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남창희(南蒼熙)
1850~?. 의령 남씨. 경남 창령군 연산면 옛 영산현에서 ‘동학농민혁명’ 영산봉기 주동.
남기호(南基鎬)
1935~ . 동아대학을 마치고 악극단, 부산문화방송 탤런트, 조선방직 도서실장을 지냄. 뒤늦게 군 제대 후 부산일보, 경남매일신문을 거쳐 지금은 성수동에서 상업에 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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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성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
양반 유생으로 농민전쟁에 참가했던 사람들이나 농민군에 협조했던 관리들은 더러 있다. 그러나 중앙에서 벼슬을 살던 유생이 봉기에 앞장 선 경우는 흔치 않다. 그런 점에서 경상도 영산현에서 봉기를 주도했던 남창희는 드문 보기 가운데 하나이다. 다른 집안과 달리 증손 남기호 집안에서는 음력설이나 추석 명절 때 또는 제사를 지내고 나서 늘 어른 되는 분이 족보 같은 것을 꺼내 놓고 집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가 어릴 때는 이런 말을 들어도 귀찮고 차남이기도 해서 크게 마음을 쓰지 않았다. 좀더 커서 중·고등학교 다닐 때 할아버지가 들려주었던 이야기들이 기억에 남아 있다.
우리 집안에서는 음력설이라든지 추석이라든지 제사를 지내고 나면 항상 우리 집안 내에서 어른 되시는 분이 족보라든지를 내놓고 쭉 집안 얘기, 선조들 얘기를 해요. 근데 어릴 때는 그저 귀찮고 잘 안듣거든. 형님이 계셨으니까, 그걸 별로 안듣고 예사로 생각했는데, 방학 때 할아버지가 항상 얘기를 해주시니까 그걸 들었던 거지요. 제가 중학교, 고등학교 학창시절에 방학이 되면 항상 사랑방에서 할아버지하고 같이 자거든. 그 할아버지가 날 좋아하셨고, 나도 할아버지를 따랐고. 여름철 같은 때 보고 내가 공부 안할 때는 항상 할아버지가 얘기를 해주시거든. 그래서 내가 알지.
증언자 기호는 증조 남창희가 진사에 급제하고 성균관에서 공부하다가 홍문관에 들어갔으며, 대원군의 밀명을 받고 동학의 움직임에 관심을 가지다가 복합상소에 연루되어 낙향하였다고 한다. 고향에서 지내던 창희는 농민전쟁이 벌어질 때 문중을 모아 시위를 이끌었다.
진사 급제하고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대원군이 남인 계통을 썼지 않습니까. 문과급제 할라고 문과시험 칠라고 준비중인데 인재가 없으니까 와서 벼슬해라 벼슬주마 그 길로 들어간 거지. 그래 홍문관 벼슬에 들어가 가지고 대원군이 동학교 교리를 좀 파악해서 나한테 알려주라는 밀명을 받으신 거예요. 그 바람에 동학교도들 하고 자꾸 만나고 동학 교주도 만나고 동학 교리를 파악하기 위해서 학문을 하기 위해서 필요하니까, 또 대원군한테 자기도 얘기를 해줘야 하니까 늘 지냈는데, 그 보강상소[복합상소?] 있지 않습니까? 할아버지 얘기는 대궐 앞에 가서 데모 비슷한 항의를 했다고 해요. 역사책을 이리 보니까 그게 아마 보강상소인 거 같아요. 내가 유추해보건대, 거기에 연루가 되었거든. 낙향을 하셔가지고는 술도 좋아하시니까 시나 짓고 자기 아버지 모양으로 산천구경이나 하고 왔다갔다 이랬는데, 지나다가 사방 동학 혁명이 나니까 거기서도 해야 되겠다. 이래서 먼저 문중이 모인거지. 문중에서 현감들도 나쁘고 이러니까 뭐 요새 같음 데모하자 이러니까 다 따랐거든. 저기 가면 부곡면 학포리가 있어요. 구산리도 있고. 거기가 우리하고 파는 다른데 같은 남씨들이거든. 그 사람들하고 해가지고 혁명이 일어난 거지. 말하자면 창자 희자 할아버지가 우두머리인 셈이지. 싸움을 했다는 그런 말은 못 들었고 장날인가 그랬대요. 요새 같으면 데모 식으로 했는데 관군들이 모여들고 관에서도 난리를 쳤을거 아닙니까. 결국 쫓겨난 거지요. 무기 앞에서 꼼짝을 못하니까. 도망해 가지고 집에 들러서는 가재도구 대충대충 챙겨가지고 밤잠도 못자고 바로 그냥 도주해삐렸으니까.
