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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록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김산의 참나무 마을 동학 두령 편보언, 손자 호열, 사열·방손 중렬
대상인물

편보언(片甫彦)

1866~1901. 자는 사언(士彦). 오래된 동학 교인으로 갑오년 김산의 도집강이 되어 폐정개혁 주관.

증언인물

편중렬(片重烈)



1913~ . 경북 금릉군 어모면 다남동 오청계에서 농사지음.

경북 금릉군 다남동 진목에서 농사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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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도
가계도 이미지
정리자

신영우

출전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

내 용

보은집회 이후 동학의 제2대 교주 최시형은 또 다시 각지로 숨어다니지 않으면 안되었다. 각 군현의 관헌들이 집요하게 추적하는 것을 피하면서 교세를 확장하는 사업에 분주했다. 동학의 여러 역사자료들은 1893년 경상도 칠곡과 인동 등지에서 그렇게 활동하는 최시형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던 중 최시형은 김산군에 가서 편사언(片士彦)의 집에 머문 기록이 나온다. 김산은 지금 김천시와 금릉군으로 이름이 바뀐 곳이고, 편사언이 살던 마을은 어모면 참나무였다. 한자로 진목(眞木)이라고 표기하는 이 마을로 교주 최시형을 만나러 어느날 서병학 등 동학의 고위 간부들이 찾아왔다. 교단을 급진 방향으로 이끌어나가자는 제안을 하려고 온 것이었다. 이들은 이제부터 교조의 억울한 죄를 풀어달라는 청원이 아니라 “정부를 공격하고 국가를 혁신”하는 운동을 벌이자고 주장했다. 물론 이런 제안은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최시형의 판단에 따라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면 편사언은 어떤 인물인가? 당시 최시형이 머물러 있던 참나무 마을은 절강 편씨의 집성촌이었다. 임진란 때 이여송 휘하에 유격장으로 참전했다가 조선에 정착한 명나라의 장수 편갈송(片碣頌)이 절강 편씨의 시조이다. 참나무 옆동네인 다남동 오청계 마을에 사는 편중렬(片重烈, 1913년생) 옹은 족보를 펴놓고 선조의 내력을 설명한다. 그는 편씨 문중을 이끌며 대소사를 관장하는 어른이다.

시조께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어양총절사(漁陽摠節使)가 되어 2천 병사를 이끌고 오셨어요. 왜적과 평양에서 싸우고 또 소사 전투에 참여하셨다고 쓰여 있잖아. 울산 전투에선 크게 이겨서 비석도 세웠다고 해요. 2세가 되시는 풍자 세자(風世)도 병자호란을 맞아 남한산성에서 싸우다 전사하셨지. 그래서 공신에 추증되셨어요. 4, 5세께서 선산 서면 무곡(舞谷)에 사시다가 6세 되시는 만자 천자(萬天)께서 김산으로 오셨어요. 어모면에 살던 우리 일가 가운데는 벼슬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어요. 기자 진자(沂珍) 이 분은 무과에 급제해서 통정대부가 되시고 전라도 중군을 하셨지. 그리고 그 아드님이 6형제인데 모두 출중하셨어요. 큰아드님 사언(士彦)은 무과에 급제해서 통덕랑을 하셨는데 문장이 뛰어났고, 둘째아드님 대언(大彦)은 계당(溪堂) 유주목(柳疇睦) 선생 문하에서 공부하신 학자이고, 셋째아드님 좌언(佐彦)은 정평 부사와 함안 군수를 지내시고, 넷째와 여섯째 아드님도 무과에 급제했어요,

영조 초년의 이인좌란 이후 영남의 양반들은 벼슬길에서 멀어진다. 명가라고 알려진 문중조차 진사 한두 사람이 나온 것에 힘입어 위세를 유지하던 이 시기에 편씨가에서는 지방관을 거듭 지낸 사람을 배출하고 있었다. 양반은 이름 높았던 조상과 더불어 문장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학맥이 연결되면 지역사회에서 교류를 하는 데 모자람이 없었다. 당시 상주 부근에서 큰 학자로서 학맥의 중심이 되었던 인물이 계당 유주목이었다. 영남에서 이인좌란 이후 처음 재상 반열에 올랐던 유후조가 계당의 부친이 된다. 편씨가는 벼슬과 문장을 갖춘 당당한 양반이었다. 또 재산을 일구어 지주로서 당당히 행세하던 집안도 나왔다. 편중렬 옹이 말해준 출중한 6형제를 둔 편기진의 집안이 그런 지주였다.

