지냈던 그 고영환 씨 어머니가 6·25 때 우리집 밑에 큰집에 피난 오셨어요. 고영환 씨 어머니가 피난오셨어도 안 가르쳐 줬습니다. 그런께 비밀보장을 한다 이겁니다. 일가족끼리 딱 감촤버리니까 우리 할아버지가 동학했었다는 것을 감촤버린 거지요. 왜그러하면 동학했다 하게 되면 그 후손들에게 굉장히 핍박이 오니까 그래서 감췄다고 그래요. 그래갖고 우리 아버지도 감추고 우리 형도 감추고. 지금은 시대가 완전히 바껴서 상관이 없기 때문에 마음놓고 얘기할 수 있는 것이지 그때 같으면 마음놓고 얘기 못할 정도 됐던가 봐요.

이제 손자 백임선은 조부에 대해 더 잘 알지 못하는 것이 후회될 뿐이다. 집안 어른들이 자세히 말해주지 않아 정작 조부가 어느 전투에서 어떻게 싸웠는지 주변에서 들은 말로 추정만 하고 있는데, 그래도 마지막 조부가 피신했던 행적만큼은 비교적 소상하게 알고 있는 손자의 증언을 따라가보자.

다른 사람들한테 들었는데 어느 양반이었는지 기억이 자세히 안납니다. 그 영개면에 있는 사람들을 이끌고 장흥에 주고, 장흥군 하게 되면 이방언 장군이 가장 훌륭한 장군 아니십니까? 그래 이방언 장군하고 같이 합세해서 했지 않았냐 이렇게 봅니다. 그때 당시만 해도 우리 할아버지는 최후로 밀릴때까지 밀려 가지고 참전을 다했다고 그래요. 딴 사람들 얘기 종합해서 들어보면은 처음 선봉장으로 나서가지고 마지막까지 버텼다는 얘긴데… 그 사람은 처가로 왔다갔다 하시면서 그때부터 집을 잘 안오시고 하는 이유가 계속되는 전투에 붙들려 도저히 집에 올 시간이 없었지요. 그래서 그곳을 나간 후론 전혀 소식이 행방불명된 거지요. 그때는 집에 들어올 겨를도 없이 계속 전투에만 참여하시고 그러다보니까 마지막에 알게 된 것도 집에 와서 알았다고 그래요. 어떻게 했냐면은 전라북도 장성 전투에까지 전부 가담 하시고 마지막에 장흥에서 종결됐지 않습니까? 장흥에서 전쟁이 끝이 났다 이거지요. 동학군이 마지막으로 몰려갖고 거기서도 성을 뺏겨버리고 거기서 피해버린 것이지. 장흥이 함락된 뒤로 어디로 피하셨냐면은 보성읍이었다고 그래요. 보성군 회천면. 그쪽 주변이 굉장히 산중입니다 회천면에는 우리 증조부님이 살아요. 동서집이 웅치야. 그러니까 그리 피해다닌 것이지요. 피해 다니시다가 인자 처가집에 들러서 농업을 얻으려고 그러니 걸어서 다니지요. 그렇게 고생을 하고 다니셨지. 처음에는 보성서 계시다가 웅치서 계시다가 웅치서 또 용개로 가신 거지요. 용개 가시다가 자기 동서네 집의 유치면 능용이란 데가 있습니다. 거기에도 피해 갔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이게 노출됐던가 봐요. 거기서 고자질한 사람이 있었겠지. 그래가지고 잽혀갔지요.

피신해 있던 대부분의 농민군이 그렇듯이, 백좌인 또한 주위의 밀고로 체포되고 말았다. 관군의 수색에 협조하지 않았을 때 돌아올 피해가 두려웠든지, 아니면 포상에 눈이 어두웠든지 밀고자는 어김없이 등장하였고, 이 때문에 우리 역사가 한층 더 비극적이고 우울하게 전개된 것은 사실이었다.

