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윤세현(尹世顯)
1856~1930. 강진의 대접주로서 그 일대 6개 군을 관할하는 책임을 맡아 육도씨라 불리기도 했는데 농민전쟁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강진 일대의 교단 최고 책임자로 활동하였음.
윤건하(尹建夏)
1936~ . 현재 강진군 대구면에서 농업에 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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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윤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
윤세현은 강진에서 세력이 큰 대접주었다. 그에게는 다산 정약용, 그리고 전봉준 등으로 연결되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다산 정약용이 저 17년간의 강진 유배생활이 끝날 무렵 완성한 『경세유표』 별본이 있었는데, 이것은 다산의 비합법적인 경세사상이 담겼다 하여 비밀히 유포되고 있었다. 그 별본이 윤세현 등을 통하여 전봉준에게 전해져 그가 새로운 정치개혁을 구상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한다. 그때의 사정을 전해주는 글을 옮겨보자
… 초의(草衣)는 정다산의 시우(詩友)일 뿐 아니라 도교(道交)이다. 다산이 유배로부터 고향으로 가기 직전에 『경세유표』를 밀실에서 저작하여 그의 문생 이청(李晴)과 친승 초의에게 주어서 비밀히 보관 전포할 것을 부탁하였는데, 그 전문은 중간에 유실되었고, 그 일부는 그 후 대원군에게 박해당한 남상교, 남종삼 부자 및 홍봉주 일파에게 전하여졌으며, 그 일부는 그 후 강진의 윤세환, 윤세현, 김병태, 강운백 등과 해남의 주정호, 김도일 등을 통하여 갑오년에 기병한 전녹두(全綠豆 : 전봉준 - 인용자), 김개남 일파의 수중에 들어가서 그들이 이용하였는데, 전쟁 끝에 관군은 정다산 비결이 녹두 일파의 ‘비적(匪賊)’을 선동하였다 하여 정다산의 유배지 부근의 민가와 고성사(高聲寺), 백련사(白蓮寺), 대둔사(大芚寺) 등 사찰들을 수색한 일까지 있었다(「명승 초의전」『강진읍지』; 최익한, 『실학파와 정다산』에서 재인용).
윤세현·윤세환 등이 다산의 『경세유표』별본을 전봉준과 같은 농민전쟁의 최고 지도자들에게 전파되었다는 것은 윤세현과 전봉준과의 관련성뿐만 아니라 윤세현이 그때 교단 안에서의 지위를 짐작케 한다. 윤세현은 강진군 대구면 수동리에서 태어났다. 윗대도 물론 그곳에서 살았다. 손자 윤건하가 들려주는 증언을 따라가보자.
증조부도 여기서 살았는디 여기가 우리 전부 지금도 자자일촌들 다 모였지요. 타성이 몇집 안되지만 전부 우리 인척간들 그런 사람들이나 있고 그라고는 전부 자자일촌하고 그라지요.
손자 윤건하는 농민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집안상황과 조부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전해준다. 집안살림은 별로 좋은 편이 아니였는디 우리 할아버지가 5형제 중 막둥인디 성격이 아주 대담하셨다고 그랍디다. 우리 문중 산에다가 어느 집에서 투장을 해서 묘를 썼어요. 그런데도 누구 일 볼 사람이 없고 하니까 우리 할아버지 보고 이렇게 투장을 해놨으니 파내야 쓰것지 않느냐 하더래요. 그래서 일꾼 열만 주선해주시요, 그래갖고 열 사람을 데리고 가서 파내려고 하니 저쪽에서 사정을 하고 잡고 그러더래요. 그래서 우리 할아버지가 괭이로 묘소를 꽉 찍은께 저쪽에서 우하니 달려들어 이렇게 된 것 어쩔 것이냐고 사정사정 해갖고 그 묘소를 파내덜 못하고 검정 소를 한 마리 줘서 갖고 왔다고 하는 그런 얘기가 있어요.
그 후 농민전쟁 때문에 집이 불타 윗대 가족들이 죽을 뻔했던 일이며 어렵게 피난했던 일들이 손자 윤건하에게는 악몽처럼 떠오른다.