이 집안은 토지가 많았어요. 천석꾼이라고 했어요. 어디에 땅을 가지고 있었냐면 어모면하고 감문면이지. 말 그대로 천석을 했었는지는 모르지만, 전해내려온 이야기로는 큰 지주였다고 해요.

그러면 동학사에 나오는 ‘김산의 편사언’은 큰 지주라는 데 이 집안의 장남인가? 그렇지 않다. 편씨가의 족보에 사언(土彦)이란 이름이 두 군데 나온다. 언자가 돌림자이기 때문에 편기진의 장남은 선비 사자를 넣어 이름을 지었으나 자는 원서(元瑞)였다. 또 다른 사언은 이름이 보언(甫彦)이지만 자가 사언이었다. 본이름과 자가 같은 두 사언 중 최시형이 찾아간 편사언은 누구인가? 이것은 족보만으로는 알 수 없고 후손들에게 전해온 내력을 들어야 한다.

동학 접주했던 분은 보자 언자지요. 오십 마지기 토지를 가졌던 부농이었는데 동학에 재산을 집어넣어 다 떨어먹었어요. 아들은 둘이 있었지요. 큰 아들 상학(相鶴)은 해방 전에 만주로 갔어요. 살 길을 찾아간 거지. 아버지가 파산을 해서 살 수가 없었으니까. 지금 살았는지 죽었는지, 또 자식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몰라요. 작은아들은 상린(相麟)인데 그 아들이 지금 진목에 살고 있어요. 그땐 배울 수가 없었지. 모두 어려웠어요. 옛날에는 잘 살았다고 해요. 진목에는 양반인 편씨가 주로 살았지요. 마을 중심에는 편씨들이 살고 둘레에는 노비들이 살았지요. 지금은 외지로 다 나가버리고 진목과 오청계 도동 동산에 약 50여 호 살고 있지요.

갑오년 당시의 기록을 보면 공문서에 나오는 이름은 대개 본이름인데 개인 기록에는 자를 많이 썼다. 동학 관련 기록에도 이름보다 자를 쓴 경우가 많다. 편사언도 자를 쓴 것으로 보인다. 집안에서 동학 접주를 했다는 분이 편보언이라고 전해지는 것을 보면 확실하다. 참나무마을에 가서 편호열·사열 형제를 만나서 이야기를 들었다. 이들 형제는 글을 배우지 못했다. 족보에서 그들 가계를 찾지도 못한다. 그것은 다 할아버지 때문이다.

(사열) 고모가 우리 어릴 때 “이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하지 말아라. 누구한테도 감쪽같이 속여라. 말을 한다고 좋은게 아니다. 늬들도 맞아 죽는다” 해가지고 동민도 모르고 우리도 잘 모르고 그래요. 뭔가 하니, 그 많은 재산을 가진 우리 할아버지가 똑똑했답니다. 똑똑했기 때문에 동학에 나섰답니다. 자기 토지를 팔아가지고 밑에 사람들 흰옷 사입혀가지고 상주, 이리로 많이 댕겼답니다.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모르지만 그러다가 붙잡혀가지고 서울서 죽었다는 말을 하데예. 처음엔 상주 형무소에 잡혀있다가 졸병들은 내보내고 두목이라 서울로 데리고 갔다고 카데. 분명히 들은 것은 맞아죽었다는 사실이지요. (호열) 형무소서 막 죽을라고 허니께 내보내가지고 죽었다는 소리도 있는데, 내도 모르겠어. (사열) 아무도 몰라요. 아버지도 그 당시에 일곱살 가량이라 카는데. 누구한테 들었느냐고요? 아버지한테도 못 듣고 어머니한테도 못 들었는데 고모님이 있었어요. 고모님이 나 어릴 때 그런 말을 딱 한 번 하더라고. 아버지보다 위엥께 지금은 죽었지요.