장흥읍으로 잡혀 갔지요. 거기서 전사하신 것이 벽사진(벽사역)이라고 그러지요. 요즘에는 지금 장흥읍 원도리라고 그러지만 벽사진이라고 그래요. 장흥 벽사진은 전투가 아주 심했던 곳이죠. 화형을 어떻게 시켰냐면은 한 사람 한 사람 총살시킨 게 아니라 짚으로 해서 꼬깔처럼 유지기를 씌워서 불을 질렀어요. 화형을 시켰다 이겁니다. 그때도 딴 사람들 다 처형시키고 섣달 그믐날에 이 양반이 마지막으로 처형당한 거지요.

체포된 장흥 농민군의 최후는 참혹하였다. 백좌인도 마찬가지로 머리에 유지기가 씌워졌고 불에 타죽었다.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게 검게 탄 시신, 가족들의 가슴에 한번 더 못을 박았다. 이는 민심이 천심이라는 조선조 정치의 가장 기본적인 명제를 짓밟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감정에 치우친 관군의 만행이기도 했다. 그렇게 죽어간 백좌인의 시신을 처음에는 부인도 알아보지 못했다는데….

화형을 시킨께 사람을 알아볼 수 없었지요. 송장들이 들판에 수십 구 나딩구라져 있으니까 누가 누군지 찾을 길이 없었더래요. 도저히 찾을 길이 없었는데 그 소식을 우리 할머니와 우리 집안사람들, 동네 어르신네들이 들으셨지요. 소식을 듣고 나니까 틀림없이 우리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그 소리가 들린 거유. 의병장군이 장에서 죽었다는 소리가 들리니까 할머니가 도저히 혼자 갈 수 없으니까 남자는 거기 억수로 모였대요. 그러니까는 바로 손위 동서 그러니까 종조할머니지요. 종조할머니 그 양반이 풍채가 우담하시고 즘 키도 크셨대요. 그 양반이 아주 대단했답니다. 그 양반하고 두 동생이 찾으로 간 거지요. 가서 찾다보니까 전부 새커머니 끄슬러놨으니 얼굴보고는 찾을 길이 있어야지요. 도저히 찾을 수가 없으니까 뒤집어보고 이빨만 엉성히 하고 있으니 얼마나 처참했겠습니까, 젊은 부인으로서. 그래서 못 찾고 돌아댕길 판인데 생각을 낸 것이 보니까 발부리에 늘어뜨린 주머니가 있어 보니까 타다 남은 헝겊쪼가리가 있을 거 아닙니까. 주머니를 보니까 손수 할머니가 지어준 주머니더래요. 허리띠는 도망가고 타다 남은 옷을 보니까 틀림없이 신체도 다른 사람보다 더 크고 할머니가 손수 지었기 때문에 자기 솜씨를 알고 주머니 색깔도 있잖아요? 그래서 옷보고 찾지 사람 얼굴 보고는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답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고 찾았지.

그래도 부인이었기에 남편 시신을 찾는 것이 아주 어렵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자의 몸으로 그 신체를 어떻게 집까지 옮길 것인가 하는 문제에 부딪쳤고, 끝내 부근 마을에서 지게를 얻었다. 그것도 한 냥을 주고. 너무도 그 사실이 생생하였기에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는 한 냥이었다.

시체를 찾았지만 여자 둘이 감당을 할라니까 어렵지. 거기가 원래 부동이라고 했습니다. 그 부동면에 가가지고 지게를 하나 얻었더래요. 지게를 달라니까 그냥 줄 겁니까? 지게를 한 냥 주고 샀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한 냥 소리를 분명히 내가 들었어. 한 냥을 주고 지게를 사가지고 어떻게 끌었는가 봐요. 두 여자가 시신을 끌어매 가지고 하루종일 헤맸지요. 동네 어르신네를 알면 큰일 나니까 동네까지 시신도 못 모시고 그 때 우리 아버지께서 다섯 살 자셨으니 뭘 알 겁니까. 큰집이 그러니까 조부님하고 큰 당숙 이런 양반들이 움직여서 밤에 몰래 묘를 썼다고 그래요.