남창희가 성균관에서 공부하다 홍문관에 들어간 때가 언제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홍문관 박사까지 지냈다고 한다. 그가 홍문관에 있으면서 대원군의 밀명을 받고 동학의 움직임을 파악하던 때는 삼례집회·복합상소가 일어나던 1892, 93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대원군은 1893년 3월 보은집회 때 가까운 동학도를 보내 낌새를 살폈다고 하고, 1891년부터 전봉준과 만났다는 소문도 있는데, 이 증언을 통하여 대원군이 1894년 이전부터 동학운동의 움직임에 깊이 마음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 증언은 영산현에서 의령 남씨가 이끈 봉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영산현 봉기의 성격이 농민전쟁의 주 흐름과 연결이 되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봉기 사실을 알려주는 자료도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어쩌면 영산현 봉기는 1894년 8~9월 경상도 60여 군에서 일어났던 농민항쟁 가운데 하나로서 대원군의 영향을 받아 개화파정권과 그 세력에 반대하는 봉기일 수도 있다. 창희가 영산현의 봉기가 해산당한 뒤 처가가 있던 영동으로 몸을 피해 충청도 ‘동학혁명’에 참가했다는 증언으로 미루어 그렇게 짐작해보는 것이다. 영동에서 ‘동학혁명’에 참가했던 창희는 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뒤 10년도 넘게 어느 암자에 숨어 지내다가 최익현 의병에 들어가 전라도를 돌아다녔다고 한다.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킨 때가 1906년 6월이니 창희의 나이 57세 때의 일이다. 최익현은 6월 4일 태인에서 봉기하여 정읍, 곡성을 거쳐 순창으로 나갔다. 그러나 최익현 부대는 그달 12일 전주와 남원의 진위대 병사로 구성된 토벌대가 도착하자 스스로 무장을 해제하고 해산하였다. 최익현 의병이 활동한 날은 열흘에도 못미쳤던 것이다. 그가 최익현 의병에 들어갔다 해도 서울로 잡혀간 최익현과 12명의 이름 속에 없는 것을 보면 중심 노릇을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는 결혼하여 딸 둘을 낳고 아들이 없어 동생인 사희의 아들을 양아들로 삼았다. 딸 둘은 시집을 보냈지만 몸을 피해다니면서 아들을 제대로 챙길 힘도 없고 위험부담도 커서 다시 동생인 본아버지에게 돌려보냈다. 의병활동 이후 창희가 어떻게 살다 돌아갔는지는 알 수 없다. 따라서 묘도 없다. 다만 돌아갔다는 소문을 들은 때가 1935년이어서 1935년 9월 9일을 제삿날로 정하여 증조모 묘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남창희가 이러한 봉기에 앞장 선 것은 아버지의 삶에서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증언 가운데 “아버지 모양으로 산천구경이나 하고 왔다갔다 이랬는데”라는 말이 있다. 그의 아버지 남정상은 왜 구경이나 하고 왔다갔다 했을까. 정상의 생활에 대해 들어볼 필요가 있겠다. 정상은 1867년 문과에 합격했으나 일 년 전인 1866년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으로 처형된 남종삼과 한집안이라고 해서 바로 합격이 취소되었다. 그 뒤 정상은 그러한 현실에 불만을 품고 떠돌이 생활을 계속하였다.
