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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록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하동에서 활동하다 고성산 전투에서 전사한 박소금, 손자 태실
대상인물

박소금(朴小金)

?~1894. 진주 고성산성 전투에 참가했다가 10월 14일 전사.

증언인물

박태실(朴泰實)



1939~ . 건축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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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도
가계도 이미지
정리자

박준성

출전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

내 용

우리 근현대사 현장을 답사하다보면 같은 지역에서 같은 날 제사를 지내는 집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1894년 2차 농민전쟁이 치열했던 지역도 그런 곳이 많다. 진주 고성산성 일대도 그 가운데 한 곳이다. 9월 들어 경상도 남서부 지역에서도 농민군의 활동이 활발하였다. 이를 진압하려 부산에서 출병한 일본군은 하동에서 농민군을 전라도로 몰아내고 진주성으로 진주하였다. 진주 쪽에 있던 농민군은 일본군을 공격하려고 단성에 모여 수곡장터로 나아갔다. 일본군이 수곡장터에 도착한 것은 10월 14일 새벽이었다. 농민군은 해발 185m 높이의 고성산 정상을 지키며 치열하게 싸웠으나 끝내 패전하여 많은 시체를 남기고 흩어졌다. 경상도 남서부 지역에서 가장 격렬했던 고성산 전투에서 농민군 186명이 전사했다. 이는 일본군이 보고한 숫자이고, 몇천 명이 죽었다는 말도 있다. 그래서 이 일대는 10월 13일 한 날에 제사를 지내는 후손들이 수없이 많다. 박소금도 그 이름이 자료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곳 고성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농민군이 확실하다. 그의 손자 박태실은 할아버지 제사날이 10월 13일이고 고시랑당에서 돌아가셨음을 증언한다.

제사가 시월 열사흘 날이라고. 할아버지가 동학에 가담하기 전에도 피신생활을 하셨나 봐요. 그래가지고 그 동네 고시랑당, 나도 고시랑당이란 소리만 들었지 어디 있었는지 몰랐거덩. 뒤져보니까 일명 고시랑당이라 불려지지만 고성산성이라고 허더만. 왜 고시랑당이라 불렀냐면 동학군이 모이는 곳마다 고시랑당이란 지명이 붙었거든. 내가 볼 때는 고시랑당이 암호 비슷하게 쓰여진 것 같은데 잘 모르겠어요. 전라도 고부에도 고시랑당이 있다 하거든.

고시랑당은 고시랑산을 말하며 고성산을 그곳 주민들이 부르는 말이다. 일본군에 패해 억울하게 죽은 농민군들의 혼령이 울어대는 곡소리인 양 밤에 비가 오거나 흐릴 때면 ‘고시랑고시랑’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붙여졌다고도 한다. 그러나 손자 박태실은 할아버지 제삿날이 왜 10월 13일인지, 왜 고성산에서 돌아가셨는지 오랫동안 모르고 살아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 어렴풋하게 들려준 할아버지 이야기도 제사날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할아버지에 대해 들은 때는 군대에서 제대하던 1961년 10월, 나이 23세 때였다.

내가 아버지가 세상을 뜨기 전에 한번은 그때 얘기를 들은 것 같은데, 기억에 맨 처음에 전라도 쪽으로 가셨다는 걸로 들은 것 같아요. 뭐 쌀을 짊어지고 갔다던가. 그러다가 아마 일본군한테 들켰던가 봐요. 결국에 거기서 참전을 하다보니까 집안에 그게 탄로가 났던 모양이지요. 그러니까 온 식구들이 풍비박산이 되어가지고 족보를 가지고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한 게 사천군인 모양이에요.

전라도 쪽으로 갔다는 이야기나 일본군한테 들켰던 때가 언제인지 확실하지가 않다. 이 말을 들려준 아버지도 그해 돌아가셔서 다시 여쭤볼 수도 없었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 기억으로는 집안이 사천군 곤명면 직팔리 구몰부락으로 이사오기 전에 살았던 곳이 금남면 어디였다고 한다. 금남면은 섬진강 하류 하동과 광양으로 나누어지는 길목이다. 박태실의 할아버지 박소금은 고성산성 전투에 참가하기 전 하동 일대에서 농민군 활동을 한 것 같다. ‘쌀을 젊어지고’, ‘전라도로 갔다던가’ 하는 증언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말로만 보면 소금의 활동이 식량을 운반하는 정도였는지, 더 적극적이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활동이 드러나 집안이 이사까지 해야 할 정도면 단순히 식량 운반에 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소금은 체격도 좋고 힘도 셌다고 한다.

체격은 좋았답니다. 어머니도 그랬었고 아버지가 키가 크고 힘이 좋으셨거든요. 얼굴이 빨갛게 생긴 분이. 얼굴이 하도 굵다 보니까 굵대라 그랬었거든요. 술도 많이 잡수시고 힘이 굉장히 좋았답니다. 그러니까 할아버지를 닮아서 힘이 좋으셨다 그랬거든요.

