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이겸호(李兼浩)
1874~1957. 인천(仁川) 이씨. 농민군에게 군량을 운반해주다가 장흥 석대들 전투에 참가하였고, 전투에서 패하자 보령산 절에 피신해 있다가 무사귀환한 후 농사일에만 전념. 그때 갖고 온 조총이 집안에 보관되어 왔음.
이인흠(李寅欽)
1927~ . 전남 장흥군 용산면 어서리에서 농업에 종사.
1947~ 장흥군 용산농협에 부장으로 근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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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윤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
할아버지가 태어나고 생활하던 곳에서 살고 있는 이인흠은 당시 집안 이야기부터 풀어놓는다.
조부님은 바로 여기서 태어났지요. 조부님 살던 데 그대로 제가 지금 살고 있지요. 증조부님도 여그서 사셨고 바로 이 옆에가 큰집인데, 큰댁에서 태어나가꼬 여기로 제금 났제. 그래가지고 이때까지 농사지었죠. 증조부님은 글을 많이 하셨고, 조부님은 아무래도 일을 많이 하셨고 글은 많이 못하셨는디, 큰 조부님보다 머리는 영리했다지. 그 양반이 글은 많이 못했어도 우리 문중일은 많이 하셨어요. 큰댁 살림은 논 한 20마지기 있었어요. 증조부님이 살림이 많았는디 동네일 하시면서 동네 뒤에 묘를 썼다가 고소사건 때문에 다 망해부렀답디다.
그런대로 살 만했던 이겸호는 농민군에게 식량을 운반해주다가 석대들 전투에 참가한 특이한 예를 보여준다. 당시 형님의 심부름으로 농민군 진영에 쌀가마를 지고 갔던 이겸호는 피아간에 대치하고 있는 상황을 도저히 지나칠 수 없어 총칼을 들었다는 것인데, 그 증언을 들어 보자.
처음에 자기 형님이 그때 지금 같으먼 군청에 세금수납원 같은 것을 했던 모냥입디다. 그 연유로 동생을 심부름 많이 시켰지요. 조부님은 많이 배우던 못했지만 사리판단 같은 것은 나았던 갑습디다. 대종사에 대표적으로 많은 일을 하셨어요. 종찬[이방언 장군의 증손]이 촌수를 셀 만큼은 아니고 장흥의 한 파제. 여그 용산서 시제도 같이 모시고 그래요. 종찬의 증조부님인가 그 양반들이 일을 해달라고 해서 출입을 했던가벼. 그때 식량이 가장 문제 아니었소. 그랑께 큰조부님이 식량 좀 갖다줘라 해서 보냈던 모양입디다. 거기를 다니다가 내용을 들어본께 자연히 가담하게 되었던 갑디다. 누가 오라 해서 간 것도 아니고 내용은 잘 몰라요. 사람들이 어느 면에 누구한테 가면 식량 좀 줄 것이다 해서 심부름을 했는 갑디다 작은아버지께서 말씀하셨는디 처음에는 식량을 가지고 한번 가셨어요. 그래가지고는 합세를 하자 이런 얘기를 듣고 그랑께로 이 양반이 거기로 가셨어. 장흥 저 석대들로 가셨어요.
그러니까 석대들로 간 그때가 1894년 12월 15일 전이었을 것이다. 농민군은 용산(蓉山)·웅치(熊峙)·부산(夫山) 세 방면에서 포위망을 좁히며 장흥부를 압박하였다. 봉우리마다 기를 꽂아놓고 함성을 지르며 포를 쏘아대는 농민군의 위세는 관군의 간담을 서늘하기에 충분했고, 이런 전세에 압도당한 관군은 이렇게 적었다.
3만 명이 높은 봉우리 아래로부터 북쪽 후록 주봉에 이르기까지 산을 채우고 들에 퍼진 것이 수십 리에 뻗쳐 있다. 모든 산봉우리 나무 사이마다 기를 꽂아 소리를 지르고 포를 쏘며 기세를 높였다. 세력이 너무 커 감당하기 힘들 것 같다(『순무선봉진등록』12월 20일조).
정면 대결이 불리하다고 느낀 관군 쪽에서는 농민군을 분산시켜 싸우기로 하였다 통위영군은 북쪽 주봉의 농민군을 막고 교도중대와 일본군은 성모서리 대밭에 숨어 있으면서 30명의 민병을 내보내어 농민군을 산에서 석대들로 유인케 하였다. 농민군이 주변 계곡에서 석대들로 쏟아져 내려오면서 민병을 공격하자 숨어 있던 교도중대와 일본군이 양쪽에서 협공하였다. 관군의 유인술인지도 모른 채 내려온 농민군은 관군의 총격에 삽시간에 수백 명이 쓰러졌다. 농민군도 응사했으나 구식 화승총으로는 관군을 쉽게 무너뜨릴 수 없었다. 농민군은 뿔뿔이 흩어져 자울재를 넘어 용산 쪽으로 후퇴하였다(『순무선봉진등록』12월 20일조) 12월 16일 관군은 방문을 내걸어 민심을 관군 쪽으로 유도하고, 17일에는 교도중대가 남면 40리 거리의 죽천(竹川)장터에까지 나아가 수색전을 펼쳤다. 이때 옥산리(玉山里 : 지금의 관산읍 옥당리)에 둔거해 있던 농민군 5천여 명은 포를 쏘며 반격했으나 오히려 농민군 100여 명이 포살당하였고, 20여 명이 체포되고 말았다(『무선봉진등록』12월 20일조). 쌀가마를 내려놓고 화승총을 쥐고 농민군의 대열에 끼어 석대들로 달려갔을 이겸호. 부싯돌로 연방 불을 붙이며 “빵빵” 관군과 일본군을 향해 쏘았으나 관군의 작전에 말려 오히려 퇴각해야 했으니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울재를 넘어 곧장 보령산으로 달려갔다.