그러니까 동학 갑오년 때 불이 났어. 그 터가 바로 이 위에 길가 집인디 집을 불 질러버렸더래요. 우리 아버지가 계사생(癸巳生 1893년)인디 인자 돌을 넘어가서 그러니까 갑오년에는 두 살 들어가는 해여. 애기를 묶어놓고 그냥 불을 질러부렀는디 그래도 어떤 분이 뒷문으로 들어와 갖고 동창으로 나가라고 새내끼(새끼줄)로 물어뜯었답디다. 그래 풀어져서 할머니도 살고 우리 아버지도 살고 그래 했지요. 그래가지고 여기서 못살게 생기니까 장흥군 대덕면 산쟁이라고도 그라고 연정리라고 그랍디다. 글로 피난을 가셨어요. 친척은 없이 그냥 산골로 피난을 가셨지요. 가족을 전부 데리고 그리 가서 살면서 이제 교를 믿으면서 서울 다니시고. 그 양반은 집안 일은 일체 모르고 그 일에만 그렇게 몰두하고 다니셨다고 해요.
집안 일이라곤 뒷전에 밀어두고 동학에만 열심이었던 윤세현이 동학을 믿은 것은 스무 살도 안된 젊은 날부터였다. 그러다 첫 부인까지 잃게 된 기구한 사연까지 있었단다.
지금은 천도교지만 옛날엔 동학, 그러니까 우리 할아버지가 20대 미만 결혼하기 전부터 동학교를 믿었던 것 같습디다. 그래서 서울을 왔다갔다 했는데 그렇게 한번 나가면 두 달만이고 석 달만이고 표교 활동하러 다니셨다 그랍디다. 원래 본 마누래(慶州 李氏)가 영암서 오신 분인데 우리 아버지 말씀에 어느 해 8월에 내려오니까 그분이 병이 걸렸드래요. 그래 할 수 없이 집에 있으니 병이 나았더랍디다. 그래 괜찮해서 또 도로 서울을 가셨다고 오시니께는 또 재발을 해버렸더라고. 지금 같으면 그라 안 하겠지만은 그때는 아무래도 없이 살고 뒤처리를 못해가지 그래서 그 양반이 11월 달에 돌아가시고 그러고는 또 재치로 장가를 가게 된 거지요. 남원 양씨(南原 梁氏)네 집안으로 가셨어요. 그 할머니한테서 5남매를 낳았어요.
그러한 윤세현이었기에 교단 안에서 중요한 책임을 맡고 있었단다.
그러니까 동학 접주 겸 집강을 겸하셨다는 내력이 있어요. 지금 이것이 강진 문헌 연구소에 있어가지고 한동안 전부 사진을 찍고 복사를 해갖고 한 부씩 갖고 있는데 아마 그거는 공함인가 됩디다. 공무이지요. 지금으로 말하자면 그러니까 우리 할아버지 별호가 육도씨(六都氏)라고 했더랍니다. 그러니까 여기 강진, 완도, 진도, 영암 모두 6개 군을 그 양반이 장악하고 계셨다 합디다. 그래서 6도씨라는 별명이 됐던가 봅니다.
조부가 어느 전투에 참가했느냐는 물음에 손자 윤건하는 이렇게 기억을 더듬는다.
전투에 참여는 장성서 하고, 여기 장흥서도 하고 그랬다고 합디다. 죽창 갖고 하덜 못하니께 대나무로 달구장대 같은 것을 엮어갖고 거기다가 돌을 넣어서 막 공굴리듯 했다고 합디다.
윤세현은 위에서 보듯이 농민전쟁의 지도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활약하였는데, 이 일 때문에 체포되어 묶인 채 불타는 집 속에 갇혀 있었으나 천우신조로 구사일생하였다. 그 후 그는 여느 농민군 지도자와는 달리 일흔다섯까지 천수를 누리면서 교단 일에 종사하였다.
그 양반은 일흔 다섯에 돌아가셨다 합디다. 직책을 계속 맡으시고 노후에 가서는 활동을 못허시게 되고는 대덕에 교당을 설립해 갖고 완도, 장흥 밑은 전부 그 교당으로 모이고 그렇게 했던 모양입디다.
