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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록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용산면 집강으로 활약한 이백호, 증손 문갑
대상인물

이백호(李栢浩)

1844~1895. 1. 23. 유림 집안 출신으로 용산면 집강으로 활약하다가 장흥 전투에 참가하여 처가에 피신해 있던 중 체포되어 화형당함.

증언인물

이문갑(李文甲)



1940~ . 본명은 영채. 장흥군 관산읍에서 철물점 운영. 서울에서 유족회 모임이 있을 때면 장흥 지역 회원들을 승용차로 모셔옴.

1960~ 광주에서 건설업에 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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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도
가계도 이미지
정리자

우윤

출전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

내 용

이백호의 아버지는 장흥향교에서 향선생을 할 정도로 한학을 한 유생이었고, 백호 또한 그러한 아버지 밑에서 한문을 일찍 접했을 것이다. 완전히 농사일에만 전념한 농사꾼 집안은 아니었다.

고조부님은 학덕이 아주 많아 향선 생활을 하셨어요. 긍께 증조부께서도 많이 배우셨겠죠. 장흥 향교에서 향선생을 하셨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고등학교 선생은 되제. 훈장이라 하면 시골에서 한문서당을 했고 향교에서 훈장을 하실 정도면 상당한 실력이 있었제. 이번에 책자를 신문에다 게재한 어떤 교수가 전부 답사를 했어요. 이따 보시면 알 겁니다.

몇 명의 하인을 집에 두고, 경우에 따라 소작인을 둘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고 한다.

그때는 농사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그 할아버지 때는 소작을 주었겠죠. 재산은 당시 하인들을 둘 수 있는 재력이었으니까 대단한 재력가였겠죠.

그러한 집안 환경에서 이백호가 동학에 입도하고 농민전쟁에 참여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는 감히 그러한 낌새를 보일 수 없었다. 아버지는 백호가 장차 자라 무사가 되라는 뜻으로 자를 무경(武卿)이라 지었고, 그 때문인지 백호는 어릴 때부터 학문 연마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무예에도 능했다 한다. 그러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백호는 아버지가 살아있을 적에는 동학에 참여를 못하고 있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동학에 입도하였다.

고조부님이 돌아가신 다음에 참여를 했죠. 그때야 유림계에서 동학에 참여한다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제. 돌아가신 후 3년상 지나 완전히 아버지 복을 벗고 했지 않았겠냐 이렇게 보죠. 쉰한 살엔가 돌아가셨어요. 그러니까 상당히 나이가 많으셔서 참여를 했지요.

부친상을 마치고서야 동학에 입도할 수 있었던 이백호는 그래도 학식과 집안배경으로 쉽게 책임자의 위치에 올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번 신문(『조선환경신문』1995. 5. 31, 6. 21.)에도 집강을 하셨다라고 실었습니다마는 할머니가 하신 말이 아니고 지금 나이가 한 팔십 되신 어르신께서, 우리하고 같은 농민운동의 후예인 그분이 당시 너희 증조부께서 용산면 집강을 하셨네. 그때 당시 아주 산천초목이 떨었느니라, 이렇게 이야기를 하시대요. 그런께 이종찬 씨 증조부(이방언 장군) 그 어르신하고 숙질간이거든. 집안에서도 아주 가까운 처지여서 가깝게 지냈지, 이방언 장군이 나이가 어리고 증조부가 나이가 많지. 이방언 장군이 이 양반한테 전적으로 맡기고, 이방언 장군은 외부를 맡아 다녔겄지 않았냐, 그래서 집강을 맡으셨다고 생각하지요.

용산면의 집강으로 활약했던 이백호는 장흥 지역의 총대장 격이었던 이방언과 숙질간이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장흥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가하였을 텐데, 정확하게 어떤 전투에 참가하였는지 알 길이 없어 다만 추측만 할 따름이라는 증손 문갑의 말을 옮기면 이렇다.

