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이용호(李容鎬)
1858~1894. 진양군 나동에서 살다 산청군 시천면으로 이사가 농민군 지도자로 참가. 진주 고성산 전투에서 10월 14일 전사.
?~1894. 진주 고성산 전투에서 형과 함께 전사.
이종덕 (李鍾德)
1922~ . 하동읍사무소에 근무하는 등 공무원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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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성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
1894년 10월 14일 진주 고성산 전투는 일본군의 보고만으로도 농민군 186명이 전사한 경상도 서남부 최대 전투였다. 경남 산청군 시천면 사리에 사는 이종덕은 고성산성 전투의 전개과정을 남아있는 자료보다도 더 생생하게 전해준다 전투가 벌어질 때 30대였던 할아버지에게 그 얘기를 들으면서 자랐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82세로 돌아가신 때가 1942년이고 그의 나이는 20세였으니까, 고성산 전투 얘기를 들은 지는 50년도 넘는다. 드러내지 못하고 살아온 세월이었지만 어려서 할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를 잊고 살 수는 없었다. 그의 큰할아버지 용호와 작은할아버지 용백이 고성산 전투에서 돌아가셔서 더욱 그렇다.
어려서부터 우리 할아버지가 내와 같이 생활을 하면서 늘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근데 그 당시에는 그런 말을 공개적으로 할 수 없잖아요? 큰할아버지하고 작은할아버지하고 이러이러해서 세상을 떠났다는 그 당시의 얘기를 좀 해주시요 하니까 그때 상황을 당신 본 대로 해주셨어요. 그 얘기를 듣고는 아 그렇구나 했지만, 그때 상황으로서는 왜정 때라 일본사람들이 전부다 집권하고 있을 때니까 공개적으로 얘기를 못했어요. 말을 안했지요.
큰할아버지 이용호와 작은할아버지 용백이 ‘이러이러해서’ 세상을 떠난 상황이 바로 고성산 전투의 전개과정이었다. 그들이 살던 곳은 진주 진양군 나동면이었는데 부자는 못되고 그냥 살 만한 정도였다. 서원도 출입할 정도의 학식이 있었는데 이곳에 살면서 동학과 관계를 가졌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탄압을 피해 나동에서 산청군 시천면 월리로 피난을 갔다. 시천으로 옮긴 때는 정확히 모르지만 거기서 농민군 지도자로 참가하였다고 한다.
원래 우리 할아버지는 학식이 좀 있어가지고 서원도 출입하시고 그리했어요. 두 분이 다 학식을 가진 분이고 그리했는데, 저 나동에 사시면서 주로 사상적으로 물들었다고나 할까요. 동학에 가담되고 나니깐 거기서 살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깐 형제분이 다 이리로 이사를 왔어요. 여기서 다리를 건너면 월리라고, 산청군 시천면 월리라고 있어요. 여하튼 동학과 관계가 있어서 거서 쫓겨 피난을 왔고, 또 뒤에 대전에서는 하나의 총지휘자로 발탁됐다고 하니까 그전부터 교류가 있었겠지요. 여안에 와서도 교류가 있어 가지고 항상 숨어 살다가 결국은 한번 끼어보자 해서 거서 전사한 겁니다.
종손인 증언자 종덕은 진주 일대에서 농민군으로 참가하였던 다른 후손들도 “그 당시에 즈그 할아버지가 지휘관이라고 얘기합니다. 즈그는 즈그대로 들은 얘기가 있어서 하겠지 만도 우리 할아버지가 내가 20살까지 하신 얘긴게 하나도 거기에 거짓이 없다고 보는 거지예”라면서 큰할아버지 용호는 대장으로, 작은할아버지 용백은 부장급으로 500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었다고 한다. 이들의 참전에서 전사까지 진주 고성산성 전투의 전개과정을 들어본다.