고조부가 진사급제 하고, 또 무과도 급제를 하셨거든. 그래 문과급제해서 올바른 벼슬길에 나간다 해가지고 무과급제를 했어도 벼슬길에 안 나갔어요. 공부를 계속 하셨단 말이여요. 무장 노릇은 안하고, 문과를 해가지고 올바른 길로 벼슬길 나간다는거지. 1867년에 문과급제를 하셨어요. 방을 보시고는 합격했으니 기뻐서 돌아갈라고 했는데 친구 만나고 이랬을 거 아닙니까? 그 이튿날 돌아갈라고 했는데 친구들 얘기가 방에서 떨어졌더라는 거여. 무엇 때문이냐 하니까 카톨릭 신자 집안이라서 안됐다는 거야. 저 남종삼 씨가 천주교 신자로 시해당하신 분 아니십니까? 그분하고 우리가 가까운 일가니까 친하게 지내고 이래 가지고 오해를 많이 받았어요. 그래가 문과급제를 했는데도 천주교 신자다 이거지. 이 모함이 들어가 가지고는 삭탈관직을 가해 뿐기래이. 오늘 방이 붙었는데 내일 불합격이란 식으로 돼뿌렀거든. 그때부터 세상이 더럽구나. 내가 지낼 세상이 아니다. 이래가 집에도 안 돌아오시고 그때부터 바랑 짊어지고 전국 일주해서 산천경계 구경이나 하고 돌아다니시고 전현 집에 안 오셨지요.
남정상이 벼슬을 권유받은 적도 있다. 아들 창희가 진사 급제하여 성균관에 있을 때, ‘아버지가 억울하게 낙방됐다’고 상소하자 정부에서 오위도총부의 무슨 벼슬을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끝내 벼슬을 살지 않고 돌아다니다가 객사하였다.
창자 희자 할아버지가 자기 아버지에 대한 억울한 사항을 상소를 하셨거든. 진사 급제하고 성균관에 계실땝니다.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지. 자기 아버지에 대한 잘못된 점이 있는데 억울하다, 이거 풀어달라 상소를 했어요. 그거이 확인이 돼가지고 이상이 없다 해서 풀어 줬어요. 풀어져가지고 오위도총부 뭐라나 그런 벼슬을 준다고 했는데 결국 고조부가 안 받으셨어요. 그런 거 필요없다고. 세상이 안 좋으니까 벼슬길에 안 나가겠다. 그냥 전국 유람하며 살겠다. 그러고 살다가 결국 객사를 해가지고.
정상이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집안을 돌보지 않으니 부인의 마음고생은 말할 수 없었다. 죽어서라도 고향에서 좀 편안하게 쉬고 싶다고 해서 부인의 묘는 1984년 이장할 때까지 밀양 상남면 중리에 있었다.
고조모님이 하도 고생을 하고 이러니까 싫다는 거여. 한 마을에서 일가들이 도와주고 집에 재산도 많이 있었고 집사를 두고 하인들도 있고 그랬으니까 농사야 식구들이 다 지어주지. 뭐 인자 남편이 하도 외박에만 돌고 집에 안 돌아오고 집안일을 돌봐주지 않으니까 싫다 이거지. 그래가 내 죽거든 제발 내 친정마을 바깥에 어릴 때 뛰놀든 데 거기에 묻어달라 해서 고조모는 친정에 묻힌 거지.
아버지 정상이 그렇게 객사를 하고, 아들인 창희도 ‘동학혁명’에 참여하자 많던 재산은 모두 빼앗겼다.
우리가 듣기로 동서남북 사방 10리 길은 전부 우리 땅이었다. 남의 땅은 안 밟았다. 뭐 이런 얘길 들었으니까. 원래 7대조 때 가난하고 하니까 벼슬은 했고 이러니까 정조 임금이 땅을 준 겁니다. 동학혁명 전까지는 유지했죠. 그 재산보고 돌아갔다간 죽을 건데, 그러니까 다 포기하고 내버린 거지 뭐. 정부에서 몰수해버린 거지.