편보언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벌어지자 김산 지역에서 동학농민군의 지도자로 등장하고 있다. 그해 여름 김산 일대는 무장한 동학농민군이 장악했다. 그리고 전라도와 같이 집강소를 설치해서 잘못된 사회제도를 뜯어고치려는 활동에 들어갔다. 그 중심이 바로 편보언이었다. 8월에 편보언은 김천 장터에 도소를 세우고 도집강이 된다. 9월 25일 동학 교주 최시형이 기포령을 내릴 때 김산에서 동학농민군을 통제해서 봉기한 인물이 편보언이었다. 기포령 직후 경상도 북서부의 대읍들인 상주와 선산이 점거 목표가 되었다. 김산에서 결집한 동학농민군은 이웃 선산으로 진군하였다. 선산 읍내를 점거하는 공동 활동에 나선 것이다. 상주와 선산을 점거하는 동학농민군의 초기 활동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으나 곧 실패하고 만다. 일본군이 개입해온 때문이다. 상주 낙동과 선산 해평에 있던 일본군 병참부는 두 읍성을 기습해서 동학농민군을 몰아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해를 입었다. 김산에서 간 동학농민군은 선산에서 여러 명이 희생당하는 전투를 겪고나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 뒤 경상도 감영에서 보낸 영병이 김산에 들어와서 동학 조직을 궤멸시켰다. 각 마을을 다니면서 동학접주와 농민군 가담자를 찾아내어 처형했던 것이다. 편보언은 이때 다행히 외지로 피신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뒤늦게 붙잡혀 곤욕을 치렀던 것으로 후손들은 그 사정을 일부 전해듣고 있었다. 직계 후손들은 할아버지가 동학을 해서 패가한 것을 아직 원통해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잘 살았을텐데 동학을 했기 때문에 그 고생을 했다는 생각이었다.

(사열) 본래 할아버지가 사시던 곳은 저 건너라 카는데 이 마을 턱이라. 동네가 들어서기 전에 여기는 들이었어요. 할아버지 산소는 요 앞에 있어요. ‘교회 할아버지’라고. 확실히는 모르겠는데 우리 일가가 여까지 사람을 사서 업고 왔다고 해요. 막말로 할아버지가 집안을 버려놨지. 생각해보소. 활동을 숨겨 했는데…. (호열) 봉턱도 내가 만들어 놨습니다. 사실 고인이 됐지만 불쌍해서. 내가 관리도 하고 좀 깨끗하게 해놓고 있습니다. 아무리 밉게 살아도 안 그렇습니까? 할부지라서 이렇게 해놓고 있지, 미운 것 봐서는 해주기 싫지. (사열) 작년에 동학농민혁명 유족회 창립 총회에도 형님하고 둘이 서울에 갔다왔습니다만 할아버지가 국가로 봐서는 좋은 일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우리로 봐서는 가정파탄을 맨들은 거잖아요? 원체 오래된 일이라 지금은 좋아하지도 않고 미워하지도 않고 그렇습니다. 큰아버지는 만주로 가신 뒤에 한 번 동생을 데려가려고 왔었지. 그런데 할머니가 할아버지 산소에 벌초라도 해야 한다고 해서 따라가지 않았어요. 그쪽 사촌네는 연락이 되지 않아요. 고모는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난 뒤에 시집을 가셨지요. 할머니는 김해 김씨인데 친정이 세월리라 카대. 할아버지 돌아가신 후 내 혼자 살다가, 내가 상세히는 모르지만 우리 아버지하고 숨어 다니면서 친정에 왔다갔다 이래 지냈나봐요. 오촌 고드랑 양반인가가 할아버지를 많이 받들어 줬지. 나중엔 사람들에게 장남을 찾아 돌라케 싸서요. 여기서 견디지 못하고 고상을 무지하게 하고 얘기 들은께 친정에서 묘지를 줘가지고 산에 무덤을 해놨어, 저 너머에 있어요. 그래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가 떨어져 있지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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