당시는 왜병이 진주에 주둔해서 상황이 절박했다고 해요. 좌우간에 동학군을 잡아야 된다고 해서 처음에는 동학군만 잡았는데 그 다음부터는 동학군 가족은 물론이고, 동학군 숨겨준 부락을 전부 몰살시킨다는 정책으로 나갔지요. 그래 이래서는 안되겠다. 여기서 사생 결단을 내야겠다 해서 모인 곳이 단성이라고. 거기에서 집결된 인원이 한 500명 했더래요 우리 할아버지도 출정하게 되니까 옷도 갖추고 해서 대장으로서 나가게 되셨답니다. 지휘계통이 큰할아버님은 거그서 총대장이고, 그 밑에 부장 정도는 당신 아우님 용백, 그렇게 해가지고서는 500명을 이끌어 여서 가면은 칠정이란 데가 있고 거기서 쪼금 가면 백곡이란 데가 있는데 옥종으로 가는 도중이지요. 거기 거쳐서 그야말로 의기양양하게 가는 곳곳마다 술과 돼지라든지 소를 잡아 대접을 하니까는 병정들이 사기가 돋궈져 점심 때 돼서 북방리에 도달했드래요. 거가 하동 그 고성산 밑인데, 점심때 가니까 미리 척후병을 보내가지고, ‘대부대가 오니까 점심시키고 소 잡아라’해서 거 도달해서는 막 먹게 되는 판이라요. 근데 점심을 먹을라고 하는데 왜병이 말이지 수곡 강을 건너서 이리 오고 있다는 급한 전갈이 왔어요. 수곡에 가면 강이 있습니다. 진주 남강으로 내려가는 건데, 수곡서 와가지고 강 저쪽에는 일본병이 대진을 하고 강 요쪽에서 전망을 하는데 왜놈이 총을 쏘니까 요쪽에서 맞은 사람이 톡톡 쓰러진다 이기야예. 저 먼 데서 쏘는데도 자빠지니까 들고 도망을 쳐뻐린 거지. 그런데 저놈들 쳐들어 온다 소리 듣고 도망을 쳐버렸으면 이쪽에서는 하나도 안죽었을 거예요. 근디 도망가다가 왜놈하고 싸우러 왔다가 싸움은 한번 해봐야겠는데 어디가 적당하냐 해서 전략지를 구축할 때 거가 좋습니다하는 지방사람들의 말만 듣고 병을 몰고서는 산성으로 올라간 거예요. 내가 볼 때, 이 고성산은 산성이 있던 게 큰 마라예. 이분들이 죽은 원인도 그것에 있습니다. 고성산에 가면은 산성이 두 개가 있어요. 그것이 고려 때 것인지 언자껀진 몰라도 산성이 고성이라예. 산성 터에는 저도 가봤습니다만. 거기에 산성이 두 개 있다 하니까, 그러면 좋다해서 고성산으로 올라간 겁니다. 물론 당시에 간 사람들은 여그 출신도 좀 있겠지만도 서부 경남 각처에서 들어온 사람들이거든. 그 500명이라는 숫자가 산에서 진을 딱 치고서 대항하니까 일본놈도 좋은 총을 가지고 보이는 대로 탕탕 다 죽였어요. 그때 무기라는 것이 일본 조총이고, 우리 총은 화총이라 캐서 화심에다 불붙여갔고 거시기하니 뭐 총도 아니지요. 그리고 활과 창 뭐 이래가지고서는 훈련도 없는 오합지졸이니 대항할 수가 있습니까. 거그도 상당기간 같이 대전을 했는데, 그 산 가면은 산봉오리 뒤로 가면 전부 들이고 평집니다. 이어진 산이 없어요. 오똑하니 산봉우리 한 개만 있으니, 나중에는 왜놈들이 그 산에 가서는 포위를 해가지고 밑에서 그딴 불을 나뿌렀다는 거요. 지금 딴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몰라요. 음력 시월 열 사흘날이면 낙엽이 져가지고 오직 불이 잘 붙습니까? 불이 나니까 연기가 다 위로 올라오죠. 내려갈라믄 밑에서 총을 쏴불죠. 그래서 총에 맞아 죽은 사람, 불에 질식해 죽은 사람 해서 전부 다 전사했다 이거지. 왜병들 보고서에는 사살이 200명이니 300명이니 해싸지만도 500명 전원이 죽었다는 거여.