창희의 큰아버지, 작은아버지는 경북 고령으로 몸을 피해 눌러 살았다. 영산현에서 봉기가 있을 때 동생 사희는 창원 경주 이씨 집안에 장가가서 그곳에 살고 있었다. 동생 집안은 위험이 닥치자 함경북도 북청까지 피신했다. 그곳에 숨어살다 조용해진 뒤 다시 창원으로 돌아왔다. 가지고 있던 농토는 소작을 주고 옮겨갔기 때문에 돌아와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창희의 동생 사희가 바로 증언자 기호의 친증조부이다. 기호의 아버지 전우는 1936년 일본 기후깽 오가께 시(大甘市)에 건너갔고, 그 뒤 가족들도 차례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돌아온 때는 1945년 6월 해방 바로 전이었다. 아버지가 일본에 간 것은 상해 임시정부 독립기금 모금 때문이었다고 한다.
아버님께서는 내 태어난 이듬해 일본 가셨으니까, 먼저 가시고 형님은 그 후에 학교관계로 또 혼자 먼저 가셨고, 고다음 우리 누나들하고 나하고 어머니하고 갔고. 저가 4살 때 일본 가서 11살 때 귀국을 했거든요. 해방된 해에. 일본 간 것은 아버지가 상해임시정부에 독립기금 모금 때문입니다. 모금해달라 부탁을 받고 일본 가서 고물장사를 했어요. 금이나 은이나 시계나 삽니다 하는 거 안 있십니꺼? 그걸 해야만이 교포들을 만날 수 있으니까. 교포들 만나서 얘기도 하고 고물도 사고 상조금도 받고, 그걸 몰래 모아서 전달해주는 사람이었어요. 정자 상자 할아버지의 동생 집안에 또 한 분 계십니다. 내한텐 할아버지뻘 되는데 그 어른이 일본 여자하고 일부러 결혼을 했거든. 신분을 감추기 위해서. 딸 하나 나놓고 자기는 늘 상해를 왔다갔다 했어요. 그 어른도 두만강 건너다 잽혀간 이후 소식이 없어요.
집안의 전통이 임시정부 독립기금 모금하는 일로 이어졌다. 해방된 뒤 증언자 기호의 집안은 다행히 여러모로 재산을 지탱할 수 있었다. 해방되기 바로 전인 6월에 귀국할 때 일본에 있던 재산을 처분하였고, 7월에는 증조부가 함경북도 북청에 숨어살 때 사둔 논도 팔았다.
해방되는 해 6월에 미리 들어왔어요. 해방되기 전에. 그래서 우리는 일본에서 재산이랑 잃어버린 거 하나도 없거든. 싹 고스란히 여기 다 가져왔으니까. 집도 싹 팔고. 창원으로 돌아오고 그 북청에도 정리할 게 남아있었거든. 논도 좀 사논 게 있어가지고 아버지가 북청에 가서 그 논도 마저 팔고 7월에 내려오셨어요. 8월에 해방이 된 기라. 우리는 재산상에 손해난 거 하나도 없지.
그래서 해방 뒤 기호의 집은 다른 농민군 후손들처럼 아주 어렵게 살지는 않았다. 형제들이 대학까지 마칠 수 있었다. 형 기조는 길지는 않지만 부산대 교수를 지냈으며, 기호는 언론사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증언한 기호는 10살 위던 형이 46살에 요절하지 않았다면 고조, 증조할아버지에 대해 또 다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텐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아쉽고, 정신문화원까지 가서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고조, 증조할아버지들의 활동을 찾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고 한다. 변화많던 시대를 편안하게 살 수 없던 조상들이라 족보가 흩어져 있던 것을 정리한 데서 조금이나마 위안을 삼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