거기서(석대들) 자세한 전투 이야기를 안하신께 모르것는디 처음에 거기서 쫓겨가지고 보령산이란 데로 갔대요. 용산서 제일 큰 산이죠. 장흥이 재를 넘으면 여기서 가직해요. 재를 넘으면 이십 리 밖에 안되거든요. 거기 산에 절이 있승께 후퇴를 하면서 거기까지 쫓겨와가지고 절터로 숨었든 갑습디다. 절 어디에 요로코롬 자빠져가꾜 있능께로 관군이 다가와서는 눈까풀을 팍 벌리고 훅 불더란 거예요. 죽었는가 살었는가. 그래 가만히 있능께 안 죽여불고 가버링께, 그라고 밤은 어둑해져 불고 동네서 듣기는 거그 간 사람들 다 죽었다네 소문이 난께는 작은아버지들이 4형제 아닙디까? 지게를 젊어지고 송장 찾을라고 갔다고 헙디다. 그래 가본께로 조부님이 내려오시더랍디다. 그래서 모시고 오셨어.
이겸호는 그렇게 해서 구사일생으로 귀환했다. 그런데 겸호의 손에는 화승총이 쥐어져 있었고 그것이 100년 세월 동안 그 집 선반 위에서 고이 보관되어 왔다고 한다.
곤말리 밑에 그 총이 있었어요. 내가 보기에 조총이라고 그라더만요. 그라니까 그때는 옆에 뭐가 달렸고 무서운께로 속에다 여놔분께 썩어부렸어요. 쇠만 있은 놈을 저집을 새로 지음시로 내가 선반에다 옮겨 놨지라. 그랬는디 여그저그 그 얘기를 헌께로 이종찬이가 이놈 갖다가 저기 조부님 이름 써서 유물관인가에 놀란다고 가져갔어요. 그래서 증거란 것은 물품 그거 하나밖에 없어. 올봄 2월에나 3월에 가져갔을 거요. 조총은 쇠막이 요롷고 되어가꼬 거기다가 요로콤 귀매니게로 있더만요, 옆에가, 거기다가 부싯돌로 탁 쳐가지고 옛날 담배 필라면 부시 안치요. 그때 옛날에는 성냥이 없능께. 부시를 쳐가지고 귀에다가 부친다고 그럽디다. 총대만 있어요. 총대가 파라니요, 청잔가 총대에가 붙여져 있어요.
집에 돌아온 이겸호는 조용히 농사지으며 살았다. 그러나 그 아들들은 일제 식민지시기 나라를 구하려는 대열에 다시 뛰어들었으니 피는 물보다 진하다든가.
그냥 여기서 살으셨는 갑습디다. 본래 큰 본부는 장흥 석대 거시기긴데 쫓겨서 여그까지 왔던 갑디다. 이후로는 쪽 농사를 지으셨지요. 내가 듣기로는 큰 활동은 안하신 것 같아라. 그 후 일제시댄디요. 작은아버지들이 여기서 같이 살았는디 결혼하고도 제금 못나고. 그때 사회주의 뭐 한다고 해가꼬 밤에 와서 일본놈들이 잡아간 사람들이 많았어. 우리 작은아버지도 둘이나 잡혀갔어. 장흥경찰서 무덕관에 한 달인가 두 달인가 징역살다가 오시고 해서 그런 애기를 못해요. 일본교장이 쫓아와서 총으로 엄포를 놓고 해서 내가 11살에 할 수 없이 국민학교를 가서 6년 동안 꼬박 일본말로 배웠는디요.
그때 이인흠은 이런 집안환경 매문에 제대로 교육을 받을 수 없었고 스무 살에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스무 살이라고 하면 지금 같으면 거시기 하지만 옛날이먼 어린 편이 아니요. 내가 스무 살 먹었을 때 객지로 나가부러놔서. 지금은 스무 살 먹으면 고등학교 마칠 나이지만, 나는 국민학교밖에 안 나왔고 그쯤해서 객지로 다녔어요.
그 후 군에 갔다오고 집안일을 떠맡아야 했던 이인흠 노인은 바로 조부가 태어나고 살았던 집에서 지금까지 농사일에 종사해오고 있다. 석대들 쪽의 하늘을 바라보는 이옹의 눈은 그 옛날 조부가 조총을 들고 싸우는 모습을 찾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