일본군이 보고한 고성산성 전투의 상황을 증언 내용과 비교해보면 전체 상황이 좀더 분명해질 것이다. 일본군이 10월 14일 오전 4시 진주를 출발하여 수곡촌에 이르렀을 때 ‘동학당’이 산과 들에 가득 차서 대략 천 4~500명 모여 있었다. 지방사람들의 말로는 4~5천 명이라고 한다. 8시 5분에 농민군이 사격해오므로 응전하면서 진격하자 절반은 산[고성산] 위로, 다른 절반은 산 북쪽으로 퇴각하였다. 일본군은 먼저 고성산을 공격하였으나 농민군이 산꼭대기 성벽에 의지해서 완강하게 저항하였으며, 북쪽으로 퇴각했던 농민군도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10시 15분 일본군 1개 소대가 산 위 성벽으로 돌입하여 고성산을 점령하였다. 이때 일본군 부상자는 3명이었다. 다른 1개 소대는 계속 오른쪽의 농민군을 공격하였다. 오전 11시 농민군은 서북쪽 덕산(지리산 쪽)을 향하여 퇴각하였다(『일본공사관기록』). 고성산을 공격하는 일본군은 1개 소대였지만 그들은 신식 총으로 쏘아대는 데 비해 농민군이 맞설 수 있는 무기는 화승총, 활, 창 따위였다. 그래도 고성산성을 의지하여 완강하게 버텼지만 음력 10윌 중순 바싹 마른 낙엽에 일본군이 불을 질러 타오르는 데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증언자 종덕 씨가 “지금 딴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몰라요” 했듯이 일본군의 보고서에도 불을 질러 고성산성의 농민군을 진압했다는 사실은 밝혀져 있지 않다. 여기에 참여했던 농민군은 증언자 종덕이 “할아버지한테 얘기 들은즉슨 남의 집 사는 사람, 천민, 쪼금 잘사는 사람들은 가담을 안했다 이거예요”라고 말하듯이, 대부분 하층계급 출신이었을 것이다. 자신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봉건적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과 기대로 참가했던 농민군이 일본군의 총에 맞고 불에 타고 질식해서 쓰러져간 고성산성, 그것은 뼈아픈 역사의 거대한 무덤이다. 전투에서 전사한 수많은 농민군의 시체가 그대로 널려진 채 썩고 삭아 스며든 실제 무덤이기도 하다.
그 뒤에 현지에 가서 이야기를 들은즉슨 그때 죽은 사람들 해골들이 그 산에 많이 흩어져 있었다는 거여 해골이 그냥 굴러 다녔다는 기여. 긍께 그것이 1895년에서 1945년이니까 한 50년 사이 아닙니까. 그때까지도 해골이 부단히 산재되어 있었다는 거여. 그러나 우리가 광복이 됐는데도 그 당시에 정부 차원이나 행정당국이나 그런거 수습할 단계가 아니잖습니까? 그래노니까 그대로 방치되고 해방이 되어서도 그런 것이 많이 있었더랍니다.
이용호, 용백의 시신은 다행히 형제 가운데 둘째 용욱이 참가하지 않고 살아남아 수습할 수 있었다. 종덕 씨 집안은 대대로 손이 귀했다. 7대 조부 때부터 아래로 4대가 독자로 내려왔다. 증조할아버지 때는 형제였는데 동생이 아들이 없어 혼자가 됐고, 형 숙래만 용호, 용욱, 용백 형제를 낳았다. 손이 귀한 집안에서 3형제가 모두 참가할 수 없었다. “우리 할아버지도 같이 하자고 권했드래요. 근데 왜 안갔냐면 그 당시만 해도 자기 윗대에 하나씩 해서 어렵게 내려오는데 내꺼정 가서 셋이 다 죽어버리면 손이 없지 않느냐 해서 안가셨다 해요. 그래서 용케 우리 할아버지는 살아남게 됐고”, 끝내 형과 동생은 전사하고 가까스로 둘째만 독자아닌 독자가 되어 손을 잇게 되었다. 살아남은 둘째는 고성산성 전투 소식을 듣고 일꾼 한 사람을 데리고 가서 형과 동생의 시체를 찾아 묻었다. 3년 뒤에 봉분을 하였다.
