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윤상준(尹相俊)
1854~1894. 본관은 파평. 자는 성서. 진주 고성산성 전투에 참가했다 10월 14일 전사.
1872~1946. 진주 고성산성 전투에서 부상.
윤재덕(尹在德)
1935~ . 윤상준의 손자로 1967년부터 진주시청에 근무. 현재 진주시 환경사업소에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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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성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
지금의 진주시 대평면 당촌리에 살던 윤상준, 상선 형제는 1894년 10월 14일 진주 고성산성 전투에 함께 참가하였다. 형 상준은 그곳에서 전사하고 동생 상선은 도망쳐 피했다가 일본군에게 부상을 당했다. 4형제 가운데 상준은 맏형으로 나이 마흔하나였고 상선은 막내로 스물다섯 살 때였다. 손자 재덕이 할머니에게 할아버지들 이야기를 들은 때는 20여 살 쯤 되었을 때였다. 누구에게나 죽거나 죽을 뻔한 일들은 생생하게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그렇기 때문에 할머니도 60여 년 세월이 지난 뒤에 큰할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어떻게 죽을 뻔하다가 살았는지, 그 이야기만 손자에게 전해주었는지 모른다.
당시 경남 진양군 대평면 당촌리가 사시던 곳이었는데 거서 고시랑당까지는 내가 생각하기에는 15km 거리가 될 겁니다. 걸어서 왔다갔다 하고 산을 넘어 거까지 가갖고 그런 일을 당하시고. 제일 큰 할아버지[상준]와 막내 할아버지[상선] 두 분이 참여를 했더랍니다. 하동 옥종 고시랑당에서. 할머니 얘기에, 그 지역에 가서 들으니까 하루 저녁 깨볶으는 소리가 나더라고 해요. 그래 작은할아버지는 도망을 했어. 할머니 얘길 들어보면 전부가 죽음을 당하는 걸 보고 정신없이 도망와 가지고 보니 어느 가정집에, 퇴비, 재 그거이 상당히 있더랍니다. 정신없이 거기 푹 들어가 사람 흔적이 없도록 아주 보드란 재로 덮어쓴 거지. 그래서 왜놈들 따라 오는 거 모면했답니다. 왜놈들이 창을 찍었는데 그때 어깨에 난 흉터가 있어요. 막내 할아버지는 그래 갖고 상해를 입고 돌아오셨고, 큰할아버지는 거기서 전사하셨어요.
증언자 윤재덕이 알고 있는 할아버지들 얘기는 그것이 전부였다. 아버지도 전혀 그런 얘기를 해준 적이 없었고, 기록에서 이름을 찾을 수도 없었다. 자손들 가운데 얘기를 들은 사람은 재덕씨 혼자뿐이었고 그나마 들을 수 있던 것이 다행이었다. 그 얘기조차 듣지 못하였다면 족보에 큰할아버지 별세 일이 10월 14일이라는 기록은 그냥 돌아가신 날짜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남원 양씨 할머니, 친 할머니한테, 옛날 얘기도 듣고 집안 소식도 들었는데 어릴 때 들었던 얘기가 방금 그 얘기라예. 그런데 이런 얘기를 사촌들도 전혀 모르고 나만 옛날에 할머니한테 호롱불 밑에서 들었어요.
양씨 할머니는 증언자의 친할아버지인 상국의 부인이다. 고성산성 전투 이전 할아버지들의 활동이 어떠했는지는 전혀 들어본 적이 없다. 동학에 입도했다는 이야기도 못 들었다. 어릴 때라 더 자세히 알아보지 못한 것이 지금은 무척 안타깝다고 한다. 오랫동안, ‘동학’에 참가했다는 사실을 입밖에 낼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큰할아버지는 거기서 돌아가시고, 작은할아버지는 모면을 해갖고 돌아오셨다 하는, 어릴 때 얘기를 들었던 정도로 그렇게 동학이라는 것은 우리 학교 때는 농민의 정부에 대한, 그 당시 정부에 대한 하나의 혁명적인 일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족보상에도 기록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어릴 때도 이것이 당시 조정에 항거한 일이었구나, 생각만 했지 넘한테 입밖에 안내는 일이었어요. 그렇게 커갖고 아버지도 전혀 우리들한테 그런 얘기가 없었고.