얘기를 들으니 그때 당시 병영에 나가셨고 관산 이북에 옥산 거시기 있거든요. 거기서 관군한테 밀렸잖습니까, 그래가꼬 관산으로 넘어왔고, 관산서 또 밀리니까 처가집으로 갔지않았냐, 나는 그렇게 봐요.

그때 병영과 옥산리에서 농민군들은 어떻게 싸웠을까. 남아있는 기록에 따라 정리해보자.

장흥 읍성인 장령성을 점령한 장흥의 농민군은 12월 6일 오전 10시 쯤 벽사역 뒤 언덕으로 진을 옮기고 오후 2시쯤에는 장흥과 강진의 경계인 사인점(舍人店 : 현재 장흥읍 송암리) 앞들에 집결하였다. 7일 오전 8시중 사인점에 집결해 있던 농민군이 강진현을 들이쳤다. 현감은 나주에 구원을 요청하러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농민군은 이런 허점을 찔렀던 것이다. 농민군은 강진현을 함락시킨 여세를 몰아 강진, 장흥 양방면에서 병영을 압박해 들어가 성의 서쪽 10리쯤에 있는 군자촌에 진을 치는 등 성의 사면을 포위하여 12월 10일 새벽 2시 쯤 총공격에 나섰다. 농민군은 병영을 둘러싼 세 봉우리를 먼저 점거하고 일제히 대포를 쏘았다. 포화는 성을 향해 쏟아지고 화약연기는 하늘을 가렸다. 농민군이 목책(木柵)에 불을 지르고 성가퀴를 올라가자 수성군은 스스로 무너졌다. 이 통에 우후 정규찬, 감관 김두흡, 군교 백종진, 전 도정 박창현 등이 전사했으나 병사 서병무는 두루마기 차림에 패랭이를 쓰고서 피난하는 사람틈에 섞여 영암 쪽으로 달아났다. 이로써 강진병영도 점령되었다(『오하기문』3필 12월 10일조). 강진 병영은 태종 17년(1417)에 병영성이 축성되어 호남에서 전주성 다음으로 중요한 군사상의 중심기지로서 군사력이 막강한 만큼 그에 따른 수탈 또한 극심했을 뿐만 아니라 부근의 농민군을 진압하던 본거지였다. 이 전투에서 병영은 깡그리 불타 잿더미로 변해 1895년에 폐영이 되고 말았다. 이때 인근의 농민군은 차츰차츰 남쪽으로 모여들어 그 수가 엄청나게 불어났다고 하는데, 장흥에 집결한 농민군은 건산리 뒷산 장흥 모정등(茅亭嶝)에 본진을 두고 있다가 관군과 일차 접전하고 석대들로 물러가 진을 치고 있었다(『오하기문』3필 12월 12일조). 12월 15일 교도중대와 일본군이 장흥읍에 도착하여 좌선봉 이규태의 통위영군과 합세하였다. 농민군이 먼저 싸움을 걸었다. 농민군은 장흥의 주변 산과 들판을 차지하고 봉우리마다 기를 꽂아놓고 함성을 지르고 포를 쏘아댔다. 이런 전세를 바라보는 관군의 기록에 “3만 명이 높은 봉우리 아래로부터 북쪽 후록 주봉에 이르기까지 산을 채우고 들에 퍼진 것이 수십 리에 뻗쳐 있다. 모든 산봉우리 나무 사이마다 기를 꽂아 소리를 지르고 포를 쏘며 기세를 높였다. 세력이 너무 커 감당하기 힘들 것 같다”(『순무선봉진등록』12월 20일조)고 하여 농민군의 세력이 대단했음을 알려준다. 통위영군은 북쪽 주봉의 농민군을 막고 교도 중대와 일본군은 성모서리 대밭에 숨어 있으면서 30명의 민병을 내보내 농민군을 산에서 석대들로 유인케 하였다. 농민군이 주변 계곡에서 석대들로 쏟아져 내려오면서 민병을 공격하자 숨어있던 교도중대와 일본군이 양쪽에서 협공하였다. 농민군은 삽시간에 수백 명이 쓰러졌다. 농민군도 응사했으나 구식 화승총으로는 관군과 대항할 수 없어 농민군은 자울재를 넘어 용산 쪽으로 후퇴하고 말았다(『순무선봉진등록』12월 20일조). 다음날 관군은 방문을 내걸어 민심을 관군 쪽으로 유도하고 17일에는 교도중대가 남면 40리 거리의 죽천(竹川)장터에까지 나아가 수색전을 펼쳤다. 옥산리(玉山里 : 지금의 관산읍 옥당리)에 둔거해 있던 농민군 5천여 명은 포를 쏘며 관군을 공격했으나 오히려 농민군 100여 명이 포살당하였고 20여 명이 체포되었다(『순무선봉진등록』12월 20일조). 장흥에 모여 북상을 꾀하였던 농민군은 이 싸움을 끝으로 주변으로 흩어졌는데, 주로 천관산 일대에 몸을 숨겼다. 어떤 전투에 참여하였는지 그것이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는 한 이백호의 행적을 온전히 복원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때 정황과 주변의 증언으로 봐서 위에서 정리한 장흥 일대의 전투에 농민군의 일원으로 참가한 이백호를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다만 밀고 밀리는 전투 가운데 농민군의 패색이 짙어지자 백호는 몸을 빼어 달아나야 했고, 그래서 백호가 은신처로 정한 곳은 안양의 하양리에 있는 처가집이었다. 동료 두 명과 함께 숨어있던 백호는 주변의 밀고로 체포되고 말았다. 그때의 사정을 꽤 자세히 전하는 신문 연재 글이 있어 옮겨 보자.