부동면에서 남면 동네 입구까지는 거리가 20리가 넘었다. 안그래도 유생들의 눈초리가 심한 마을인지라 백좌인의 시신은 마을에 들어오지 못했다. 선산에 묻힐 수 없는 것도 서럽거든 밤중에 묘를 써야 하는 부인의 가슴은 천갈래 만갈래 찢어질 수밖에….

부동면에서 할아버지를 처음에 초장했던 장손까지가 이십 리 넘겠습니다. 이십오 리쯤 되겠어요. 우리 아버님이 성장하셔서는 우리 선산으로 이장을 했습니다. 선산은 우리 마을에도 많이 있지만, 우리 6대 조모님을 위해 모신 선산이 대덕면에도 있어요. 지금은 대덕읍인데 진녹리에 선산이 상당히 큰 것이 있습니다. 6대 조모님이 모셔 있고, 그 밑에 우리 조부님을 모셨지요. 문중 어르신네들 하고 타협을 해가지고.

그 후 좌인의 아들이 선산으로 이장하였고, 그 후 집안의 역사를 복원하느라 손자 임선은 무던히 애를 썼는데, 이제 그때 조부의 활약상을 담는 증언록을 만든다고 하니 크게 짐을 벗는 듯 마음이 가뿐해진단다. 그래서 어느덧 말은 길어지고 있었다.

우리 집안에 어머니보다 나이가 많으신 누님이 계셔요. 아흔 살이 지났어요. 그 누님이 가끔 우리집에를 와요. 둘이 대화한 것을 장흥문화원에 갖다줄려고 녹음을 했습니다. 진외가의 동생 이봉준이한테 1990년 이전에 줬는데, 동생이 장홍문화원 2층에서 서도원을 해요. 그런데 찾을 길이 없어요. 그때 관심이 많아서 향교에 알려서 할아버지 활동하신 거하고, 할머니가 열부는 못 받아도 절부는 받아야 되겠다는 일념에서 그걸 찾으려고 애를 썼어요. 그런데 그것이 여의치 않고 시간만 자꾸 흘러가고 고향에 살고 있으면 더 쉬울텐데…. 후손 증언록을 만들게 되니까 저한테는 굉장히 좋은 기회지요. 할아버지를 위해서. 아까 내가 아흔몇 살 먹은 집안 누님이 계신다고 했지요? 우리 할아버지에 대해서 즘 아시는 거 있습니까하고 질문을 했더니 내가 아는 데까진 알지만 그때 내가 봤당가 다 들은 얘기네. 그때 평발 때라거든. 평발이라는 것은 머리를 안 올렸다 이 말이야. 평시 시집 안간 처녀보고 평발 때라거든. 평발 때 들은 얘기네. 혼자서 삼남매를 기르시던 할머니는 제금날 때 준 논밭을 가지고 계셨는데. 큰집 당숙이 일곱 마지기 밭을 팔아가더래요. 이유를 물으니 할아버지가 동학에 가담해가지고 집안에 말하면 손실이 왔다. 왜 손실이 왔냐면 자기 집의 기록을 빼기 위해서 돈을 관료들한테, 탐관오리들한테 돈을 준 것이지요, 돈이 상당히 많이 들었던가 봐요. 그러다보니까 할머니가 뭐가 있겄습니까. 그러니 만날 친정에 가서 얻어다 먹었다고 그래요. 그러다보니까 아버지가 감문하게 됐습니다. 공부는 못했어요. 아버지가 공부를 못하고 밭 팔아 기록했다는 말은 우리 누님이 하시더라구. 딴 사람들은 몰라. 그럼 아버지를 서재도 못 보낼 형편이 되니까 데리고 일만 시키고 가난해 먹을 거 없으면 시장에 가서 뭣좀 마시고 이런 식으로 해서 생계를 이어갔는데, 그러다보니까 왜정시대, 왜놈들이 닥쳐부렀으니까.

수십 년의 세월을 하루아침에 쏟아내기에는 너무 많은 사연들이 떠올라 손자 임선은 그만 말문을 닫고 말았다. 그 흉중의 감회야말로 어찌 짧은 필설로 다하리요. 하지만 손자 임선의 눈에 이제는 그 모진 세월이 다 흘러갔다는 안도감이 살짝 비치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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