윤건하는 조부와 달리 자신은 천도교를 한때 믿었으나 지금은 믿지 않는다고 한다. 천도교 강진 교구와 사소한 금전 문제 때문이었다는데 그 증언을 옮겨보자.
나는 우리 아버지 돌아가신 뒤로 지금 안하고 있소. 우찌 내가 안했냐 하면 아버지 돌아가신 뒤로도 총부에서 삼일빌딩 지을 적에 찬조금도 모두 교회에서 걷고 그랬어요. 제일 못 낸 사람들이 지금으로 치면 6천 원인가 6만 원인가 그럴 것이요. 겨우 어떻게 해서 두 번 돈을 해서 줬는디 그때는 『신인간』이라는 책자가 나왔는디 나는 돈을 줬는데 안 올랐단 말이요. 그때 책임자가 양인식이라는 분인데 지금은 서울로 가고 없어요. 왜 준 돈을 안올렸느냐 물은께 언제 줬는가 한단 말이여. 그래가지고 싸움을 했어요. 나하고는 당숙되는 사람이여. 넘이 아니고 저 건너서 살아요. 불량한 같은 당신네들하고는 이런 거 못한다고, 내가 안하고 말지 같이 협조 못한다고 해서 관둬 버렸소, 천도교를.
그래서 천도교에 대한 인상이 썩 안 좋은 윤건하인데, 내친 김에 현재 이 마을의 천도교 상황까지 말해준다.
지금도 그 교구는 있는디 사람이 없은께 모이기를 할까. 지금은 천도교 믿었다면 미친 놈이라고 그라고 그렇소. 그 교구 집도 천도교 집인디 지금은 개인 집이 되다시피 있소.
더이상 험한 이야기 나오기 전에 말꼬리를 돌리는 게 좋을 듯 싶어, 다시 피신할 때의 상황을 물으니 손자 윤건하는 숨기고 싶은 가족사의 뒷이야기까지 털어놓는다.
피난은 대덕으로 갔지요. 무서웠지요. 그쪽에 천태산이라고 있어요. 백운면에 정소사 절도 있고 골짜기도 많지요. 거기서 한 40일간 피신했던 갑디다. 이제 여기 집은 없고 그때 바로 위 형수씨가 계셨어요. 그전에는 그렇게 반갑게 하덜 않았지. 다들 배는 고프고 그란께 넘의 집에는 못 가고 형수씨한테 가니께 앉았으라고 하면서 대접을 하더래요. 그라고 형수씨가 나가서 “육도 왔다네” 소리를 지른께 사람들이 모일 것 아니요. 그때만 해도 총을 갖고 댕겼다 합디다. 얼른 말해서 노리쇠 그것을 들거덕 들거덕 한께는 전부 도망가 버리지요. 그래갖고 보도시(어렵게) 도망을 가갖고. 집안 식구들은 놔두고 일단 대덕으로 갔고, 그 뒤로는 몰라요.
대덕에 일단 식구들을 피신시키고 농민전쟁의 수습도 끝나고 세상의 눈초리가 잠잠해 지자 다시 교단 활동을 벌였다는 윤세현은 서울을 오가다 체포되어 40여 일간 구류당하는 고초도 겪었단다.
그 뒤로 얼마나 됐던가는 모르제. 여기서 교를 잘 믿고, 그 양반 처남네들이 지금으로 하면 비서만치로 따라 댕기고 했대요. 세 사람을 데꼬 장성인가 어디를 가다가 또 붙들렸던 갑디다. 그래 가지고 저 사람들은 죄가 없다고 해서 그 양반들은 미리 보내고 우리 할아버지만 거기서 잡혀갖고 40일인가 얼만가 구류를 살고 나오셨다 합디다. 그 후로도 조부께서 바깥일만 열심이었다 그래요.
가장이 교단 일에만 관심을 쏟고 가정 일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으니, 먹고사는 일은 어떻게 해결했을까. 그때 가족들의 고통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무섭게 옹색받았던 갑디다. 고생도 하고. 내가 일곱 살 때까지 거기서 살았으니께. 할아버지 돌아가신 뒤로 해방 2년 전에 고향으로 왔지요.
그 후로 농사일에만 매달렸다는 손자 윤건하의 두 손은 100여 년 전 죽창을 쥐었던 농민군의 억센 손이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