이 전쟁[석대들 전투]에서 이백호는 다리에 큰 부상을 입었다. 두 명의 부하 동료들의 부축을 받으며 자울재 너머 어산리 본가에서 1박 2일의 치료를 받고, 17일 새벽에 다음 전투장을 향해 식구들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절뚝거리며 집을 떠났다.[옥산리 전투 후] 이백호는 모질게 살아남아 부하 동료 두 명과 같이 고읍 요전의 외가집에 잠깐 피신해 있었다. 다시 천관산의 토굴 속에 숨어있다가 기아와 혹한 때문에 토굴 속에서 나와 민가를 찾았다. 방촌 뒷산을 넘어 신동의 해변가를 타고 간 곳이 지금의 용산면 남포의 민가였다. 포의 민가였다. 여기서도 오래 있을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안양의 하양리 처가집에서 은신하였다. 그때가 갑오년이 지난 이듬해인 2월 초순이었다(『조선환경신문』1995년 6월 21일자).

우리가 성장해부니까 할머니가 증조부님 말씀을 해주시더라구요. 당시 왜군들과 합세해서 동학운동하시는 분들 잡으러 다녔잖습니까? 안양 하양리라는 데가 있는데, 거기가 그 양반(증조부) 처가집이 있어요. 거기서 은둔해 계시다가, 처가집에 있다는 밀고가 들어가 잡혔어요. 거기에 세 분이 은신해 있었는데 다 잡혀 가지고 어떻게 되었냐면, 마을 앞 논에다가 겨울이라 유지기를 씌워놓고 불로 화형사를 해서 돌아가시게 한 모양이에요. 같이 은신했던 사람들 이름은 몰라요. 같이 활동한 친구였겠죠. 그런께 증조할머니 3동서가 거기 같이 계시다가, 그때는 무조건 총살 아니면 대창으로 찔러 죽이니까 못 가고 먼 데서 보고 있다가 그 사람들 가버린 뒤에 시체를 초석으로 몰아 머리 위에다 이고 오셨다는 거예요. 용산면 월림리라는 마을이 있는데, 거기 야산에다 안장하셨더랍니다. 이고 와서 갑오년 동란 때는 생존했는데 그 다음해 관군하고 일본군하고 합세해서 죽인 거죠. 1895년도 정월달인가 될 거예요.

