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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록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고성산 부근에서 전사한 이은동, 손자 태길
대상인물

이은동(李殷東)

?~1894. 진주 고성산 부근에서 10월 14일 전사.

증언인물

이태길 (李泰吉)



1948~ . 족보명은 길연. 건설업에 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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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도
가계도 이미지
정리자

박준성

출전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

내 용

1894년 농민전쟁에 참가했다 희생된 농민군 수가 얼마나 되는지 아직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수많은 농민군이 희생되었다는 사실만 곳곳에서 따로 확인될 뿐이다. 그 많은 희생자 가운데 자료에 이름이 남아 있는 예는 100명 가운데 한 명, 1,000명 가운데 한 명도 채 안된다. 대부분은 이름도 남김없이 쓰러져 갔다. 집안이나 가까운 사람들이 그들의 참가를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농민전쟁에 참가했던 사실은 오히려 ‘쉬쉬’하면서 감추어야 했던 상황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100년이 넘게 시간이 흐르면서 전해들었던 사람들의 기억도 희미해져 갔다. 후손들이 이제 다시 관심을 가지고 할아버지 또는 증조할아버지가 농민전쟁 때 참가한 행적을 찾아보려 해도 찾을 길이 없어 안타깝다. 이태길(본명 길연)도 그런 사람이다.

은자 동자 할아버지 말이죠. 그분이 아매 결혼하고 얼마 안되어가지고 거기 연루된 모양인데, 돌아가신 날짜만 나와 있지. 생년월일은 안 나와 있는기라. 돌아가신 데서 한 30년 가까이 후퇴로 보면 되겠지. 자식이 그때 하나 있었다는 말이 있었는 것 같은데 지금은 알 길이 없고. 지금 아버지 윗대 할아버지 대에서 거의 마감해뿟는 모양이에요.

은동이 낳았던 자식이 살아 자손을 보았다면 친손자나 증손도 어디엔가 살아있을 텐데 그들은 할아버지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고 있을까. 은동이 농민전쟁에 참가하려 했을 때 집안에서는 많이 말렸다고 한다.

아버지가 들은 얘기로는 할아버지가 거기 간다는 걸 집에서 많이 말렸답니다. 근데 그 할아버지가 여기저기 다니면서 들은 얘기도 있고, 또 일본놈들 학살에 살지도 못하겠고 그러다보니까 같이 가담했던 모양이에요. 집안에서 많이 말렸답니다. 그 당시로서는 자손이 얼마 안되니까, 집해야 불과 몇집이니까 형제뿐이고 사촌이고 뭐고 이것뿐이지요.

반대를 무릅쓰고 참가했던 은동이 죽은 뒤 집안에서는 그 사실을 숨기며 살아왔고 족보에서도 빼버렸다. 그의 자식 이름도 족보에 따로 올렸을 리 없다. 그러한 사정은 농민전쟁 이후 많은 집안에서 비슷했지만 완고한 전주 이씨 집안이라 더했던 것 같다. 지금은 태길을 비롯한 젊은 세대들이 주장해서 은동의 이름을 족보에도 올리고 제사도 지낸다고 한다.

당시 그런 사람이 있는 집안에는 벨로 글않은기요. 고마 딱 끈었뿐교. 숨기고 살아야 되니까. 또 우리 집안이 전주 이씨 집안이어서 완고해노니까 밑에 사람들은 아는 사람이 없는기요. 본래 은자 동자 할아버님에 후손이 하나 정도는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없거든예. 이 할아버지를 처음에는 족보에서도 빼뿟어. 그걸 우리 젊은 세대들이 우겨가지고 인제 족보를 중앙에 올렸어요. 아무도 아는 사람은 없고 제사만 지금 모시는데, 제사는 지금 내 사촌이 모시고 있습니다.

친증손은 아니지만 태길은 ‘동학’에 참가했다 돌아가신 증조할아버지 은동에 대해 좀더 자세한 행적이 알고 싶었다. 자료도 뒤져보고 알 만 할 듯한 사람들을 찾아나섰다. 그러나 속시원한 답을 구하지는 못했다.

아무리 자료를 찾을라캐도 자료가 없어요. 전쟁터의 전쟁은 나오는데 할아버지 이름을 찾을 만한 자료는 하나도 안 나와요. 그래서 내가 답답해서 촌에 가서 하소연을 했어요. 아버지 세대 같으면 여기에 대해 훤히 잘 알겠는데 어떻게 하나도 모르고 동학에서 돌아가셨다는 그것뿐이 모르느냐고. 그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다 그러대요. 할아버지들이 위에서 입을 딱 닫아뿌니까. 지금까지도 그걸 함구해 왔거든.