시신은 그때 전투가 끝나고 나서 우리 할아버지가 전황을 들으니까 전부 다 몰살됐다는 거요. 그럼 다믄 시신이라도 거둬놔야겠다 했는데, 소문을 들으니 거그 가기만 해도 잽히면 죽는다는 거예요. 그 부락민이 피해를 너무 많이 입었다 이거여. 동학군에도 피해를 입었고, 일본군한테도 피해를 입고 하니깐 그 분풀이를 가족들이 시신 찾으러 오면은 전부 물려야 한다 이거여. 그때만 하더라도 잡아놓고 뚜드려 패는 기라. 패면서 니 재산이 총 얼마냐, 전부 다 내놔라, 이런 식으로 되니까 겁이 나서 감히 접근을 못했다는 거여 대부분이. 우리 할아버지는 대담하게도 일꾼 하나를 데리고 위장을 해갖고 밤중에 산으로 올라가서 시신을 찾아 가지고 산 밑에 구덩이를 하나 파서 뉘펴 놓고, 그 다음에 하나 또 파고 해서 날이 새기 전에 시신을 묻어놓고 도망질쳐서 와뻐렸다는 거여. 그랬다가 한 삼년 지난 뒤에 가서 그 묘에 봉분을 새로했답니다. 후손이 찾아가 시신을 수습하기도 쉽지 않았던 사정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을 방해하고 두들겨 패면서 재산을 빼앗던 고성산성의 부락민들이란 누구일까. 부락민들 모두가 그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 농민군에 보복을 당했거나 굴욕을 당하며 위세에 눌려지내던 사족 토호들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10월 중순 이후 농민군이 일본군과 관군의 토벌로 몰리게 되자 자위조직을 만들고, 일부는 농민군을 진압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그러나 3형제는 친척도 없이 살아왔는데, 방해가 두렵다고 시체를 그대로 버려둘 수는 없었다. 어둠 속에 수많은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 “형님, 동생이 전투에 나간다고 하니까 전복도, 전투에 나가는 의복도 물론 형수가 지었지만도, 표식을 해놔야 나중에 시신이라도 찾는다 해서” 표식을 해둔 것이 있어 형과 동생을 어렵사리 찾아 내려올 수 있었다고 한다. 용욱은 형제가 세상을 떠나자 살던 곳에 정이 떨어져 시천면 내대리로 이사를 했다. 그곳에서 화전을 일구며 생계를 이어갔다.
두 분이 세상을 별하고 나니까 살아서도 그렇게 활기차지 못하고, 여그서 살아서는 뾰족한 수가 없으니까, 저 내대리라고 하는, 한 30리 되는 지리산 오지로 들어가셨어요. 거그서 화전민을 하셨다고요.
증언자 종욱 씨의 아버지는 화전 가지고는 못살겠다고 장사를 했고, 종욱도 20살 때 하동읍에 서기로 있다가 해방 후에는 공무원으로 전국을 한 바퀴 돌면서 살아왔다. 아버지는 “왜정 때는 ‘쉬쉬’ 입을 덮는 판이라서 그거이 노출되면 자기에게도 불리하다 해서”, 종욱 씨는 직장에 달려 살다보니까 산소를 찾아볼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가 공무원 생활을 마치고 고향인 시천면에 정착해서 살면서 할아버지가 들려준 얘기가 되살아나고 산소도 어딘지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산소 위치를 아는 사람은 할아버지와 성묘를 좀 다녔던 고종형이었다. 어느해 고종형이 산소를 옮기자고 해서 그러기로 했는데 그도 그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종욱이 들어 알고 있던 것은 산소가 고성산 아래 북방리에 있다는 것뿐이었다. 산소 찾는 일을 미루다가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1987년인가 1988년에 고성산 아래로 찾아갔다.