부산에 85세 된 작은어머니가 계시는데 “지금도 아주 그만 입을 딱 봉하고 그 이후론 좋은 일이 아니라며 머리에 꽉 배겨서” 아무 이야기도 안하신다. 할머니가 해준 할아버지들 얘기도 “할아버지가 뭐 어찌해 가지고 전사해 갖고 오셨다는 얘기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지요. 오늘 처음 얘기라니까요”라고 한다. 농민전쟁에 참여한 윤상준 형제는 조금 윗대부터 대평면 당촌리에 살아왔다. 농민전쟁에 참여할 당시 집안은 주위 사람이 부러워할 정도로 잘 살았고 화목했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사실 때 농촌에 사는 정도로는 상당히 잘 사셨다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머슴을 둘이나 데려와 가지고 상당히 농사도 많이 지으시고. 직접 지으셨대요. 제가 알기에는 주위 분들이 그 집안을 부러워할 정도로 그렇게 잘 사셨다는 얘기는 할머니를 통해서 들었지요. 예의범절에 밝고 결함이 없이 형제간의 우애도 남다르고 가정적으로는 상당히 잘 살아오셨던 어른들이라고 합니다.
집안에 윗대로 벼슬 산 분들은 안 계셨고, 큰할아버지나 둘째, 셋째도 글을 못 배웠다. 막내 할아버지만 한학을 좀 했다고 한다. 머슴을 둘 두고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상당히 잘 살았다면 자작 상농쯤 되는가 보다. 열심히 농사를 지어 살 만하니까 막내에게는 글공부를 시켰는지도 모른다. 먹고살 만도 하고 형제간에 우애도 있던 윤씨 집안에서 왜 농민전쟁에 형제가 참가해 맏형이 목숨까지 잃어야 했을까. 대부분 농민들이 수탈당하고 못 살아 봉기했겠지만, 그렇지도 않은 할아버지들이 참가한 것은 정신면에서 앞섰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한다.
나도 생각하기에 못 살아서 항거를 한 기 그 정신 아니겠는가 뭐 전부다 탈취해가고 농사를 지어봐야 살기가 어렵고 하니까 일이 안된다 하는 그 어떤 정신이 받침이 돼서 이 일을 봉기한 것이 아니겠는가 했는데, 이 무렵에 우리집이 굉장히 잘 살았다 하는 겁니다. 할머니 이야기 들어보면 머슴도 있고 소도 많았고 그렇게 잘 사는데 아마 이 할아버지가 정신면에서 앞장을 선 게 아니었는가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할아버지들이 적극 앞장서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것이 증언자의 생각이다.
내 생각에 그 농민들이 어떤 데에 가자 하니께 인자 그 분들이 우리가 이래 있을 거 아니다 해서 간 거지 남의 의사에 앞장서서 자기가 손들고 ‘가자’ 이건 아니었을 거 같애요.
윤상준, 상선 형제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농민전쟁에 참가하였는지 알 길이 없다. ‘가자’면서 앞장 서 주위의 농민들을 지도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소빈농은 아니었고 그렇다고 양반 토호도 아니었으며, 먹고 살 만은 했지만 수탈의 손길에서 크게 벗어나기도 힘들었을 것이고, 형제간에 우애 있고 동네사람들에게 의리 있었다면 당시 이 지역 농민군의 분위기로 보아 빠질 수 없었을 것이다. 9월 들어 진주 일대의 농민군 활동은 아주 활발해졌다. 9월 초 진주 단성 지역에서 농민군들의 집회가 시작되었고, 9월 10일 농민군은 통문을 돌려 큰 동네에서는 50명, 중간 동네에서는 30명, 작은 동네에서는 20명, 아주 작은 동네에서는 10명씩 인솔하여 민폐를 뜯어고치자는 통문을 돌렸다. 여기에 참가한 농민들이 고성산성 전투의 주력이 되었다. 두 사람의 이전 활동이 어떠했는지는 모르지만, 이 과정에 참가한 것으로 짐작된다. 고성산성에서 전사한 큰할아버지 시체는 할머니들이 이틀만에 찾아 집이 있는 대평까지 시신을 옮겨 장사를 지냈다.