그래도 은동이 농부였고, 재산은 별로 없었으며, 체격이 좋았고 ‘동학’에 참가했다 죽었는데 시체를 어떻게 찾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어렸을 때 듣던 ‘장군 할아버지’라는 이야기를 다시 떠올리며, 묘가 왜 사천군 곤양면 송전리에 있을까도 연결시켜 생각해보았다.

우리가 어릴 때 듣기로 장군 할아버지 이렇게만 알았고 세세한 건 몰랐어요. 그래서 뒤에 확실히 알고 보니까는 동학전쟁 때 돌아가셨다 하고 이야기하데. 체격이 좋았답니다. 동학에 가서 죽었다는 것만 남기고 어떻게 어떻게 해서 시체를 찾을 때가 참 묘한 기라. 14일 날 전투를 하다가 새벽 무렵에는 쫓기는데, 우리 할아버지는 거기서 후퇴하면서 돌아가셨던 모양이야. 10월 달이 되면 벌판의 논가에 보리심고 하거든요. 그래서 할머니 되시는 분이 시체를 찾으러 갔는데, 보니까 목이 없더랍니다. 하도 사람이 가면 많이 죽어서 오니까는, 할머니가 표시를 해둔 게 있었답니다. 그래 그걸 보고 시체를 찾았는데 그 시체를 옮기지도 못하고 그래서 그 주위에 묘가 있어요. 거기가 사천군 곤양면 송전리 포곡 산 1번지 일 거여. 첩첩산중입니다.

“14일날 전투를 하다가 후퇴하면서 돌아가셨던 모양”이라는 것은 증언자 태길의 추측이다. 그는 할아버지가 피신하다가 죽은 걸로 알고 있다. 시신은 할머니와 증조할아버지가 같이 가서 찾았던 것 같고, 사망날짜는 정확히 10월 14일이라고 덧붙인다.

피신하다가 많이 죽은 기라. 총에 맞았더랍니다. 아니 총에 맞은 것 그런건 모르겠는데 목이 없더랍니다. 할머니만 간 게 아니고 은자 백자 할아버지하고 같이 갔던 모양이야. 논에 시체들이 있는데 자세히 보니까 허리에 표시해둔 게 보이더랍니다. 사망 날짜는 정확합니다. 10월 13일날 김인배 대장 지휘하에 집결해서 싸우다가 14일날 사망하신 거죠. 그렁께 제사는 13일날 지내거든요.

그는 하동과 진주 쪽 농민전쟁 관련자료를 더 찾으면서 할아버지 은동의 제사날이 10월 13일이니까, 돌아간 날은 14일일 것이고, 그날은 고성산성에서 큰 싸움이 벌어진 날인데다 “김범수 씨가 서부경남에 제사를 조사했는데 요때 제사 날짜가 젤로 많더랍니다”는 조사를 근거로 할아버지의 죽음이 진주 고성산전투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단정한다.

나한테 필요한 하동 쪽 전쟁하고 진주쪽 전쟁만 뽑다보니까 1894년 9월 1일날 하동이 함락되었는데 그해 9월 14일날 진주로 진격해가지고 9월 17일날 진주 목사의 항복을 받았답니다. 이건 동학군이 하동을 함락시킨 거예요. 9월 17일날 진주 목사가 마중을 나와서 항복을 하더랍니다. 이 이후로는 전쟁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고. 할아버지가 그 당시에 김인배 씨라고, 이 사람이 하동사람이고마는, 이 사람이 여기의 총 인솔자지. 근데 10월 13일 날 전부다 관군에 밀려 가지고 하동군 옥정면 대포리에 고성산성에서 집합을 한기라. 집합해가지고 거기서 14일날 전투가 벌어졌는데, 그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거지.

태길이 이해하고 있는 은동의 활동과 죽음을 그의 증언을 바탕으로 다시 정리해보면 이렇게 된다.

종증조할아버지 이은동은 집안에서 말렸는데도 동학에 참여하였다. 그가 속한 부대의 지휘자는 김인배 부대였는데, 이 부대는 관군에게 밀려 10월 13일 고성산에 집결해서 14일 전투를 벌였다. 할아버지는 거기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고, 전투를 하다가 새벽에 쫓겨 지금 묘가 있는 사천군 곤양면 송전리 포곡 부근까지 피신하였다가 그날 거기서 돌아갔다. 그래서 제사는 10월 13일에 지낸다. 시신은 할머니(은동의 부인?)와 형인 은백 할아버지가 발견하여 그 가까이에 묘를 썼다.