인자 거 가니까 그 당시에 한 팔십 된 분이 있었는데 그분도 확실히는 모르드만. 모르는데 그 산의 지형이 이쪽으로는 부락이 있응께 밤에 못 내려온다 말이지. 여그는 산이고 하니 올라갈 때라 해봐야 여기 두곳 뿐이다. 거기는 지금 부락이 돼 있는데 거 가서 하씨라는 분을 찾아서 물어보믄 그 묘를 찾을 수 있겠다. 내가 볼 때 그것뿐이 없다 그러드라고요. 그래 가서 하씨라는 분을 만나서 사정 이야기를 쭉 하니까, 여 바로 옆입니다. 왜정 때 보니까 나만한 할아버지가 개나리봇짐 지고 혼자 갓 쓰고 수염을 지다란히 내린 분이 거서 성묘하는 것을 봤다고 하더라고. 틀림없는 할아버지 산소라는 거여. 현지로 가서 찾으니까 순순히 찾을 수가 있었어요. 그런데 묘도 형식적으로 조금 남았다 뿐이지 없고.
묘를 찾고 나서 할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를 되새기면서 큰할아버지, 작은할아버지 활동에 대한 자료를 찾으려고 갖은 애를 썼다고 한다. 관청, 문화원, 독립기념관, 천도교에 서류를 보내어 자료를 찾았지만 활자로 기록된 이름을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다.
할아버지한테서 들은 그 얘기를 갖고서 하동 군수한테도 서장을 올렸더니 고증자료를 내놔라 이거여. 그러나 고증자료가 있습니까. 그당시 자료가 없어서 각 문화원이니 뭐니 다 다니면서 자료를 뽑아도 자료가 없어요. 자료를 찾기 위해서 독립기념관장한테도 서류를 보내서 찾아주시오 했고, 또 원호처에 가서도 얘기를 했는데 자료가 없다 이거요. 뒤에사 진주 천도교 본부에 계시는 분이 표영삼이라고 하는 분이 그 당시 상황을 기록해논 것이 있다 하는 거여. 그래서 그 책자를 내가 얻어왔드만 그거는 누가 했다는 말은 없고 사건 개요만 기재해논 것이 있어서 얻어 봤지예.
원호처장한테서 내려온 공문은 국가유공자로 포상을 하겠으니 신청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요건이 활자에 기록된 증빙자료를 제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농민전쟁에 참가하였다가 희생된 대부분의 농민군 이름이 자료에 남아 있을 리가 없다. 그 이름이 기억으로 남아있으려면 당시 농민군을 학살한 관군이나 일본군이 한사람 한사람 확인하여 적어 놓았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죽은 농민군은 ‘거괴’ 누구와 ‘비도’ 몇 명이라는 전과의 대상일 뿐이었다. 또한 농민전쟁 이후 우리 근현대사에서 권력을 장악한 어떤 세력도 전사자, 부상자, 참가자를 조사하여 기록해 둔 역사가 없다. 그 뒤 조사와 정리를 하려 했다고 해도 중요한 근거는 후손이나 주위의 증언이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도 정황에 합당한 후손들의 확실한 증언보다 더 생생한 자료가 어디있겠는가. 자료에 이름도 숱하게 많지만 아직까지 국가에서 공적을 인정하고 포상을 하고 있지 않은 현실은 마찬가지다. 종욱씨는 후손들의 증언을 체계있게 수집·정리하여 농민군의 활동을 복원하고 그들의 뜻을 기리는 일이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는 상황을 안타까워 하면서 말을 맺는다.
요행히도 진주에 당시의 문화원장이, 김범수 씨가 아니라 뒤에 범수가 됐지만도, 당신 잘 만났다 말이지. 우리 거 내부락이다 이거예요. 내가 살고 있는 부락인데 고성산 밑이 참 이걸 안타깝다 이거예요. 근데 이걸 갔다가 당신이 힘을 합쳐서 하자 말이지 이런 얘기가 됐어요. 그래서 그때부터서 뭐 할라고 조직체도 맨들고 김범수 씨도 나중에 조직의 위원장으로 모시고 여러 각도에서 일을 해봤는데 자원이 워낙 없어요. 없다보니깐 일이 되지 않고 중도에서 그만 흐지부지하고 말고 지금까지 그런 상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