북풍한설이 몰아치던 1895년 1월, 이백호가 체포되어 유지기를 쓴 채 화형을 당하자 증조모는 용산면 월림리 야산에 백호를 묻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살 수 없어 이사까지 해야했던 남은 식구들의 삶이란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농민전쟁에 참가한 덕분에 집안은 풍비박산 거덜나고 말았던 것이다. 어릴 적부터 그때의 상황을 자주 들어왔던 증손 이문갑은 이렇게 서두를 꺼냈다.

할머니께서 당시에 하시는 말씀이 너의 증조부님께서는 동학운동을 하시다가 돌아가셨다. 그때 당시는 어떤 결과가 있었냐 하면 역적이었죠. 그래서 가사가 완전히 풍비박산이 되어 버렸겠죠. 원래는 용산 어산리서 사시다가 생계가 곤란하고 도저히 거기서는 역적으로 몰리니까 살 수가 없잖습니까. 그래서 할머니하고 할아버지하고 용산면 재송리(齋松里)라는 데로 이사를 오셨어요. 거그서 어렵게 살으셨겠죠. 그때 당시는 도보로 다닐 때고, 거리가 6km 돼버리니까. 어떤 상황이 벌어진지, 이분들이 어떤 분인지 주변에서 모르니까 근면하게 노동으로 사셨겠죠.

이문갑의 조부는 백호의 셋째아들이었다. 홀어머니 밑에서 제대로 살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이문갑은 약간은 투정이 섞인 말투로 그 형제들의 삶을 들려주었다.

조부님은 셋째아들이죠. 그 형제간들은 전부 건달이제. 전부 망해부렀제. 그라고 있다가 후손들이 근면하니 해서 살 수 있었지. 조부님께서는 용산면 바로 재 너매 재송리 사시다가, 생활이 아주 그래불고 나니까 일도 안하고 건달로 살았어. 아버진 무학자셔. 집안이 풍비박산이 되어버린께 도저히 그런 점에 관심이 없고 우리들처럼 근면하게 벌어먹고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없고. 그렇게 당하니까 의욕심이 없어져 버리제.

아버지(이문갑의 조부)로부터 별로 물려받은 것이 없었던 이문갑의 아버지마저 건달로 지냈다고 하지만 이문갑의 백부는 열심히 살았단다.

그러니까 백부님이 고생을 많이 하셨죠. 완전히 자력으로 해서 할아버지 때는 없이 살았지만 백부님 때는 근면성실하니 해서 부귀영화를 누렸죠. 백부는 순전히 노동으로 살았죠. 바로 재 너매 재송에서. 그란께 자기 일에 항시 일꾼 셋씩은 데리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순전 농사로 해서. 그 양반 아버지께서 곤란하게 사셨으니까 아무래도 피눈물 나는 점이 많았을 것 아닌가? 그래서 근면하니 성실하니 해서 자기 대에는 일꾼을 세 명씩이나 델꼬 있었어.

이문갑으로서는 별로 유쾌한 기억이 아닐 테지만 아버지는 건달이었지만, 자신은 근면하게 살아야 했다고 했다.

아버님은 일에는 벨로 관심 없었어요. 아버님이 관심이 없었시니까 내가 인자 근면하게 해야제. 재송서 살다가 16살 때 요리[관산] 왔으니까 약 한 40년 안 됐습니까. 나는 젊어서부터 쭉 철물상했어.

이제는 제법 기반을 잡은 이문갑이다. 그리고 아들들도 장성해서 모두 한 몫을 하고 있단다. “큰놈은 광주에 가 건설업하고 있고 전화받은 둘째놈은 가스사업하고 있고”라고 말하는 이문갑의 얼굴에는 흐뭇한 빛이 역력하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증조부의 일을 떳떳하게 말할 수 있게 되어 후손으로서 큰 짐을 덜었다는 안도감을 감출 수 없는 이문갑의 손은 벌써 쇠처럼 단단하게 쥐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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