이 가운데, 전해들은 “동학에 참가하여 돌아가셨다”는 점과 묘가 사천군 곤양면 송전리 포곡이고, 제사날이 10월 13일이라는 사실 말고는 몇 가지 실제와 다른 점이 있으며, 커다란 의문은 그대로 남아 있다. 실제와 다른 것은 “9월 17일날 진주 목사가 마중을 나와서 항복을 했다”, “김인배가 하등사람이다”, “그의 부대가 관군에게 밀렸고 10월 14일 고성산 전투를 김인배가 지휘했다”는 따위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과 증언의 차이는 이렇다. 김인배는 영호대접주로서 ‘9월 18일’ 농민군 1천여 명을 이끌고 진주성에 입성하였다. 그때 ‘진주병사’ 민준호는 영장을 보내 이들을 정중히 맞이하였고 성내로 안내하여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였다. 김인배는 ‘전북 금구현’에서 태어났지만 하동 전투에도 참가했고, 그의 영향력 아래 있던 영호대도회소의 연합세력에는 하동 농민군이 포함되어 있었다. 10월 14일의 고성산 전투는 농민군과 ‘일본군’이 싸운 것이고, 이 전투를 김인배가 직접 지휘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거기에 참여했던 농민군세력은 김인배의 영향을 받고 있던 부대였다. 큰 의문은 이은동이 실제 고성산 전투에 참가했는가, 왜 목이 없는 시체가 사천군 곤양면 송전리 포곡 부근에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은동이 고성산 전투에 참여했다고 가정해보면, 그는 1천 4~5백 명(일본군 보고) 또는 4~5천 명(지방사람의 말)의 한 사람으로 다음의 세 경우 가운데 하나에 속했을 것이다. 고성산 오른쪽에서 싸우다 덕산 쪽으로 퇴각하였거나, 고성산 위로 올라가 산성에 의지하여 싸우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거나, 아니면 고성산 왼쪽에서 싸우다 후퇴한 경우이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참조). 그런데 은동의 시체가 발견된 곳이 고성산 남쪽이니까 고성산 왼쪽에서 싸우다 후퇴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 다음이 문제이다. 증언자의 추측으로는 전투를 하다가 새벽에 쫓긴 것 같다고 했는데, 일본군 보고로는 오전 8시 무렵부터 싸움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사천군 곤양면 송전리 포곡 부근에서 몸둥이만 남긴 채 죽었다면 일본군의 추격을 받았거나 관군에게 잡혔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은 북쪽으로 퇴각한 농민군을 추격했으며, 고성산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때 진주성을 지키고 있던 관군이 곤양 쪽으로 나가 피신하는 농민군을 잡아 목을 잘랐다는 근거도 없다. 그렇다면 잡혀 죽은 곳은 시체가 발견된 곤양면 송전리 포곡이 아니라, 그곳부터 고성산까지 직선으로 10km 사이 어느 곳에서 체포되어 목이 잘린 채 몸만 포곡 골짜기로 옮겨져 내팽겨쳐졌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렇다면 제사날과 시체를 발견한 곳으로 보아 이은동은 고성산 전투에 참가하였다가 그 부근에서 체포되어 목잘려 죽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문제는 확실한 근거를 찾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태길은 기록으로 남아 있는 근거를 가지고 사실을 확인해야 하는 어려움을 말하면서 이렇게 되물었다.

나도 뒤지다가 여기서 앉아뿐 사람이거든예. 근데 전봉준 장군 같은 분은 모범적으로 재판도 받았고, 물론 참수를 당하셨지만은, 기록에 남아 있거든요. 이렇게 기록에 남은 사람은 고작 100명이나 1,000명에 한 명꼴 정도 아닙니까? 은자 동자 할아버지는 어떤 지위셨는지 모르지만 수천 명 중에 한 분이잖습니까?

정리자도 이 말에 동감하면서, 희생된 수천 수만의 농민군 이름이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보다 더 답답하고 가슴아프게 생각한 것이 농민전쟁 이후 전개된 우리 근현대사와 그 역사의 모든 결과인 오늘의 현실, 그리고 그에 대한 역사인식의 문제였다. 우리 근현대사는 농민군의 후예들이 계속 실패하기만 한 역사, 오랫동안 그것을 실패로만 기록한 역사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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