박소금은 아마 하동 농민군으로 활동하다가 고성산 전투까지 참가하였을 것이다. 그 과정은 하동 농민군 활동을 통하여 짐작해볼 수밖에 없다. 1893년에 열린 보은집회에 하동에서도 진주접 소속의 동학도와 함께 수십 명이 참여했다. 1894년 이전에도 하동에 동학조직이 있었다는 말이다. 소금이 이즈음 동학에 관계하고 있었는지는 모른다. 증언자는 “동학교도였다는 얘기는 못 들었고, 순수한 농민이었겠죠”라고 한다. 1894년 3월부터 시작된 1차 농민전쟁 때 남서부 경남 지역 농민군의 활동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가을 들어 이 지역의 농민군들도 호남 농민군과 연대하여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민보군에 의해 광양으로 쫓겨갔던 하동 지역 농민군은 9월 1일 광양 순천의 농민군과 함께 섬진강을 건너 하동을 공격하여 읍을 장악하였다. 하동의 농민군은 9월 17~18일 진주에서 열린 농민군 대회에도 수천 명이 참가하였다. 하동의 농민군은 9월 말, 10월 초순, 10월 중순 세차례에 걸쳐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9월 25일 부산에서 배편으로 창원 마산포에 내린 일본군은 29일 하동에 도착하였다. 하동에 남아 있던 농민군은 광평동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섬진강 건너편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하동의 농민군이 모두 섬진강 쪽으로 후퇴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고성산성 전투보다 앞서 경상도 남서부 지역에서 벌어진 큰 전투는 곤양의 금오산에서 있었다. 이곳 전투의 주력은 하동접주 여장협이 이끄는 농민군으로 400여 명이었다. 농민군은 금오산 시루봉에 진을 치고 있었다. 곤양에 머물고 있던 일본군과 관군은 10월 10일 새벽 두 부대로 나누어 시루봉을 공격하였다. 농민군이 수는 많았으나 신무기 앞에서 밀리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70여 명이 전사하였다. 박소금이 참전하였다가 탄로가 나서 식구들이 사천으로 이사한 때는 광평동 싸움이거나 금오산 시루봉 싸움 뒤였을 것이다. 특히 금오산은 소금이 살던 금남면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 그가 금오산 전투에 참가 하였다면, 전사하지 않고 살아남아 10월 10일 북쪽으로 올라가 13일 수곡에 집결할 때 다시 합류하였을 것이다. 하동에 살던 박소금이 고성산성에서 전사한 것으로 보아 이렇게 추측해 보는 것이다. 박태실의 할아버지 활동에 대한 증언은 몇 마디 안되지만 고성산성 전투를 진주 쪽 농민군 활동뿐 아니라 하동 농민군의 활동과 금오산 전투와도 연관시켜 이해할 필요가 있음을 알려준다. 박태실이 고성산성에서 죽은 할아버지 제사날과 아버지가 들려준 할아버지 이야기가 연관된다는 사실을 늦게나마 알게 된 것은 진주에 있는 유족회를 통해서였다.

유족회가 발족이 돼가지고서 사천군 일대가 어떻게 됐다는 얘기가 그 동네[구몰부락]로 왔던 모양이데요. 그래서 나를 찾게 된 거죠. 이학영 씨라고 이분이 사천군 일대 사람에 대해서 상당히 많이 알고 계신 분이거든요. 그 분 아들하고 나하고 친구고 하니까 아들을 통해서 전화번호를 알아가지고 우리집에 전화가 왔더라고요. 이분이 그쪽 지역에 있는 분들을 전부다 추천하고 사람을 많이 만나고, 우리집에 전화를 하셔갖고, 할아버지께서 이런 일이 있었는데 나에게 무슨 연락이 왔더냐 묻더라고. 금시초문이라, 별로 모른다고 하니까 그분이 우리 할아버지가 이렇게 해서 세상을 떴는데 지금 유족회가 발족됐으니까 상세히 알고 싶으면 와보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진주로 올라갔죠. 진주에 가서 이 어른을 만나보고 어떻게 된 사실입니까하고 물었더니, 그분이 소자 금자 할아버지가 이렇게 세상을 뜨셨고 진양군 수곡면 고시랑당에서 전사했다고 하더라고요. 나는 고시랑당이 어딘지도 모르지요. 그때서야 할아버지께서 거기서 돌아가셨구나 그랬죠.

할아버지 박소금이 전사한 뒤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었다. 할머니는 개가하였다. 다행히 고성산성 아래 동네사람들이 시신을 묻어놓아 이장하여 묘를 모실 수 있었다.

그동네 사람들이 여기서 올라갔는가 보데요. 올라가서 묻어놨다가 다시 이장을 해서 아버지 살아계실 적에 구몰 그 동네 앞에다가 이장을 해놨어요. 그 산은 성방리로 되었을 것인데. 재성자 모방자인데 인자 할아버지를 이장을 해가지고 지금까지 그러고….

손자 박태실은 무슨 말을 더하고 싶은 듯한데 맺지를 못한다.

아버지가 말씀하기를 그 당시에는 왜놈들이 와서 호적부나 족보를 보고 추적을 하니까 호적에서도 빼고 집안 족보에서도 빼버려 그랬단 얘기도 있더라구요. 그거를 알게 되면 왜놈들이 가만두지 않으니까 도망을 간거지요. [그 일을] 역사적으로 누가 챙겨가서 어떻게 한다는 얘기도 없었으니까 그냥 무심히 흘러간 거지요. 집안에서도 찾아오는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이게 어떻게 된 사실인가 밝히고 족보라도 남기고 했을 건데. 그때 6·25 당시에 면사무소에 있던 족보(?)도 모두 불타버렸거든요. 그러니까 할아버지에 대한 기록이 없는 거예요.

집안의 족보에서도 이름을 빼버렸고 면사무소에 있던 호적(?)도 6·25 때 불타버렸다. 할아버지 이름이 남아 있는 기록이 아무데도 없는 것이다. 무심하게 지내온 세월이 더 한스럽다는 표정이다. 어디 박태실씨만 그런가. 유족회와 특히 진양군 군사편찬위원회 위원이었고 친구 아버지이기도 한 이학영 씨의 도움이 없었다면 박소금의 이름은 1894년 농민전쟁의 역사 속에 그냥 묻혀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1894년 농민전쟁에 참가했던 수많은 농민군이 그렇다. 지금도 조상이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모르고 살아가는 후손이 대부분일 것이다. 예전에 박소금의 손자 박태실이 그러하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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