그러니께 여자분들이 같이 가갖고, 시체가 막 군더러져 있으니까 그거를 금방 못찾아서 이틀만에 찾았다는 말이 있었고. 시신을 이쪽 대평까지 운반해서 모신 것은 아버지 형제분들이겠지.
부상당한 막내할아버지는 피신하였다가 당촌리 고향으로 돌아와 살았다. 그 뒤 일제 식민지시기에는 일본에 가서 10여 년 살았다고 한다. 농민전쟁에도 참가하였던 분이 일본 가서 살게 된 연유가 궁금하다.
우째 일본을 갔느냐? 그 당시에 우리가 쭉 개방이 되고 이리 되니까 일본서 무슨 일에 관심을 갖은거지. 그 당시 일본 간 동기는 그 숙부님이 조금 활동력이 있었더랍니다. 그런께 왜정 때 어떤 경우로 몇번 가셨드랬는데 아들 따라서 아마 사업차 일본으로 가신 걸로….
작은할아버지가 일본 간 확실한 동기가 무엇인지를 증언자도 궁금해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해방이 되어 일본에서 돌아온 작은할아버지 상선은 유림에도 출입하면서 조카들에게 한학을 지도하다가 다음해 돌아가셨다. 고성산성에서 큰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작은할아버지는 숨어다니는 동안 가세는 기울고, 그 뒤 고향을 떠나 이사를 해야 했다.
그러니까 가문이 좀 기울어졌어예, 저도 태생이 거가 아니고. 할머니 말에 의할 것 같으면 자꾸 이 가문이 기울더라해요. 옛날에는 소 한마리도 상당히 중요하게 여겼던 재산인데 소가 우연히 죽고 여러가지 일로 할아버지도 마음이 안 좋고 심정이 상하고 그래서 아버지가 충무로 이사를 왔어요. 지금은 이름이 충무지만도 그때는 통영읍이라 했거든요. 내가 35년생인데, 1945년에 해방이 됐으니까, 통문에서 한 10년 살았지요.
고향을 떠나 살면서도 엄격한 가훈에 부모에 대한 효도들은 각별했다. 재덕 씨의 아버지도 충무에서 포목상을 하면서 상조계에서 효자 표창을 받았고, 일본에 갔던 숙부도 거기서 효자 표창을 받았다고 한다. 재덕은 그런 것이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오는 집안의 정신 같다는 자부심과 함께 할아버지 묘소에 석물 변변히 못한 것이 부끄럽다며 머리를 조아린다.
석물이 없어요. 그러니까 참 초라하지요. 옛날에 충무로 이사 가서 살 때는 가정형편이 구질구질했어요. 그래서 그때 산소를 모셔놓은 것도 내가 보기에는 영 초라합니다. 그래서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제가 도시과장 하고 있을 때 신문에 보도되고 하니까 MBC에서 내보고 윤과장 이런 할아버지가 계셨다는데 우리가 현지로 녹화를 해야 되겠으니 안내를 해줘라 해요. 그래 하지요 했는데, 산소가 초라해 부끄러웠습니다. 그래 이해를 해주라 했는데, 계획이 바뀌어서 산소까지는 가지 않았어요. 올라가기도 힘들고, 길도 없고 그래요.
후손들은 대부분 조상의 행적을 어렴풋이 알게 되면서 묘를 변변이 모시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한다. 자식으로서 마음은 그렇게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1894년 농민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복원하고 참가한 농민군에 대한 공적을 기리는 일이 후손들만의 몫은 아니다. 농민전쟁 100주년이 지났다 해서 그쳐서도 안될 것이다 1894년 농민전쟁의 역사만이 아니라 근현대사의 숱한 역사의 사건도 마찬가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