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서우순(徐虞淳)
1849~1915. 일명 택순.
서병모(徐丙模)
1942~ . 청원군 북이면 금암리에서 담배, 벼농사를 지음.
1930~ 청원군 북이면 금암리에서 농사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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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우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
동학은 경상도가 발상지이나 충청도로 전파되면서 그 세력이 급속히 전국 각지로 펼쳐진다. 충청도의 동학 중심지 중 하나가 청주목이었다. 청주목의 동학 조직에서 고위 지도자로 활약한 이들은 손천민과 손병희 그리고 서인주 등이다. 청주목의 읍내에 동학 근거지가 있었던 것은 확인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확인할 수 있었던 동학 조직의 근거지는 산외이면과 남일면 또는 강서면과 같이 읍내에서 떨어져 있는 마을이었다. 읍내에는 많은 병사들이 주둔한 병영이 있었기 때문에 관아에서 금지하는 동학도가 모이기에 적합하지 않았을 것이다. 산외면 대주리는 1880년대 말 동학 마을로 변했다. 밀양 손씨와 달성 서씨가 어울려 살던 이 마을에 동학이 들어와 퍼진 것이다. 동학을 받아들인 중심 인물은 손천민과 서우순이었다. 손천민이 동학을 받아들인 것은 큰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 그는 청주목의 이방을 지냈다. 밀양 손씨가가 공주목 경내에서 세거하다가 청주목 대주리로 이주한 시기는 17세기 초였다. 그 이후 밀양 손씨는 청주목의 아전으로 지내면서 이 지역의 농민을 지배해왔다. 그러고 보면 나라의 명을 받아 동학도를 체포해서 처벌해야 하는 관리가 동학을 받들고 신봉하게 된 것이었다. 더구나 뒤에 동학의 주요 간부로 활동하는 서삼촌 손병희를 동학에 이끌어들이기도 하였다. 그러면 우리가 찾아보려는 서우순은 어떤 인물인가? 천도교 관련 역사 기록에 다음과 같이 서우순에 관해 언급된 내용이 있다.
해월 신사(神師)가 상주 전성촌에 자리잡은 후 각지에서 찾아오는 교도들을 가르쳤는데 그 주요 요지 중 하나가 다음 이야기이다. “내 일찍이 청주 서택순의 집에 들렀다가 그 며느리의 베짜는 소리를 듣고 서군에게 ‘군의 자부가 일하느냐, 천주가 직포하느냐?’ 한대 서군이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더라. 어찌 서군뿐이리오. 일세인이 이러하도다.
여기서 나오는 서택순이 서우순이다. 서우순이 살던 대주리는 지금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금암리 2구로 변했다. 그의 손자 서병모가 살고 있는 금암리 1구는 약 1km 정도 떨어져 있으나 전에는 같은 행정구역이었다. 집안에서 서우순에 관해 전해지는 이야기는 매우 적다.
족보에 할아버지의 자가 석여(錫汝), 도호는 영암(泳巖)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동학 접주 수교(授敎), 교장(敎長)을 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또 성도사를 맡으셨다고도 합니다. 집안에선 지리를 잘 보았다고 해요. 혹 집안에 변상이 일어나면 산소를 어디어디로 옮기라고 말하시기도 했다지요. 갑오년엔 접주로 활동하다가 어떤 연유로 체포되었는지는 자세히 모르나 공주감영에 투옥되어 불고문을 당했어요. 불고문을 당하는데 몸에 흉터가 남지를 않고 궁을기가 보였다고 합니다. 산소는 일찍이 60평 정도의 땅을 마련하여 그곳에 모시고 있어요. 지금 비석을 세우려고 표영삼 씨에게 비문을 부탁해놓고 있는 상태지요. 우리 아버지가 아주 어려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기에 작은댁에 의탁을 하고 살았어요. 그때 천도교 총부에서 연금이 나왔는데 다른 사람들이 받아서 썼다고 해요. 아버지는 아주 어렵게 사셨지요. 저는 물려받은 유산은 없었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살 만은 합니다.
청주목 읍내에서는 동학 교도들이 공공연히 드러내놓고 활동하지 못했으나 경내의 동학 교세는 1894년 여름에 거대한 세력으로 증대되었다. 음력 9월 보은 장내리의 교단에서 기포령을 내리자 즉각 무장봉기에 들어갔다. 청주목의 읍성은 동학농민군이 기습하여 커다란 전투가 벌어졌다. 청주목사는 여러 차례 읍성을 포위 공격하는 동학농민군을 막기 위해 정부에 구원병 파견을 요청하였다. 경군과 일본군이 청주를 향하여 일제히 남하하였다. 이 과정에서 서우순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그와 대접주 손천민의 관계를 보면 청의포(淸義包)에 속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청의포는 바로 청주 읍성 공격을 주도한 조직이었다. 따라서 서우순도 무장활동에 참여했기 때문에 공주감영에 잡혀가서 곤욕을 치른 것으로 생각된다. 방손인 서정학(1930년생) 씨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이 말은 집안과 동학에서 그가 가졌던 위치를 엿보게 해주는 것이다.
우자 순자는 집안에서 영향력이 컸습니다. 능력이 있었던 분이지요. 의암 손병희 선생이 동학에 입교한 것도 의암의 조카 손천민과 함께 우자 순자가 ‘동학은 보국안민하는 큰 도’라고 권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당시에는 동학교도들이 마을에 아주 많았어요. 지금은 10가구가 안되는 신도들이 명맥을 잇고 있지요.