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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록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이방언 장군 가마 옆에서 싸운 변규창, 손자 한중
대상인물

변규창(邊圭彰)

1865. 7. 1~1895. 1. 27. 장연(長淵) 변씨. 독실한 동학교도로서 이방언을 보좌하면서 장흥 전투에 참가하였고, 피신해 있다가 체포되어 1895년 정월 27일 처형됨.

증언인물

변한중(邊漢重)



1936. 9. l1~ . 용산면 관지리에서 농업에 종사.

1965~ 고려대 국문과 졸업, 대학시절 헌신적으로 학생운동에 참여. 지금은 입시학원에서 강사로 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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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도
가계도 이미지
정리자

우윤

출전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

내 용

집안 살림살이가 아주 곤궁했지라우. 그때 우리 논이 네 마지기라고 합디다. 한 8백 평 정도. 집도 한 두 칸 있었는데…. 공부는 못 했고 어깨너머로 하다시피 해가지고 자기 앞을 개릴 정도로 했는 갑습디다.

여유있는 집안 출신이 아니었던 변규창. 별로 배운 것도 없었던 변규창은 그래도 뭔가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일념에서 농민전쟁에 참가하였다. 그러한 할아버지에 대한 자세한 기억은 별로 없으나 할아버지에게는 집안식구들이 이해할 수 없는 특이한 행동이 있었다.

그때 우리 할아버지가 항시 망태를 젊어지고 다니셨더래요. 뭣을 담아갖고 다녔는지 모르지만 꼭 망태에다 뭣을 담아갖고 나가시더래요. 그러나 그 속에 무엇이 들어가 있는지는 모르지요.

변규창은 망태에 무엇을 담아 나갔을까. 동학 신앙활동과 관련된 은밀한 행동으로 추정해보지만 확인할 도리가 없다. 이러한 변규창이 농민전쟁에 참가하였고, 이방언 장군의 가마 옆에서 함께 싸우다가 피신 끝에 결국 체포되어 처형당했다는 사실을 손자 변한중은 다음과 같이 전해준다.

아버님이나 할머님이 말씀하실 때 조부님이 독자로 태어나가지고 이방언 장군님하고 같이 합심을 해가지고 고생하시다가, 이방언 장군 가마 옆에서 뛰고 그랬답디다. 관군들이 이방언 장군에게 습격을 하니까 이방언 장군 가마를 놔둬불고 부하들이 내빼부렸어. 그때부터 거그서 피신하기 시작해 가지고 며칠 후에 체포가 돼가지고 사형을 당하셨지. 장흥의 장대(현재 장흥서초등학교), 지금의 세전머리지요. 거기서 사형을 당하셨어요. 항시 아버님이 천도교 주문,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느 할아버님이 이것을 꼭 외우고 다니셨다고. 그래가지고 돌아가셨는데 시체는 겨우 찾아가지고 밤에 운구를 해가지고 집에 와서 장사를 지냈다고 그런 말씀을 하시대요.

어쩌면 이방언 장군의 호위 책임자를 맡았을지 모르는 변규창이었으나 전세가 밀리자 피신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나 발각되어 처형당하고 말았다. 처형당한 그의 시신을 찾는 일은 남자들이 나서지 않고 변한중의 할머니와 고모들이 찾으러 갔다. 시신은 입은 옷을 보고 찾았단다. 그리고 주변사람들이 일러준 대로 처형 날짜를 제삿날로 잡았다 한다. 정월 27일이었다.

시동생들은 다른 동네에 살았지요. 한 1km 정도 떨어져 있거든요. 그때만해도 난리에 죽은 사람이니까 관여를 안 할려고 하는 그런 머시기가 많았어요. 그래서 할머니하고 고모님들이 나섰지요. 그때만 해도 부패가 된 상태가 아니니까 형상을 알아볼 수 있는 저기가 되았나 봅디다. 장대에서 시체를 찾을 때 이 사람들이 며칠날 사형을 시켰다는 것을 들어보고 그날로 해서 제사를 치루지요. 그러니까 조부님이 그 일에 가담한다는 것도 조모님이 알고 있기 때문에 처형을 당했구나 하고 열심히 찾으로 간 거지요.

농민군의 시신은 공동묘지에다 그냥 묻도록 하였으나 아무리 난리통이라 하더라도 변규창의 시신을 공동묘지에 적당히 묻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공동묘지에 묻는 체하고 밤에 몰래 선산에 자리를 보아 묻었다는 증언이다

나중에 조부님 산소가 여기 계시다 하고 어렸을 때 가서 성묘를 했어요. 그때는 공동묘지에다 해야 되는데 밤에 몰래 선산에다 그냥 모셔 가지고 지금도 거가 계시거든요. 선산은 장흥군 용산면 상금리 산 3번진데 그때 당시에 공동묘지가 상금리 몇 번진가 모르겄소. 지금은 전부 다 이장을 해버리고 밭으로 농사짓고 있는데 그때만 해도 전부 공동묘지에다 막 쓰라고 했던 갑디다.

집안의 가장이 처형을 당하자 그닥 넉넉하지 않은 집안사정은 극도로 나빠졌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천도교의 독실한 교도이기도 했던 큰아들마저 병으로 젊어서 유명을 달리하자 여자들이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던 그때의 사정을 변한중 노인은 이렇게 들려준다.

그래갖고 아버지도 생전에 이런 주문을 외시고 심지어는 고기도 안 자시고 그랬거든요. 그란데 그때 우리 아버님이 젊어서 병으로 돌아가셨고. 고모님이 우리 아버지 우로 세 분이 계신데 같이 저거해서 어렵게 살았는 갑습디다. 옛날에는 살림이 특별한 부자 외에는 다 그렇게 가난했지라우.

점심식사를 하면서 변한중 노인은 서울에 있는 자식 이야기를 잠깐 하였다. 아들이 고려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는데, 총학생회 일을 하면서 연행이 되고 행적이 묘연하여 서울거리를 헤매면서 자식 걱정과 원망도 했지만 점점 아들의 행동에 동조가 되더라고 얼핏 웃음을 지었다. 농민군의 후예로서 조부의 활약과 최근에는 자식의 행동까지 이해할 수 있게 된 변한중 노인의 환한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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